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의열단의 불꽃
## 1921년 상해, 새벽
정섭은 심훈의 집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육십 년을 뛰어넘는 시간여행과 낯선 상해에서의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오랜만의 단잠에 빠진 정섭이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정섭 군, 빨리 일어나시오!"
눈을 뜨자 심훈의 긴박한 얼굴이 보였다. 창밖으로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정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임시정부에서 방금 연락이 왔소. 소집이오. 뭔가 중요하게 상의할 일이 생긴 듯하오. 어서 준비하시오."
심훈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재빨리 방을 나갔다. 정섭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아직 그의 옷은 현대에서 입고 온 그대로였다. 심훈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호출이오. 따라오기만 하시오."
두 사람은 서둘러 프랑스 조계지의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심훈은 마치 이 길을 수천 번은 걸어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앞장섰다. 그들은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골목길만을 택해 걸었고, 가끔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약 20분간 걸은 후, 두 사람은 허름한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심훈이 특별한 방식으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심훈이 정섭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가시오."
창고 안은 어둡고 축축했지만, 안쪽에서 희미한 등불이 보였다. 그곳에는 열댓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정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니 어제 임시정부 모임에서 본 이범석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정정화도 있었다.
정정화는 정섭을 발견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심훈에게 다가가 뭔가를 속삭였다. 심훈도 작은 소리로 뭔가 말을 해 그녀를 안심시키는 듯했다. 정정화가 어제 심훈의 집에서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고 당부한 말이 생각나 정섭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방 가운데에는 색이 진한 양복에 넥타이와 중절모를 착용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김의한이나 심훈보다는 한두 살 많아 보이는 그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다.
"저분이 누구십니까?“
정섭이 다가온 심훈에게 속삭였다.
"김원봉이오. 의열단의 단장이시지."
김원봉. 정섭은 그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교양국사를 강의하는 교수는 김원봉이야말로 최고의 독립운동가라고까지 말한 바로 그 김원봉이었다. 의열단은 삼일운동이 터지던 1919년 결성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로, 폭력적 방법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것을 주된 전략으로 삼은 조직이었다.
김원봉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동지들, 드디어 우리가 폭탄을 투척할 장소가 결정되었습니다. 임시정부와의 협조하에 상해에서 서북쪽 약 50킬로 떨어진 진강을 최종 목표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새벽, 우리는 진강 일본군 물자 집하장으로 출발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심훈이 옆에서 속삭였다.
"상해 시내에 폭탄을 투척하지 않는다는 발표를 한 것이오. 만약 상해에서 폭탄 의거가 일어난다면 상해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본 경찰의 타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지 않겠소? 그런 이유로 그간 의열단의 의거 장소를 두고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소."
김원봉은 자신과 함께 거사에 참가할 단원 세 명의 이름을 불렀다. "윤세주 동지, 허영백 동지, 오성륜 동지."
곳곳에서 탄식이 터졌다. 자신이 빠진 데 대한 아쉬움이었다.
호명된 사람 세 명이 앞으로 나왔다. 모두 양복 차림에 중절모를 쓴 젊은이들이었다. 임시정부 측에서는 직접 작전에 참여하지는 않고, 정섭과 김의한이 비상시 연락책 역할을 맡기로 하였다. 정섭을 임시정부 측이 추천한 것은 무엇보다 그의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창고를 빠져나갔다. 심훈은 정섭의 팔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정섭 군, 이 작전은 위험할 수 있소. 정정화 동지가 걱정이 많으니 반드시 김의한 동지의 지시를 따르고, 절대 혼자 행동하지 마시오."
"네, 알겠습니다."
김원봉과 김의한, 그리고 윤세주, 허영백, 오성륜 등은 따로 만나 작전을 숙의한 후 각자 행동에 들어갔다. 김의한과 정섭은 집결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폭탄 투척 후 빠져나오는 의열단 동지들을 빼내는 임무를 맡았다. 김의한과 정섭은 정정화가 마련해 온 마차를 타고 진강으로 향했다.
양자강을 따라 흐르는 안개가 진강의 군수품 집하장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거사 시간은 땅거미가 내려앉는 저녁 7시였다. 불그스름한 미명이 강 표면을 비추는 가운데, 김원봉을 비롯한 네 명의 의열단원이 강변의 갈대숲으로 들어갔다. 정섭과 김의한은 마차를 후미진 길목에 세워두고, 갈대숲에 연한 도로 옆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김의한 선생, 위험한 작전인 것 같은데 성공하겠죠?"
