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붉은 봉인

by 정섭


제2화 붉은 봉인


## 1921년 상해

심훈의 집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정섭은 낯선 시대와 낯선 땅에서 하루하루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심훈은 그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중국어 회화책, 상해 지도 등 중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자료를 빌려주었고, 프랑스 조계지의 생활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려주었다. 어느 날 아침, 심훈이 차를 마시며 물었다.

"교통대학에는 정말 들어갈 생각이오?“

정섭은 그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래야지요.’ 하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심훈이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망설이듯 말했다.

"그런데 확실히 정섭 군의 행동이나 말은 어딘가 수상한 것이 분명하거든. 어디선가 본 듯한 물건을 갖고 있고, 입은 옷도 여기서는 본 적이 없는 옷이고... 조선 사람인 것은 분명한데, 뭔가 조선 사람 같지가 않단 말이오."

정섭은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저는... 조금 특별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고향도 남쪽이고요."

"알겠소, 알겠소. 내, 사람을 너무 의심하는 것 같아 나도 불편하오. 더는 캐묻지는 않겠소.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니까."

그날 오후, 심훈은 정섭을 교통대학으로 데려갔으나 중국어를 모르는 외국인 학생 등록 과정을 문의하는 정도였다.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정정화와 김의한을 우연히 만났다.

"심훈 선생!“

정정화가 반가워했다.

"박정섭 선생도 함께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정섭이 할머니 생각에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심훈 선생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김의한은 정섭을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교통대학 입학 수속은 시작하셨소?"

"예. 그러지 않아도 지금 학교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정정화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말했다.

"저희가 내일 임시정부 관계자 몇 분과 비공식적인 모임을 갖는데, 심훈 선생도 함께하시면 좋겠어요. 박정섭 선생도 원하신다면 오셔도 됩니다."

심훈이 물었다.

"비공식적 모임?"

김의한이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동농 선생께서 소집하셨다오. 상해에서 활동하는 젊은 동지들과 함께 차도 마시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모양이오."

정섭은 '동농 선생'이라는 이름에 귀가 솔깃했다. 정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가도 될까요?“

정정화가 응답했다.

"심훈 선생이 보증한다니... 괜찮겠습니다."

다음 날, 정섭과 심훈은 약속된 시간에 차 가게에 도착했다. 정섭이 과거로 온 바로 그날 이범석이 안내했던 그 가게였다. 가게 안 깊은 곳의 방 안에는 김의한과 일본 경찰에 쫓기던 이범석을 포함해 5~6명의 젊은이들이 앉아있었다. 가운데에는 70대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입은 옷은 허름했지만 반듯한 자세, 강직한 눈매였다.

정정화가 가운데 앉은 70대 노인에게 정섭을 소개했다.

"박정섭 선생, 동농 선생께 인사하시지요."

정섭은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박정섭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동농 김가진은 정섭을 유심히 살폈다.

"이범석 동지를 도왔다던 그 청년이군. 경성에서 온 유학생이라고 들었소."

"네, 그렇습니다. 교통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서양 과학에 관심이 많아 다행이오. 우리도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을 테니."

회의라기보다 차담이 시작되었다. 동농은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노선과 김원봉의 의열단,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무력 노선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자는 운을 뗐다. 이승만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고, 의열단이나 북로군정서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논쟁이 뜨거워질 때쯤, 김가진이 정섭을 바라보며 물었다.

"박정섭 군, 조선에서 온 유학생의 관점에서도 한번 이야기해 보겠소?"

정섭은 역사적 인물들 앞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제 생각에는 두 가지 접근이 모두 중요합니다.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과 동시에, 일본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활동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가진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합이 끝날 즈음 김가진이 말했다.

"오늘 모임은 이 정도로 하고 파하도록 합시다. 임시정부에서는 다가오는 워싱턴 회의에 우리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를 논의할 예정인데, 오늘 젊은 동지들이 내놓은 의견을 비중 있게 참고하도록 하겠소."

회의가 끝나고 모두 자리를 뜰 즈음, 김가진이 정섭을 붙잡았다. "박정섭 군, 잠시 이야기할 수 있겠소?"

사람들이 나가고 두 사람만 남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김가진은 잠시 정섭의 얼굴을 살피더니 물었다.

"내 아들이 박정섭 군이 가진 시계에 대해 이야기했소.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정섭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김가진에게 건넸다. 김가진은 시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시계는... 확실히 내가 가지고 있는 시계와 같은 종류의 시계군...”

시계의 뚜껑을 열면서 김가진이 물었다.

“이 시계는 어디서 구한 것이오?"

정섭은 망설였다.

"선물로 받았습니다."

"누구에게서?"

"그것은... 제가 잘 아는 분께서 주셨습니다."

김가진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회중시계를 한참을 살피더니

"내 시계에는 없는 태극 문양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많이 낡기는 했지만 마치 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시계군."

그는 시계를 정섭에게 돌려주었다. 정섭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김가진이 입을 열었다.

