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회중시계

by 정섭



제1화 회중시계


##1980년, 서울

1980년 3월, 혜화동 캠퍼스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련과 개나리가 캠퍼스 곳곳에 화려하고 고운 색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표정에는 봄의 생기가 없었다.

정섭은 물리학과 건물을 빠져나오며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 올해 들어 캠퍼스 안팎으로 정보부 요원들이 늘어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작년에 일어난 부마항쟁,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12.12사태, 그리고 뒤 이어 물밀 듯한 전국적인 노동쟁의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의 여파가 개학에 맞춰 전국의 대학가로 번지고 있었다.

"정섭 선배! 여기야!"

교정 한편에서 손을 흔드는 여학생을 발견하고 정섭은 걸음을 재촉했다. 수현은 언제나처럼 단정한 블라우스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은 단발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항상 책을 읽는 문학소녀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수업 끝났어?“

수현이 반갑게 물었다.

"응, 오늘은 일찍 끝났어. 교수님도 상황이 심상치 않으신지 수업 중에도 계속 창밖만 보시더라."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교문을 향했다. 정섭은 물리학과 3학년, 수현은 국문학과 2학년이었다. 두 사람은 작년 가을,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근데 할머니가 선밸 꼭 보자고 하셨어.“

수현이 갑자기 말했다.

"할머니? 저번에 뵀을 때 건강이 안 좋아 보이셨는데, 괜찮으신 거야?"

"응, 많이 호전되셨어. 그런데 계속 선배를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할머니가 선배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수현의 할머니 정정화 여사는 올해 여든 살로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분이라고 했다. 정섭은 수현의 소개로 처음 만난 때부터 그분에게서 특별한 위엄과 따스함을 동시에 느꼈었다. 정정화는 정섭을 보자마자 유독 반가워하셨고, 마치 오래된 친구를 대하듯 편안하게 대해주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럼, 오늘 같이 할머니 뵈러 갈까?"

"그래, 할머니가 정말 좋아하실 거야."

버스를 타고 성북구 혜화동으로 향하는 동안, 도심 곳곳과 학교가 있는 곳에서는 시위대와 전경들의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최근 들어 상황이 점점 더 격화되는 듯했다. 어제는 광주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요즘 상황이 심상치 않네...“

정섭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응, 할머니도 걱정을 많이 하셔. 일제강점기 때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신대."

버스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자, 한옥이 즐비한 혜화동의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졌다. 수현의 할머니 정정화의 집은 오래된 한옥으로,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났지만 정갈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정섭 선배도 같이 왔어요.“

수현이 대문을 열며 소리쳤다.

툇마루에 앉아있던 정정화가 두 사람을 보자 미소를 지었다. 마르고 작은 몸이지만 하얀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린 정정화는 언제나처럼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정섭 군, 오랜만에 왔네."

정섭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어서 들어와 앉거라. 차 한 잔 마시자."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정정화는 수현에게 차를 준비해 오라고 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 정정화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정섭 군, 자네에게... 줄 게 있네."

정정화가 천천히 일어나 문갑으로 가서 작은 나무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오래되어 보였지만 잘 관리되어 반짝거릴 정도였다.

"이건... 내가 젊었을 때부터 간직해 온 물건이야. 이제는 이걸 자네가 가지고 있었으면 해."

정정화가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낡은 회중시계가 놓여 있었다. 은빛이 바랜 시계는 앤티크한 매력이 있었다. 정섭은 놀란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이걸 제게 주시다니... 너무 귀중한 물건 아닌가요?"

"이 시계는 특별한 시계란다. 시간을 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때로는 시간을 넘어서게 해 주지."

정정화의 말에 정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회중시계를 손에 들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회중시계의 뚜껑을 열어보니 오래된 태엽 시계가 나타났다. 시계 바늘은 멈춰있었다. 시계 뚜껑 안쪽에는 작은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뾰족한 금속 같은 것으로 긁어서 그려 넣은 문양이었다.

"이 시계는 내 시아버지인 동농 선생 나에게 준 것이네."

정정화의 눈에 회한의 빛이 스쳤다.

"동농 선생이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세나. 우선 지금은 그저 이 시계를 소중히 간직해 주기를 바랄 뿐이네. 언젠가 자네에게 꼭 필요로 할 때가 올 테니."