"누가 알겠소? 그러나 김원봉 단장이 지난 몇 개월간 이곳을 감시하며 일본군의 동태를 잘 파악했으니 아마 성공할 겁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지요.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우리 민족이 이토록 고통받지도 않았을 것이오."
김의한의 말에는 깊은 비애가 묻어 있었다. 정섭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 60년 후에 태어난 자신에게는 이미 지나간 역사지만, 그에게는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현실이었다
긴장된 시간이 흘러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때였다.
"쾅"
멀리서 둔탁한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폭발음이 들려왔다.
"콰쾅"
두 번째 것의 소리가 더 요란했다.
"성공이요.”
김의한이 정섭의 손을 꼭 쥐었다.
나뭇가지 위에 쉬고 있던 새들이 날갯짓을 푸드덕거리며 날았다. 정섭과 김의한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동안, 진강 집하장은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 불길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긴장된 시간 약 30분이나 지났을까, 한 청년이 풀숲에서 뛰어나왔다. 윤세주였다!
"다른 동지들은 어찌 되었소?”
윤세주가 마차 쪽으로 오자 김의한이 물었다.
윤세주는 숨을 헉헉거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김원봉 단장은 무사히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소. 나와 허영백 동지는 같이 빠져나오다 결국 흩어졌고, 오성륜 동지는 아마도 체포된 듯하오."
정섭이 초조하게 물었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윤세주가 말을 받았다.
"10분 정도 기다릴 시간은 될 거요. 그래도 안 오면 우리도 자리를 떠야 하오."
세 사람은 숨겨둔 마차에 올라탄 채 초조하게 풀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5~6분쯤 지났을까, 바로 그때 풀숲 사이로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한 사내가 풀숲에서 뛰어나왔다.
"저 사람은...”
윤세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외쳤다.
"허영백 동지다!"
허영백은 달리다가 넘어져 무릎을 다친 듯했다. 그는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일본군 한 명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도와야 합니다!”
정섭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우리는 무기도 없소.”
김의한이 비통하게 말했다. 정섭은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마차 구석에 마차를 지탱하도록 임시방편으로 박아둔 쇠파이프 하나가 보였다. 다행히 쇠파이프는 쉽게 뽑혔다. 그는 쇠파이프를 뽑아 들었다.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바로 왜군들이 몰려올 거요. 우리도 위험해질 수 있소.“
윤세주는 만류했다.
"하지만 저대로 두면 저 청년은 붙잡힐 겁니다."
정섭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마차에서 살며시 내려 어둠 속에서 허영백이 오는 방향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정섭으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망설이면 저 사람은 잡혀서 모진 고초를 당할 것이 분명했다. 허영백은 이제 숨어있는 정섭의 거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일본군도 허영백을 거의 붙잡을 지경이었다. 일본군이 그의 옷깃을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정섭은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며 어둠 속에서 튀어 올라 쇠파이프를 들어 올려 있는 힘을 다해 휘둘렀다. 쇠파이프가 일본군의 팔에 정확히 맞았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져 떼굴떼굴 굴렀다.
정섭도 자기 힘을 견디지 못해 그대로 땅바닥에 벌러덩 자빠졌다. 윤세주가 허영백을 부축해 마차에 오르는 사이 김의한이 정섭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빨리 탑시다!"
마차는 황톳길을 따라 필사적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쓰러졌던 왜군이 쏘는 총소리가 요란했다.
"탕, 탕"
이윽고 마차는 황톳길을 빠르게 빠져나가 대로로 접어들었다. 벌건 불길도 점점 멀어졌다. 마차는 상해로 달렸다. 더 이상 추격은 없었다.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차를 몰던 김의한이 정섭을 돌아보며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정섭 선생, 당신은... 정말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군요?“
하더니
"하긴 세상 물정 모르는 자라면 한 번쯤은 부릴 만한 만용이기는 했소.“
하고 덧붙였다.
윤세주도 거들었다.
"의열단 단장을 하고도 남을 용기였소. 오늘 새벽에 회의를 할 때는 샌님처럼 조용하기만 했는데 말이오.”
하며 정섭을 쳐다봤다. 제정신이 돌아온 허영백은 정섭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마차 안에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 1921년 상해, 임시정부
네 사람이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분주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동농이 몇몇 사람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섭과 김의한, 뒤이어 윤세주, 허영백까지 들어오자 동농은 반색하며 다가왔다.
