은화의 제국-150년의 경제전쟁
1790년 늦가을 런던. 템스 강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은 짙은 스모그와 함께 런던 전역을 휘감았다. 인구 80만의 유럽 최대 도시 런던은 밀려드는 사람으로 숨 쉴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도시로 몰려든 것은 비단 농토를 잃은 농민들뿐만 아니었다.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출신의 해방 흑인, 인도 출신의 라스카(Lascar) 선원, 그리고 아메리카 전쟁에서 탈영한 이들까지 밀려든 런던은 살아남기 위한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런던 동쪽, 노동자 밀집지역인 화이트채플의 대로는 진흙과 말똥으로 뒤섞여 있었다. 아직 하수 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은 거리에는 하수가 쏟아져 나왔다. 마부들이 끄는 마차는 무거운 쇠바퀴로 진창을 짓이기며 지나갔다. 채찍에 놀라 뒷발을 차는 말 울음소리, 도둑을 쫓는 경찰의 호루라기, 길거리 상인의 외침이 뒤섞여 도시 전체는 늘 소란스러웠다.
여기저기 세워진 직조공장에서 나오는 증기 기관의 굉음과 직조기들의 쉴 새 없는 삐걱거림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화이트 채플 로드마켓' 뒤편 어두운 골목은 여전히 중세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하루 품삯에 목을 맨 가난한 실업자들은 해가 지면 몸을 누일 곳을 찾아 비좁고 허름한 뒷골목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들의 눈빛에는 절망과 과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밤 10시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울리자, 골목 끝의 허름한 선술집 '목마른 까마귀'의 문이 거칠게 닫혔다. 그 문틈으로 비어져 나오던 누런 불빛마저 사라지자, 골목은 순식간에 깊은 침묵과 어둠에 잠겼다.
붉은 벽돌로 얼기설기 지어진 건물들 사이로 밤 사이 술주정뱅이들이 배설한 악취가 맴도는 새벽녘, 축축한 자갈 위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희미한 흐느낌과 고통스러운 신음이 짧게 이어지더니, 이내 고요해졌다.
굶주린 길고양이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지다 피비린내에 이끌려 골목 안쪽으로 들어섰다. 녀석들의 날카로운 눈에 비친 것은 거친 자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뚱뚱한 사내의 축 늘어진 몸뚱이였다. 짙은 남색 코트가 피로 검게 물들어 있었고, 그의 얼굴은 잔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밤이 지나 동이 터오기 시작하고 그날따라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 무렵 경비병들이 도착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지역 길드의 장인과 상인들은 사내의 시신을 보고 비명을 질러 아는 체를 했다. 살해당한 이는 런던 상인 길드의 실세였고 최근 급부상한 신흥 자본가, 토마스 크롬웰이었다. 그는 런던 직물 시장의 판도를 뒤흔든 인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가차 없이 깎아내리고 길드의 전통적 관행을 무시하며 막대한 부를 쌓은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살인 사건 소식을 듣자마자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선임수사관 존 브라운이었다. 웬만큼 끔찍한 사건들을 다뤄본 베테랑의 눈에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시신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고, 머리에서는 뇌수가 흘러나올 정도로 심한 함몰흔이 있었다. 코와 입에서는 말라붙은 피가 엉겨 붙어 있었으며, 짙은 남색 코트 아래로 늑골이 부러진 듯한 깊은 상흔이 선명했다. 마치 짐승이 할퀸 듯 무수히 이어진 타박상과 열상들은 그가 죽기 전에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했는지를 말해주었다. 아니면 범인의 분노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게 했다. 온몸의 뼈가 비틀리고 뒤틀린 채, 한쪽 팔은 부자연스럽게 등 뒤로 꺾여 있었다.
시신의 코트 안쪽 주머니 위쪽에는 런던 최고의 재단사 '블레이크'의 이름과 옷의 주인 이름이 새겨진 라벨이 붙어있었다. '토마스 크롬웰'. 현장에 먼저 도착한 길드원 한 명은 시신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유독 비대했던 그의 몸집과 특징적인 대머리, 그리고 그가 늘 입던 독특한 남색 코트의 원단을 알아보고는 경악하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선임수사관 브라운은 인상을 찌푸린 채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금품을 노린 강도 사건은 아니었다. 그의 주머니에서는 지갑도, 값비싼 시계도 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가 맺은 원한 관계라면 손가락으로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잔혹하게 살해할 만한 뚜렷한 동기를 찾기는 어려웠다. 다만 다른 사건과 눈에 띄게 다른 점은, 피 묻은 그의 손 옆에 있는 석탄 조각이었다. 조각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호가 박혀 있었다. 아마도 그가 죽음 직전 움켜쥐고 있었던 듯했다. 브라운은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석탄 조각을 집어 들어 보며 혼잣말을 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미친 짓을 한단 말인가?"
런던 외곽의 농토에서 쫓겨난 사람들과 숱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로 밀려오면서 런던은 빈민의 소굴이 된 지 오래였다. 부랑아들이 넘쳐났고, 실업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새벽부터 밤까지 도시를 배회했다. 그리고 기어이 이런 참혹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브라운은 긴 골목 끝에 걸친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시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빗방울이 투둑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