그때 수현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뭐 그렇게 진지한 얘기 중이셨어요?“

수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할머니께서 이 회중시계를 주셨어.“

정섭이 시계를 보여주었다.

"어머, 그 시계! 할머니가 항상 소중히 간직하던 건데..."

수현은 놀란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정정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 정섭 군에게 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단다."

수현은 갸웃했지만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정정화가 수현을 보며 말했다.

"수현아, 그런데 네 할아버지가 모아두신 자료들 정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니?"

수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많이 남았어요. 별채에 있는 자료가 너무 방대해서..."

정정화는 정섭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섭 군, 수현이가 혼자 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인 것 같은데, 좀 도와주면 어떻겠나? 우리 수현이 할아버지는 해방 후에 독립운동 자료를 모으는 일을 했는데 6.25 전쟁통에 북으로 끌려가면서 흐지부지되었거든."

"물론이죠,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정섭이 즉시 대답했다.

정정화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고맙네. 그 자료들은 나름 귀하게 모은 자료니까 잘 정리해 주게. 나도 돕겠지만 두 사람이 다 한다고 생각하고 해 줘."

차를 마시며 세 사람은 한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정정화는 젊은 시절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었다. 구한말 대신이었던 시아버지 동농과 남편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상해로 망명한 이야기. 그것을 신문에서 보고 시어머니가 기절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도 결국 혈혈단신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몰래 상해로 간 이야기에서는 스릴이 느껴졌다.

정섭은 이전에도 수현을 통해 자신의 할머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오늘 정정화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는 훨씬 생생했다. 교양국사 담당 교수가 의열단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것이 생각이 난 정섭이 아는 척을 했다.

"할머니, 혹시 의열단하고도 활동을 같이 하셨나요?"

"의열단? 물론이지. 의열단과 임시정부는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는 관계였지. 김원봉과 의열단 동지들의 결기는 정말 대단했단다."

정정화가 추억에 잠긴 듯 말했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창문 너머로 전투경찰들이 골목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학생들을 찾아다니는 것 같네.“

정정화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요즘 대학생만 보면 무조건 시위대로 의심하나 봐요.“

수현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섭은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났다.

"할머니,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귀한 시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가게. 특히 그 시계 잘 간직하고..."

정정화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수현아, 내일부터 정섭 군과 함께 할아버지 자료를 정리해 보렴.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니..."

"네, 할머니. 내일 정섭 선배랑 같이 올게요."

다음 날, 정섭과 수현은 약속대로 정정화의 집을 찾았다. 정정화는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라. 할아버지 자료를 모아 놓은 별채로 가보렴."

두 사람은 한옥 뒤편에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방 안은 책과 서류로 가득했다. 벽을 따라 놓인 책장에는 오래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바닥에는 여러 상자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와, 이렇게 많은 자료가 있었구나." 정섭이 놀라워했다.

"응, 할아버지가 해방 후 3년간 모으신 거래. 독립운동 관련 문서, 사진, 편지... 다양한 자료가 있어."

두 사람은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낡은 문서나 신문 스크랩, 사진들이었다. 몇 시간 동안 자료를 정리하던 중, 정섭은 작은 나무함 하나를 발견했다.

"이건 뭘까?“

정섭이 나무함을 열어보려 했지만, 잠겨 있었다.

"모르겠어. 처음 보는 건데." 수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섭이 함을 자세히 살펴보니 측면에 작은 비밀 장치가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장치를 조작하자 '딸깍' 소리와 함께 함이 열렸다.

"와, 어떻게 열었어?“

수현이 놀라워했다.

함 안에는 붉은 비단 천에 싸인 물건이 있었다. 정섭이 조심스럽게 천을 펼치자 그 안에는 작은 인장이 나타났다. 인장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고, 윗부분에는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지?"

수현이 물었다.

"이건... 인장인데...“

정섭이 인장을 자세히 살폈다.

"윗부분에 태극 문양이 있네."

그때 정섭은 주머니에 있던 회중시계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시계를 꺼내 보았다. 시계 안쪽 뚜껑에 있던 태극 문양과 인장의 태극 문양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수현아, 이 인장... 혹시 임시정부 인장이 아닐까?"

