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의 제국-150년의 경제전쟁
1932년 여름, 런던은 대공황의 차가운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멘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지를 책상 위에 던졌다. "등록 실업자 급증, 실업률 22% 돌파"라는 굵은 글씨가 헤드 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서브 제목은 "실업보험 등록자 350만 명 돌파"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실업률은 그보다 훨씬 높을 것이 분명했다.
기사는 공장이 문을 닫고 폐쇄하는 현황을 전하면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얼굴에 보이는 굶주림과 절망의 흔적을 심층 보도하고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리젠트 스트리트조차 활력을 잃었고, 길거리에는 일자리를 찾는 실업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이러한 전례 없는 경제적 재앙이 어디서 왔는지, 그것을 해결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의 서재, 킹스 칼리지의 고풍스러운 방은 쌓인 책과 논문 초고, 그리고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그의 머릿속은 해답을 찾지 못한 난제로 어지러웠다. 기존 경제학의 논리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 그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늘 완전 고용을 보장한다는 고전학파의 믿음은, 눈앞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한없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대서양 너머 미국에서도 '임금을 내려라, 임금을 내리면 고용이 늘어날 것'이라는 낡은 소리만 반복하고 있었다.
늦은 오후, 케인즈는 마침내 펜을 내려놓고 지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삶의 동반자인 아내 리디아는 발레 공연 준비로 런던 시내에 나가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할 겸, 그가 혼자서 즐겨 찾는 작은 브라스리로 향했다. 번잡한 도심을 지나 한적한 골목에 자리 잡은 '르 쁘띠 비스트로(Le Petit Bistro)'의 문을 열자 빵 굽는 달콤한 냄새와 알싸한 커피 향이 그를 맞았다. 이미 몇몇 지인들이 먼저 와 있었다. 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LSE)의 젊은 경제학자들, 재무부에서 일하는 정부 통계 전문가, 그리고 블룸즈버리 그룹의 예술가 친구들 몇몇이 모여 시끄럽지만 활기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메이너드, 또 무슨 어려운 문제를 푸느라 그렇게 수척해졌나?"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친구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지친 얼굴을 보고 농담처럼 물었다. 케인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문제는 너무나 명백한데, 그 해답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야. 고전적인 경제학의 낡은 사슬이 내 발목을 붙잡고 놔주질 않고 있네."
이렇게 말하면서 케인즈가 중간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자 던컨 그랜트가 옆으로 와 속삭였다.
"낡은 사슬은 끊어버리면 될 일이지."
케인즈가 그랜트를 바라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단순하지가 않아. 시장 질서는 의외로 강적이거든. 그러나 문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마법처럼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믿음으로는 눈앞의 수많은 실업자들의 절규를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일세."
그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대공황의 참담한 현실과 고전경제학의 무력함으로 이어졌다. 친구들은 실업률 통계와 산업 생산량 하락 수치를 언급하며 비관적인 전망을 쏟아냈고, 케인즈는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책 속 어르신들의 명제를 넘어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이들과 있으면 늘 그렇게 자유로워지고 싶은 열망이 솟았다.
그때였다. 뒤늦게 르 쁘띠 비스트로에 도착한 한 친구가 막 가판대에 올라온 따끈한 저녁 신문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젠장, 런던이 왜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건가."
그가 던진 신문 1면에는 섬뜩한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
"두 번째 비합리적 살인? 웨스트민스터 시장(mayor)의 잔혹한 죽음"
며칠 전 발생했던 한 무명 노동조합 간부의 살인 사건에 이어, 이번에는 런던의 유력 상공인이자 웨스트민스트 자치구의 시장인 '제이콥 모건'이 자신의 창고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끔찍한 살인 방식만큼이나 특이한 점은, 지난번 노동조합 간부 살인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금품은 전혀 손대지 않았고, 시신 옆에 은화 하나가 놓여 있었다는 것이었다.
케인즈는 신문을 들어 신문을 훑었다.
"비합리적 살인이라... 흥미로운 제목이군."
기사에 의하면 경찰은 두 사건 모두 범행 동기가 불분명하고, 피해자 간의 공통점도 없어 그저 '미친 살인마'의 우발적 소행으로 보고 있었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는 공포와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기사를 읽는 케인즈의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단순히 '미친 살인마'의 소행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가슴을 한가득 채웠다. 공장이 문을 닫고, 일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실업자로 전락하는 대공황의 시대였다. 사회 전체가 병들어가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이런 '비합리적인' 범죄에 대한 경제학자로서의 자책 같은 것이었다.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케인즈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 런던에서는, 방향을 잃은 어둠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살인 사건이 연거푸 일어나고 있다.'
신문을 놓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던 케인즈는 갑자기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양해를 구한 케인즈는 모자를 쓰고 밤거리로 걸어 나왔다. 어둠이 깊어가는 런던은 어제보다 더 음산하게 느껴졌다. 그의 발걸음은 피해자인 제이콥 모건의 창고가 있던 웨스트민스터 지역의 상업 중심가 방향으로 향했다. 신문에서 본 사건 현장이었다. 현장은 아직 경찰 통제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낡고 초라한 건물들이 밀집한 상업 지구의 좁은 골목은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바싹 마른 피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그는 통제선 너머, 붉은색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곳을 응시했다.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케인즈 경?"