"사실 박정섭 군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하오. 며느리와 아들과도 상의를 한 끝에 내린 제안이니 한번 생각해 보기 바라오. 내가 요즘 다리가 불편해 움직이기가 어려운데, 혹시 연락 업무나 문서 정리 일을 좀 도와줄 수 있겠소? 임정의 젊은이들이 시간 나는 대로 나를 돕고는 있지만, 다들 맡은 일로 바쁜 이들이라 영 마음이 쓰였는데, 아예 이 일을 정섭 군이 맡아서 해주면 어떻겠소? 일종의 비서 역할을 말이오..."

여기까지 말한 김가진이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아, 물론, 교통대학 입학 수속이 끝날 때까지 만이오."

갑작스러운 제안에 정섭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요? 하지만 저는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런 건 괜찮소. 문자를 알고, 조선의 독립에 뜻이 같은 조선 젊은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오. 게다가 아까 정섭 군의 발언도 인상적이었고. 그리고...“

동농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때로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시선이 필요할 때도 있소."

정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정화 할머니가 존경해 마지않는 시아버지 동농 선생의 비서로 일한다면 그 자체로서도 큰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임시정부의 핵심으로 들어갈 길, 곧 미래로 돌아갈 길을 찾는 것도 가능할 것이 분명했다.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요. 내일 내가 머무는 곳으로 와주시오. 프랑스 조계지 내에 있으니 안전은 보장되는 곳이오. 며느리나 의한에게 물어보면 주소는 알려줄 것이오. 오전 10시까지 오시게.“


## 1980년 서울

수현은 수업에 영 집중할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난 다음에도 누구와 말을 걸고 이야기하기도 귀찮았다. 정섭이 사라진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그날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날 경찰은 기어이 집에 들어온 학생을 끌고 나갔다. 정섭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잘못 본 것 정도로 치부하며 수군대기만 할 뿐 달리 말은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수현은 정섭이 사라진 당시의 상황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정섭의 주머니에서 나온 푸른빛, 뒤이은 희고 강렬한 빛, 그리고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회중시계와 인장...

정섭이 사라진 직후, 수현은 땅에 떨어져 뒹구는 인장을 얼른 주워 자세히 살펴보았다. 원에 갇힌 태극 문양이 천천히 돌다가 서서히 멈추면서 빛이 막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수현은 정정화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정섭의 실종 소식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정화에게 받은 회중시계와 할아버지 자료 더미에 있던 임시정부 인장이 만나 정섭이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말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수현은 정섭이 사라질 때의 상황과 땅에 떨어진 인장의 태극 문양이 움직이다 멈췄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정정화에게 인장을 보였다. 정정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인장을 자세히 살폈다.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장이구나."

"네,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자료 중에 있었어요."

”이게 할아버지가 모은 자료에 섞여 있었구나!“

하며 충격을 받은 정정화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할머니를 괴롭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수현은 할머니를 방에 모셔 놓고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수현은 다시 정정화에게 가보기로 했다. 정정화는 마당에서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정정화는 8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강했고 정정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산책을 하고, 오후에는 주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정화가 보는 책 대부분은 한문으로 된 오래된 책이었다.

"할머니."

정정화가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틀어 올려져 있었고,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에도 여전히 기품이 넘쳤다.

"수현이 왔구나, 정섭 군 소식은?"

수현이 고개를 젓자 정정화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수현의 손을 잡았다.

"수현아, 나를 따라와 보렴."

그들은 정정화의 방으로 향했다. 정정화는 책장 뒤에 숨겨진 작은 금고를 열고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들고 수현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수현아, 정섭 군이 사라짐으로써 드디어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할머니 무슨 말이야? 수수께끼가 풀리다니?"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이 사진첩은 내가 상해 시절부터 간직해 온 건데, 아직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사진들이란다."

정정화가 사진첩을 펼쳤다. 오래된 흑백 사진들이었다. 동농 할아버님의 모습도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1920년 상해 시절 사진인 듯했다. 젊은 시절의 정정화, 처음 보는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수현의 눈이 멈춘 곳에는 놀랍게도 정섭과 똑같이 생긴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수현이 놀라서 물었다.

"이 사람은...“

"그래, 네가 봐도 정섭 군이지?"

"어떻게 이런 일이..."

정정화가 깊은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네가 정섭 군을 데리고 오는 순간, 내 오랜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단다. 내가 정섭 군에게 회중시계를 준 것도 수십 년 전에 정해진 약속이었단다."

여기까지 말한 정정화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정섭 군이 사라짐으로써 그 정해진 약속이 실현된 거야."

수현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사라져서 약속이 실현됐다고요?"

"그렇단다. 네가 지금 사진으로 보고 있는 그 시절, 우리가 상해 임시정부에 있을 당시... 갑자기 정섭 군이 나타났어."

"그럼, 정섭 선배는 지금..."

"그래, 아마도 우리가 젊었을 때의 시간으로 갔을 거야. 1921년 상해..."