수현의 눈이 커졌다.

"정말? 할아버지가 그런 걸 가지고 있었다고?"

정섭이 인장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려는 순간, 시계와 인장이 서로 가까워지자 둘 다 이상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정섭이 놀라서 말했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여러 명이 뛰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쿵’ 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이 얼른 문을 열고 바깥을 살피려는 순간 학생 하나가 후다닥 뛰어 들어와

“죄송합니다. 경찰이 쫓아와서...”

하고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어떻게 할까 생각할 틈도 없이 대문을 쾅쾅 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복경찰들이었다.

"문 열어요. 문! 빨리 열어요!"

"정섭 선배, 어떡해?" 수현이 불안해하며 물었다.

"괜찮아,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정섭이 수현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도 불안하게 떨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정섭은 회중시계와 인장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내가 나가볼게. 너는 여기 있어."

"안 돼, 같이 가자.“

두 사람이 방을 나서 대문을 여는 순간, 시계와 인장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정섭의 주머니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뭐야 이거...“

정섭이 주머니에서 시계와 인장을 꺼냈다. 사복경찰들이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두 물건은 이제 마치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정섭이 그것들을 가까이 가져가자 두 물건의 태극 문양이 마치 미친 듯이 소용돌이처럼 휘감겼고 희고 밝은 빛을 발했다.

"정섭 선배!"

수현이 소리쳤다.

하지만 정섭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주변으로 빛의 소용돌이가 형성되고 있었다. 갑자기 강한 충격파가 정섭을 감쌌고, 그 순간 인장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현아!“

정섭이 외쳤다. 그의 주변 세계가 흐려지기 시작했고, 회중시계만을 손에 쥔 채 그는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921년, 상해

쓰러진 상태에서 정섭이 눈을 떴을 때 수현은 보이지 않았다. 사복경찰도 없었다. 게다가 정정화의 집 마당도 아니었다. 몸을 일으켜 앉았으나 낯선 골목이었다. 야트막한 목조 건물들의 모습도 낯설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골목에 두세 명의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말투도 생소했고 옷차림도, 꾀죄죄한 모습도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몸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정섭이 복잡한 골목길을 따라 대로로 나왔다. 아이들의 옷차림만이 아니라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복장이 모두 이상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중국식 장포와 양복을 혼합한 듯한 옷차림이었고, 여자들은 치마저고리나 중국식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간판들은 대부분 한자로 되어 있고 간혹 영어 간판이 섞여 있었다.

대로변 노점상 앞에는 신문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온통 한문으로 된 신문의 날짜를 유심히 보던 정섭은 깜짝 놀랐다.

'民國十年(西紀1921年) 三月三日'

"민국 10년, 서기 1921년...? 말도 안 돼..."

정섭은 충격에 휩싸였다. 수현과 함께 있던 1980년의 서울은 온데간데없고, 60년 전의 낯선 땅이라니? 주위를 가만히 살피면서 정섭은 이곳이 중국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정정화의 말이 떠올랐다. 정정화는 젊은 시절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계에 대해 '시간을 넘어서게 해 준다'라고 했던 말...

'혹시 상해...? 여기가 상해?'

정섭이 혼란스러워하며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갑자기 골목 저편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한 젊은 남자가 일본인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아이츠오 츠카마에로! 기레츠단노 야츠다!“

일본인 경찰의 외침이 들렸다. 쫓기는 사람은 양복에 중절모를 쓴 20대 중반의 남자였다. ‘한국인인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필사적으로 달려오던 남자가 정섭과 어깨를 부딪쳤다. 뒤에서 일본 경찰이 쫓아 오는 것을 본 정섭은 정정화의 집으로 뛰어 들어왔던 학생이 생각나 방금 자신이 나왔던 골목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쫓기던 남자가 망설임 없이 정섭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뛰었다. 정섭도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 자신이 방금 빠져나왔던 복잡한 골목길을 빠른 걸음으로 뛰었다. 두 사람이 어느 정도 달려 일본 경찰들의 추격을 따돌렸을 즈음, 정섭과 사내는 작은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 뒤로 들어가 몸을 숨었다. 그들은 잠시 숨을 고르며 서로를 살폈다.