낮고 쉰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낡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중년의 사내가 담배를 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런던 경시청의 프랭크 톰슨 경위였다.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케인즈는 재무부와 왕립경제학회 활동을 하며 경찰 관계자들과도 안면이 있었다. 톰슨 경위도 그런 인연으로 몇 번 만난 얼굴이었다.
"산책 겸, 요즘 런던을 흉흉하게 만드는 사건의 현장을 직접 보러 왔네, 톰슨 경위."
케인즈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신문 기사를 보니 범행 동기가 여전히 미궁이라더군. 제이콥 모건은 런던에서 꽤 알려진 인물인데도 말이야."
톰슨 경위는 피곤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골치 아픕니다, 경. 금품은 손대지 않았고, 원한 관계도 뚜렷하지 않아요. 그저... 놈이 남기고 간 그 낡은 은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죠. 지난번 노동조합 간부 살인 사건 때도 똑같은 은화가 발견됐습니다. 영장을 발부받아 모건의 서재를 뒤져봤지만, 특이한 건 없었습니다. 그가 누굴 원한 살 만한 짓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은화라…."
케인즈는 흥미로운 듯 턱을 쓸었다.
"그 은화는 지금 어디 있나?"
"그게... 왜 작년에 스코틀랜드 야드 산하에 '메트로폴리탄 경찰과학연구소'가 설립되지 않았습니까?... 아니 , 잘 모르시나?,,, 아무튼 거기로 보내서 이런저런 과학적인 증거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케인즈가 아는 체를 했다.
"아, 그, '런던 수도경찰청 과학연구소'말이군."
동전이 새로 생긴 연구소에까지 보내졌다니 케인즈는 은화에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나중에 그 은화 내가 좀 볼 수 있겠나?"
"증거 분석이 끝나면 절차를 밟아 경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케인즈가 경위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은화, 자네가 보기에 뭐 특별한 점이 없었나?"
"글쎄요... 나중에 분석이 끝나면 직접 한 번 보시죠."
톰슨 경위는 이렇게 말하고 얼른 돌아섰다. 케인즈의 피곤한 질문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케인즈가 다시 경위를 불렀다. 경위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으나 '네, 경' 하는 대답은 명랑하게 했다.
"모건은 어떤 사람이었나? 기업을 운영하면서 문제는 없었나?"
"지금 수사 중인데 아직 특이점은 못 찾았습니다. 혹시 짚이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짚이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고... 다만 지금처럼 실업자가 넘치는 시기에 죄짓지 않는 기업가가 없으려니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해고를 당하거나 빚을 지거나 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런 이유로 설명될 수 있는 범죄는 아닙니다. 모건은 비록 돈에는 집착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읍니다. 신문에 비합리적 살인이라고 한 것도 그런 것 때문 아닌가 합니다."
"..."
케인즈의 큰 키가 약간 좌우로 흔들렸다. 그로서는 대공황 자체가 '비합리적'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케인즈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투였다.
"비합리적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겉으로 보기에 비합리적인 일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합리성을 가질 때가 있지 않나? 일할 사람은 많은데 공장이 놀고 있는 것도 그렇고 말일세."
비합리적인 살인이라는 신문 표제를 보고 케인즈가 느낀 묘한 감정은 바로 그런 인식 때문이었다. 일하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이 주변에 널렸는데 왜 공장은 문을 닫아야 하는가? 공장이 돌아간다면 실업자들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왜 공장은 문을 닫아야 했는가? 최소한의 합리성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뜬금없는 경제학 강의에 톰슨 경위는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상대는 대(大) 케인즈 경이 아닌가, '말해라, 나는 듣는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케인즈의 강의는 그걸로 끝이었다.
"아, 미안하네. 저녁 기사에 '비합리적'이라는 말이 있어서 내가 좀 과민해져서 그렇네."
"아닙니다. 우리 마누라가 하는 온갖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행동도 나중에 생각해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톰슨 경위가 말꼬리를 흐리며 말하고 '내가 실언을 했나?' 하는 표정으로 케인즈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케인즈가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톰슨을 향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당신 마누라의 그 충동적인 비합리성이야말로 버릴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니... 어쩌면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할는지도 모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하는 표정을 짓는 톰슨 경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인즈가 한 마디 던졌다.
"자넨 참 좋은 아내를 뒀군."
"..."
이번에는 톰슨 경위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케인즈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한 톰슨도 비아냥거리듯 대꾸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노는 공장, 실업자, 비합리적 현상 이런 것들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래, 자넨 요약도 참 잘하는군..."
톰슨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자 케인즈는 '훗' 하고 웃고는 톰슨에게 목례를 하고 뒤로 돌아서 현장을 빠져나왔다. 케인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어둠 속에서 수많은 아우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전의 경제학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의 비명이었다. 이런 감상적인 느낌에 잠긴 케인즈는, 이 비합리적인 살인이야말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삐져나온 비극의 일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케인즈는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으로 향할 채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