"두 분 다행히 무사하셨군요. 소식 들었소. 의열단의 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은 들었소. 진강 쪽에 요란한 폭발음을 듣고 몇몇 동지들이 소식을 전했소."
"네, 선생님.“
윤세주가 대답했다.
"계획한 대로 두 곳에 폭탄을 투척했고 정확히 터졌습니다. 김원봉 단장을 필두로 탈출하던 중 오성륜 동지가 체포됐습니다. 김원봉 단장이 무사히 탈출한 것은 확인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두 분 동지들을 만나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윤세주가 말하는 동안 정정화가 급히 들어왔다. 여기까지 말한 윤세주는 숨을 돌린 후 정섭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 박정섭 군이 허영백 동지를 구하기 위해 일본군 한 놈을 때려눕혔습니다."
모두 놀라는 눈치를 했다. 동농은 정섭을 항해
"허영백 동지를 구하기 위해 일본군을 때려눕혔다고?“
하면서 정섭의 몸을 살폈다. 정섭의 옷은 흙투성이였다.
"몸은 괜찮은가?, 일본군을 때려눕히다니, 이거 무모하다고 혼을 내야 하나, 잘했다고 칭찬을 해야 하나 모르겠군. 허허"
"죄송합니다. 그저...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그랬습니다.“
정섭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용기 있는 행동이오.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오. 하지만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것이오. 정섭 군은 이제 내 비서이니,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곤란해지오."
동농의 말투는 엄했지만, 그의 눈에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동농은 전체를 향해 말했다.
"오늘 의열단의 의거는 일제에 큰 타격이 될 것이오. 하지만 그에 따른 수색, 감시, 보복과 탄압도 심해질 것이오. 우리 임시정부도 경계를 강화해야 할 겁니다."
동농의 말이 끝나자 정정화도 한마디 거들었다.
"박정섭 선생, 결국 내 경고를 듣지 않았어요. 하지만 허영백 동지를 도운 행동은 정말 장하다고 생각합니다."
"별말씀을요. 그저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동농이 뒤늦게 들어온 정정화에게 물었다.
"김원봉 단장 소식은 어떻게 됐는가?"
"네,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하지만 오성륜 단원은 체포된 것이 확인됐습니다."
모두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동농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성륜 단원은 누구보다 열심인 단원이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오. 희생은 따르기 마련이라지만... 안타까운 일이군.“
동농의 탄식이 길었다. 동농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정정화에게 말했다.
"오늘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김원봉 동지와 사진을 하나 남겨야겠다. 정화는 김원봉 동지와 심훈 군을 불러오너라. 사진 찍을 이도 한 명 데려오고."
약 10분 후 정정화가 이들을 데리고 왔다. 김원봉은 오는 길에 정정화에게 들었다며 정섭의 손을 꼭 잡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나이의 뜨거운 마음이 정섭의 가슴에 꽂혔다.
동농을 가운데로 하고 양쪽 옆에 정섭과 김원봉, 그 양옆으로 김의한, 정정화, 뒷줄에 윤세주, 허영백, 그리고 심훈이 자리를 잡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여덟 명 독립투사의 사진이 박혔다. 모두들 돌아가는 길에 동농이 정섭을 향해 말했다.
"박정섭 군, 내일부터 본격적인 비서일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심훈 군과 함께 돌아가서 쉬시오. 내일 아침 일찍 여기로 오시오."
"네, 선생님."
말을 마친 동농은 정정화를 향해 정섭 군이 입을 옷을 하나 준비하라고 일렀다. 정섭은 아직도 상해에 올 때 입었던 옷 그대로였다. 정섭과 심훈은 임시정부 건물을 나섰다. 거리는 소란스러웠고, 일본 경찰들이 여기저기서 검문을 하고 있었다.
"조심해서 가야겠소.”
심훈이 말했다.
"우회해서 가면 안전할 거요."
두 사람은 몇몇 건물 뒤편과 좁은 골목을 통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도중에 그들은 몇 차례 일본 경찰들을 피해야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심훈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심훈은 정섭에게 말했다.
"오늘 정섭 군 다시 봤소. 이 낯선 땅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이를 구하다니... 정말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소. 하하."
"과찬입니다. 사실 저는... 그저 순간적으로 행동한 것뿐인데요."
"그나저나 정섭 군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오? 통성명만 했지, 나이도 모르고 아는 게 아무것도 없질 않소? 서로 목숨을 빚지는 동지인데 말이오."