"당신... 조선 사람이오?“

남자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정섭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말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다.

"네... 조선 사람입니다."

"옷차림이 이상하고 말투도 특이하오만... 어디서 왔소?"

정섭은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저는 서울... 아니 경성에서 왔습니다. 유학을 위해 상해에 막 도착했습니다."

남자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이범석이오. 당신은?"

"저는 박정섭입니다."

이범석이라는 이름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했지만, 정섭은 기억을 더듬을 여유가 없었다.

"박정섭 선생, 감사하오. 당신이 아니었다면 왜경에게 붙잡혔을지도 모르겠소."

"저는... 그저 쫓기고 있으니 도와드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아까 일본 경찰이 뭐라고 소리를 질렀던 겁니까? “

”아하, 그거요. ‘저놈 잡아라, 의열단 놈이다!’“

이범석이 일본 경찰을 흉내 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의열단이라는 말에 정섭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이범석을 바라보았다. 정정화와 의열단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불과 하루 전 일이었다. 이범석은 잠시 정섭을 관찰하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지금 막 도착했다고 했는데, 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 나와 함께 하겠소? 내가 아는 유학생도 소개해 줄 수도 있고."

정섭은 잠시 고민했다. 낯선 과거의 상해에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그리고 이 남자가 '의열단'이라면, 더더욱 안심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골목을 빠져나와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걸었다. 이범석은 능숙하게 길을 안내했고, 정섭은 그저 따라갈 뿐이었다. 낯선 1920년대 상해의 풍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인력거와 말, 마차가 지나다니고, 중국인과 서양인, 그리고 조선인들이 뒤섞인 이국적인 광경이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이범석은 작은 차 가게 앞에서 멈췄다. 그는 주변을 살핀 후 가게 안으로 정섭을 안내했다.

가게 안은 조용했다. 두세 명의 손님이 차를 마시고 있었고,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카운터에 있었다. 이범석이 주인에게 중국어로 뭔가를 말하자,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뒷문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가게 뒤편으로 나아갔고, 복도를 지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책상과 의자 등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중국과 한국, 일본의 지도가 걸려 있었다. 책상 앞에는 젊은 여성이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정정화 선생, 손님을 모셔 왔소."

정섭의 심장이 멈춘 듯했다. 그 여성이 고개를 들었을 때, 정섭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놀랐다.

그녀의 얼굴은... 수현의 할머니, 그러나 60년 젊은 모습의 정정화였다. 흑백 사진 속 바로 그 젊은 정정화가 눈앞에 앉아있었다.

"정정화... 선생님?"

정섭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이름이 흘러나왔다.

젊은 정정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섭을 바라보았다.

"뭐 하는 분이죠?"

정섭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앉아있는 것은 분명 수현의 할머니 정정화였지만, 정섭이 아는 그 정정화는 아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쪽진 모양이었고, 한복 위에 검은색 조끼를 입은 차림이었다. 책상 위에는 수첩과 펜이 놓여 있었다.

"이분은 박정섭이라는 분인데, 내가 일본 경찰에게 쫓길 때 도와주셨소.“

이범석이 설명했다. 정정화는 여전히 정섭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건 감사한 일입니다만... 근데, 옷차림이 매우 특이하군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정섭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경성에서 왔습니다. 중국 유학을 위해 방금 도착했습니다. 교통대학에 입학할 예정입니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정섭이 언젠가 중국의 교통대학에 대해 들은 적 있었던 것을 기억해 둘러댔다. 교통대학은 중국의 근현대 기술 국산화의 역사에 중요한 대학이었다.

"유학생이라...“

정정화가 정섭을 자세히 살폈다.

"그런데 그런 특이한 차림은 어느 시대, 어느 동네 것입니까?"

"이건... 요즘 서양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스타일입니다.“

정섭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 역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단정한 차림의 남자였고, 지적이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오, 정정화 동지?“

남자가 물었다.

정정화가 정섭을 가리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이범석 동지가 데려온 사람인데, 경성에서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정섭을 유심히 살폈다.

"이름이 뭐요?"

"박정섭입니다."

"김의한이라고 하오. 여기서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위험한 일이니, 신원이 확실치 않으면 곤란하오."