수현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할머니 옆에 서 있는 정섭은 며칠 전 서울에서 본 정섭과 완전히 같은 사람이었다. 틀림없는 정섭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할머니, 정섭 선배가 돌아올 수는 있는 거예요?"

"아마도 인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섭 군이 과거로 가던 순간을 생각해 보면 말이야."

"인장은 여기 있는데요?"

수현이 울상이 되자 정정화가 수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지금 정섭 군이 있을 과거에서 임시정부 인장을 찾는다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수현이 인장을 손에 쥐며 안타깝게 말했다.

"인장이 여기 있는데 어떻게 찾아요?"

"그건 아니지. 지금 네가 들고 있는 인장은 과거부터 있던 것이 시간이 흘러 여기 있는 거니까, 아마 1921년에도 있을 거야."

"그렇다면 지금 이 인장은 정섭 선배에게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거네요?"

정정화는 애써 밝게 웃으며 수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마라. 정섭 군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정정화가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빛이 어렸다.

혜화동 로터리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고, 최루탄 연기는 집안에까지 흘러들었다. 라디오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점차 거세진다는 소식이 반복되었다.

1980년 3월의 대한민국은 혼란 속에 있었다. 그리고 60년 전의 상해에서는, 정섭이 또 다른 혼란과 투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 1921년 상해

다음 날 오전 10시, 정섭은 약속대로 동농 선생의 거처를 찾았다. 김의한이 써 준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구근로(具勤路) 영경방(永慶坊) 10호, 프랑스 조계'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영경방 10호 김가진의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가자,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앉으시오, 박정섭 군."

정섭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김가진은 한동안 말없이 정섭을 바라보았다.

"이 집은 도산과 예관이 특별히 나를 위해 마련해 준 집이네. 젊은이들에게 폐만 끼치니 뭐든 도움 될 만한 일을 할 작정이야. 그러니 정섭 군의 역할이 적다고 할 수 없네."

'도산이라면 안창호를 말하고 예관이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심훈에게 물어볼 작정을 하고 있는데, 동농이 말을 붙인다.

"참 정섭 군은 잘 모를 수 있겠군. 도산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안창호 군이고, 예관은 법무총장 신규식 군이네. 예관은 얼마 전부터 이동휘 선생 뒤를 이어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고 있네. 둘 다 내가 관여했던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젊은이들이네."

정섭은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모두 일본에 반대하는 애국계몽 활동을 하다 강제로 문을 닫은 단체가 아닌가?

동농은 정섭의 눈빛을 살핀 후 말을 계속 이었다.

"정섭 군이 내 비서 일을 맡아주면, 몇 가지 해야 할 일들이 있네. 첫째는 문서 정리와 번역 작업이고, 둘째는, 이게 중요한 건데, 연락 역할이네."

동농은 그 외에도 임시정부에 밀정이 있을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는 말과, 특히 정섭이 새로운 인물이기 때문에 밀정 쪽에서 먼저 접근해 올 수도 있다는 말 등을 하며 주의하라는 당부를 했다.

대화를 마치고 나오면서, 정섭은 자신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느ꈈ다. 미래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은 눈앞의 임무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영경방 10호에서 나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대로로 막 나서는데, 누군가 그의 앞에 우뚝 섰다. 정정화였다. 정정화는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박정섭 선생, 여기서 마주치는군요."

"정정화 선생님, 안녕하세요."

"동농 선생님을 만나고 오는 길인가요?"

"네, 방금 뵙고 나오는 길입니다. 선생님께서 비서 일을 맡아 달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정정화가 들었다는 표시를 내고 말했다.

"안 그래도 어제 아버님께서 정섭 선생을 비서로 두는 문제에 대해 말씀을 하셔서 성엄과 저는 동의를 했습니다. 사실 최근 아버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하던 차였는데... 잘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시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역력했다.

"제가 잘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훌륭한 분을 모시는 일이니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그러자 정정화가 다짐하듯이 말했다.

"아버님의 비서를 맡으셨다고 하니, 주제 넘는 소리라 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당부가 있습니다.“

“무슨...?”

“그건 매사에 조심해 달라는 겁니다. 만약 비서인 정섭 선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님께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망설이는 듯하던 정정화가 내친걸음이니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말을 이었다.

“특히 최근 의열단이 모종의 거사를 계획하고 있는데, 정섭 선생은 가급적 그 일에는 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계획입니까?"

"아마 내일 거사의 자세한 계획이 밝혀질 겁니다. 내일은 심훈 선생 집에만 있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섭은 그녀의 진지한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정정화는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음에...“

하는 말과 함께 그녀는 사라졌고, 정섭은 홀로 남겨졌다. 정섭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심훈의 집으로 걸어가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새겼다. 동농 김가진의 비서가 되었고, 정정화는 의열단과 관련한 주의를 주었다.

정섭은 회중시계를 꺼내 바라보았다. 시계는 여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것이 다시 시간의 문을 열어줄지는 알 수 없었다.


(제3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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