”저는 올해 스물두 살입니다.”
심훈의 미간이 약간 일그러졌다.
”심훈 선생은 올해...?”
”허허, 나하고 갑장일세그려. 나도 스물두 살이오. 그리고 성엄과 수당이 모두 스물세 살이고. 객지에서 이 정도면 벗을 삼으니 우리 앞으로 잘 지냅시다.”
정섭은 심훈이 나이를 살짝 부풀린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말마따나 객지에서는 다섯 살까지는 친구를 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아.
”좋습니다.”
하고 흔쾌히 답하면서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심훈도 정섭의 손을 맞잡으며,
”정섭 동지 반갑소. 우린 이제 벗이오. 하하”
하고는 그의 손을 잡아당겨 정섭을 끌어안았다. 동지라는 말에 정섭의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심훈 선생, 우리가 정말 벗이 된 것입니까?”
하는 정섭의 말이 떨렸다.
## 1980년 서울, 혜화동 한옥
수현은 정정화가 준 옛 사진첩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녀는 정섭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사진 속 정섭은 분명 자신이 알던 그 정섭이 맞았다.
"믿을 수가 없어...“
수현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혹시 수현이니? 나야, 김태훈, 너 할머니 댁에 있다고 어머님이 알려줬어."
김태훈은 정섭의 고등학교 2년 선배로, 수현과도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1년 재수한 탓에 역사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독립운동사, 그 가운데서도 특히 임시정부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선배,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이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요즘 내가 1920년대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내용으로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있거든. 그런데 자료를 조사하다가 정말 이상한 기록을 발견해서 말이야."
"어떤 기록?"
"이거 1922년 5월에 상해의 일본영사관에서 본국에 보낸 보고서 같은 건데, 들어 봐. '대정 10년(서기 1921년) 3월, 진강 군수품 집하장 폭탄 테러 사건에서 박정섭이 의열단원 허영백을 구출해 달아났다. 그는 동농 김가진의 비서로 알려졌다. 이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이렇게 돼 있어."
수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그게 정말이야?"
"응. 더 놀라운 건, 그 기록에 사진이 함께 있었는데... 이건 완전 우리가 아는 그 정섭이야. 야 이거 보는데 내가 미친 거 같아."
수현은 할머니가 보여주셨던 사진첩에 있는 정섭의 모습을 떠올렸다. 평소 같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핀잔을 줄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선배, 그 자료... 나한테 보여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내일 도서관에서 만날래? 내가 복사본을 가져갈게."
"그래 내일 3교시 끝나고 갈게. 고마워."
전화를 끊은 수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정섭이 정말로 1921년 상해에 있다면, 그의 행동이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정섭이 과거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할머니, 이 사진 속의 정섭 선배... 정말로 할머니 말처럼 1921년에 할머니와 함께 있었던 거예요? 우리 선배 하나가 지금 전화해서 자기도 정섭 선배 사진을 찾았대!"
정정화는 그럴 수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네가 정섭 군을 데려왔을 때, 정섭 군을 여기서 보는 그 순간, 정섭 군이 과거의 그 정섭 동지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단다."
정정화가 말을 잠깐 끊고 말을 이었다.
"1921년 상해에서 우리와 함께 있었던 그 청년이 바로 그 청년이었어."
"그럼, 지금 정섭 선배는 과거의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게 확실한 거예요?"
"그렇단다. 그때... 우리가 스물두 살일 때, 정섭 군, 아니 정섭 동지가 우리 앞에 갑자기 나타났고, 우리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합류했지."
정정화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정섭 군은 우리와 함께 있다가 갑자기 사라졌고, 놀랍게도 수십 년이 지난 후 다시 내 앞에 나타났어. 바로 너와 함께 말이야."
수현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정섭이 지금 과거의 어느 시점에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할머니의 기억 속에 있는 스물두 살의 정섭. 그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한 현실이었다.
"내일 선배 한 명이 정섭 선배에 관한 역사 자료를 보여준대요. 할머니도 같이 가는 게 어때?"
"좋구나. 나도 옛 기억을 더듬어보고 싶구나."
수현은 가만히 다가가 정정화를 안았다. 정섭 선배는 과거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있을까? 할머니 기억 속의 정섭은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정말 그는 돌아올 수 있을까? 온다면 언제 돌아올까? 수현은 그 모든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은, 적어도 그가 아직은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다행이었다.
(제4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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