정섭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김의한... 수현의 할아버지였다. 정정화의 남편이자, 6.25 때 납북돼 생사조차 파악되지 않는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임시정부 인장 때문에 과거로 온 정섭이 그 인장을 남긴 김의한을 만난 것이다.

"저... 저는 정말 경성에서 온 유학생일 뿐입니다. 교통대학에서 공부할 생각이고요."

"교통대학, 유학?“

김의한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유학생이라면 내 주변에 아주 가까운 벗이 있지. 심대섭 군이 지강대학 문학부 학생인데, 혹시 들어본 적이 있소?"

정섭은 순간 당황했다. 심대섭이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방금 상해에 도착했거든요."

김의한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정섭을 계속 살펴보았다.

"당신의 그 옷차림, 영 이상하오. 그리고 말투도...."

정섭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저는 고향이 조선의 남쪽이어서 말투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세 사람 모두 정섭을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고, 곧 문이 열렸다. 역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일본 경찰들이 이 근처를 수색하고 있소! 의열단 단원 한 명을 찾고 있다는군요."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긴장했다. 김의한은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

"일단 이 사람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소. 정정화 동지는 여기 있으시오. 나는 이범석 동지와 함께 이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겠소."

김의한은 정섭에게 손짓했다.

"나를 따라오시오. 그리고 절대 소리 내지 마시오."

정섭은 고개를 끄덕이고 김의한을 따라 방을 나섰다. 세 사람은 좁은 복도를 지나 가게 뒤편의 작은 문으로 나갔다. 골목길은 어둡고 좁았지만, 김의한은 능숙하게 길을 찾아 나갔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정섭이 앞서가던 김의한에게 조용히 물었다.

"안전한 곳이오. 그리고 당신이 정말 당신이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는 곳이오."

세 사람은 복잡한 골목길을 지나 프랑스 조계지로 들어섰다. 곳곳에 서양식 건물이 보였고, 관청 같은 건물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여기는 일본 경찰의 관할이 아니오. 프랑스 조계지에서는 조금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소."

마침내 그들은 허름한 중국식 가옥에 도착했다. 김의한은 특정한 방식으로 문을 두드렸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정섭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그는 김의한을 보자 반갑게 맞이했다.

"성엄 형! 오랜만입니다."

"심훈 선생, 잘 지냈소?"

일행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김의한이 정섭을 심훈에게 소개하면서 말했다.

"심훈 선생, 이 사람은 교통대학에 유학 차 온 학생이라는데, 심훈 선생이 신원도 확인해 주고 필요하면 도움도 좀 주시오."

정섭은 그때야 기억이 났다. 심대섭은 해방 후에 '상록수'라는 소설을 쓰게 되는 바로 그 심훈이었다.

심훈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섭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통대학 유학생이라고요? 교통대학이라면 내가 잘 알지. 이야기를 한번 해 봅시다."

세 사람은 거실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거실은 서양식과 중국식이 혼합된 인테리어였고, 책들이 가득했다.

"내 본명은 심대섭이요, 상해로 오면서 심훈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세인트 존스 대학에 다니다가 올해부터 지강대학교 국문학부에서 공부하고 있지요. 당신은요?"

"박정섭입니다. 물... 물리학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물리학?“

심훈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관심이 있으신가 보군요?"

정섭은 눈이 빛났다. 이것은 그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네, 특히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싶습니다.”

심훈이 웃음기를 띄고 정섭에게 물었다.

“혹시 시공간의 휘어짐에 대해 잘 알고 계시오?”

정섭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물질의 질량이 커지면 주변의 시공간이 휘어지게 되고 그로 인해 중력도, 시간 흐름의 왜곡도 생긴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소.”

심훈이 계속 실실 웃으면서

“아니 뭘 그렇게 정색하고 답을 하시오.”

하고는 김의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사람은 학생은 확실히 맞는 것 같소. 그런데 어떻게 성엄 형이 정섭 군을 데리고 온 거요?"

“조금 전에 이범석 동지가 일본 경찰에 쫓길 때 도와줬다고 해서 데리고 왔소.”

정섭이 계면쩍을 표정을 하며 말했다.

"그저... 우연히 마주쳤을 뿐입니다. 조선 사람이 위험에 처한 것 같아서 도왔을 뿐이에요."

김의한이 정섭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가까이 대며 말했다.

"당신의 옷차림이나 말투는 확실히 이상하오. 그리고 아까 말이오. 당신이 내 이름을 들었을 때 살짝 더듬던데, 혹시 날 아시오?"

정섭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퍼뜩 정정화가 정섭에게 해 준 시아버지 동농과 남편 김의한이 1919년 겨울에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했다는 이야기와 국내에서는 크게 신문에 났었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정섭이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조선에서는 동농 선생과 김의한 선생이 의주를 거쳐서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저기 신문에 대서특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김의한이라고 말하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심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성엄 형이 너무 예민했던 것 같긴 하군."

"어쨌든,“

김의한이 말을 이었다.

"일단 당신이 밀정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겠소. 하지만 여전히 당신은 수상한 점이 많소."

정섭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를 감시하셔도 좋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제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섭이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보이기 위해 짐짓 가슴을 부풀리며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정섭의 바지 주머니에 있던 회중시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섭이 회중시계를 얼른 주워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심훈이 물었다.

"그게 뭐요?"

정섭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다시 꺼냈다.

"이건... 제가 소중히 여기는 시계입니다."

시계를 본 김의한의 눈이 커졌다.

"그 시계... 어디서 구했소?"

"선물로 받았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김의한은 정섭으로부터 시계를 받아 들고 자세히 살폈다.

"이상하게도 내가 본 적이 있는 시계와 닮았소. 내 부친께서 특별하게 여기시는 시계가 있는데..."

정섭은 긴장했다. 김의한이 시계 뚜껑을 열자 안쪽에 새겨진 태극 문양이 드러났다.

"이건... 아버님의 것은... 아닌 듯한데?"

정섭은 얼른 말을 받았다.

"정말 선물로 받았습니다. 아실 만한 시계인가요?"

김의한은 시계를 정섭에게 다시 돌려주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심훈이 끼어들었다.

“박정섭 군은 오늘 상해에 왔다는데 어디 머물 곳은 있소?”

안 그래도 어디서 머물지 걱정인 정섭이 ‘아직 구하지 못했다’고 답하자 심훈이 반색했다.

"여기 빈방이 있소. 당분간 여기서 나와 같이 지내도 좋을 것 같소."

정섭이 고개를 숙여 인사해 냉큼 결정을 지어버렸다.

"고맙습니다.“

"그럼 결정되었소. 벗이 없어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소.“

심훈이 싱글벙글하며 답했다.

김의한이 말했다.

"박정섭 선생은 심훈 선생 숙소에 머물면서 교통대학 입학 준비를 하시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을 지켜볼 것이오."

정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김의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제 돌아가야겠소. 수당에게 당신이 안전하다고 전하겠소.“

하더니

"아, 수당은 정정화 동지의 아호요.“

하고 덧붙였다.

다시 돌아서다가 그는 정섭을 바라보며 한 마디 더했다.

"그리고 그 시계... 부디 조심히 간수하시오.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물건일지도 모르오."

김의한이 떠난 후, 심훈은 정섭에게 차를 건넸다.

"자, 이제 우리 둘뿐이니 편하게 이야기합시다. 당신은 정말 누구요? 경성에서 온 유학생이라기엔 뭔가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소만."

정섭은 심훈의 솔직한 태도에 약간 마음이 놓였다.

"저는... 정말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제가 독립운동에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믿어주십시오."

심훈은 잠시 정섭을 응시하다가 미소 지었다.

"알겠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 그때까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하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심훈이 정섭에게 내준 방에 들어가 방안을 두리번거리다 창문 쪽을 향했다. 창밖에는 1921년 상해 거리가 낯설게 펼쳐져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꼭 쥐었다. 이 시계가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면, 언젠가는 그를 다시 1980년, 수현이 있는 시대로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인장이 필요했다. 회중시계는 인장과 함께 있어야 기능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정섭이 과거로 오는 순간 인장은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져 현대에 남겨졌으니 남은 방법은 1921년의 임시정부 인장을 찾는 것뿐이었다.

'방법을... 찾아야 해.'

정섭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자신이 과거로 오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어떤 사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자리에 누웠다.


(제2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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