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급습, 이륭양행

by 정섭


제4화 급습, 이륭양행


## 1921년 상해, 다음 날 아침

다음 날은 동농의 비서로 사실상 첫 출근이었다. 정섭은 아침 일찍 심훈의 집을 나와 임시정부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진강 폭파 사건의 여파 때문인지 일본 경찰의 검문은 더욱 삼엄해졌다.

임시정부 건물에 도착하자 이미 여러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임시정부 청사는 공식적으로 처음이었다. 정섭은 동농 선생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아, 박정섭 군, 왔군."

동농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앉게."

정섭은 공손히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방 안에는 책장이 가득 차 있었고, 책상 위에는 각종 문서와 신문들이 쌓여 있었다.

"이것이 내가 매일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이네. 이젠 자네가 처리해야 하는 서류들이기도 하지."

동농이 책상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임시정부의 문서, 해외 각지에서 오는 연락, 국내 소식들...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중요한 내용을 뽑아내는 것이 우선 자네의 임무가 될 것이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동농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어제 의열단 사건으로 일본 경찰이 촉각을 세우고 있네. 임시정부도 감시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출입할 때나 이동할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네, 선생님."

"자, 비서로서 정섭 군의 첫 임무는 암호문 해독이네. 처음이라 쉽지 않을 걸세. 물리학을 공부할 생각이라니 소질도 알아볼 겸, 한번 시도해 보게."

동농은 서류 더미 하나를 정섭에게 건넸다.

"이것은 연통제와 관련된 보고서네. 지역명과 인명이 암호화되어 있어서 해독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연통제라면...?"

동농은 정섭의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며 연통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상해에 막 도착한 자네가 연통제에 대해 알 리가 없겠지. 연통제는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는 핵심 연락망이라고 할 수 있네. 내무총장인 도산이 2년 전 상해에 오자마자 임시연통제를 조직하면서 시작이 됐네. 국내 13도 대표를 중심으로 각 지방의 책임자가 있고, 그 아래 여러 층의 조직이 있어서 정보와 지시가 국내로 전달되도록 한 조직이야."

정섭은 연통제의 조직 체계, 활동 범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임시정부가 그저 임시로 적당하게 명맥만 유지한 조직이 아니라 실질적인 집행력을 가지는 조직이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정섭은 동농이 건넨 서류를 펼쳤다. 그것은 암호화된 메시지들로 가득했다. 정섭은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실 1980년대의 수학 수준에서 볼 때 초보적인 패턴이었다. 게다가 정섭의 수학과 물리학 실력은 교수들 사이에서도 꽤 인정받는 수준이었다.

"이 암호... 특정 패턴이 보입니다."

영어에 능통한 동농이 패턴이란 단어를 반복했다.

"패턴... 패턴이라면, 유형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그걸 벌써 찾았어?"

"약간의 수학적 지식이 있으면 풀 수 있는 정도의 암호문입니다. 이것은 치환 암호 같은데, 각 글자가 다른 글자로 대체되는 방식입니다."

동농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놀랍군. 그 짧은 시간에 그걸 벌써 파악했어."

몇 시간 후, 정섭은 첫 번째 메시지 해독을 마쳤다. 그의 현대 수학의 지식과 분석적 사고가 1920년대 암호를 해독하는 일에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선생님, 이 메시지는 중국 안동 지역에 대한 첩보입니다. 이륭양행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마 이륭양행이라는 곳이 위험에 처한 것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동농은 정섭이 해독한 내용을 들고 잠시 읽어보더니 중절모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면서 동농은 뒤돌아보며 말했다.

“수고했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나가네만, 이 암호문과 관련해 사람이 올 걸세. 잠깐 기다리게.”

차 한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동농은 김의한과 함께 돌아왔다.

"정섭 군, 자네가 해독한 암호문을 확인하기 위해 안동 지역 정보원과 연락을 한 결과, 일본 경찰이 이륭양행을 수색할 계획을 은밀히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네."

"이륭양행이요?“

정섭이 물었다. 정섭이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김의한이 이륭양행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륭양행은 무역회사 이름이오. 아일랜드계의 영국인 조지 쇼가 중국 안동에 설립한 무역회사인데, 임시정부가 발송하는 지령이나 무기 수송, 국내외 잠입 탈출 등에서 거점의 역할을 하는 곳이오. 연통제의 핵심 거점이라고 할 수 있소. 아버님과 나의 상해 망명도 이륭양행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오."

동농이 말했다.

"일본 경찰이 이륭양행을 수색한다면 증거가 될 중요한 문서들을 빼내고, 필요하면 사람들도 빼돌려야 해."

동농은 정섭을 바라보았다.

"정섭 군, 자네가 우리 의한과 동행해 안동으로 가서 조지 쇼 동지를 돕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주면 좋겠는데."

정섭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선생님."

동농은 김의한에게

“계림호가 언제 안동으로 출발하는지 확인하고, 정섭 군과 안동으로 최대한 빨리 출발할 방도를 알아보도록 해.”

하고 지시한 후 다시 말을 붙였다.

“만약 이륭양행을 출입하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안동의 일본 경찰 중에 최석순을 찾아. 우강 최석순은 일본 경찰의 형사로 있지만 내가 보냈다고 하면 반드시 도와줄 거야. 내 미리 연락해서 이틀 후 정오에 계림호 매표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해 놓으마. 서로 알아보는 암호는 '안개 낀 부두, 떠나가는 배'로 하고.”

계림호는 이륭양행이 운영하는 배였다. 영국회사가 운영하는 배였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감시나 수색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배였다. 정섭과 김의한은 마침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는 계림호를 탈 수 있었다.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배 안에서 정섭은 동농 선생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서자로 태어나 조선 최초로 과거에 급제한 후 중추원 의장, 탁지부 대신 등 요직을 거쳤다고 했다. 어학에 남다를 재주가 있어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해 고종의 특명으로 주일 공사로 간 이야기, 그곳 공사관에 늘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었던 이야기, 당시 일본의 실권자였던 이토 히로부미와도 외교관으로 교류하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 이야기 등이었다.

갑오개혁의 초안을 기초했고, 비원 개축에 참가해 비원에 있는 대부분의 글씨들이 동농이 쓴 것이며,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독립협회 활동에 참가했고, 독립문의 비문을 직접 썼다는 이야기, 나라가 망한 후 칩거하다가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4월에 국내 비밀 항일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을 설립해 총재가 된 이야기, 끝내 일제의 감시를 뚫고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해로 망명한 이야기까지, 참으로 숨 돌릴 틈 없는 역정의 연속이었다.

“아버님의 망명으로 일본제국은 크게 당황했소. 왕실의 대신들은 모두 합병에 찬성한다고 선전했기 때문이지요. 그것만으로도 아버님의 망명은 의미가 있소. 임시정부에서도 큰 어른으로 대접해서 고문으로 추대하셨고.”

격랑의 구한말에 고관대작 가운데 유일하게 상해로 망명한 분의 비서라니, 정섭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신의주와 국경을 마주한 중국 안동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안동에 도착해서야 그곳이 현대에는 ‘단동’으로 부르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마침내 이륭양행에 도착했다. 서양식 건물로, 주변의 중국 건물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김의한이 이륭양행으로 들어가자 안내인이 2층으로 안내했다. 사무실 안에는 40대 초반의 백인 남성이 그들을 반겼다. 조지 쇼였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김의한 선생, 반갑소. 아버님은 건강하신지요? 그런데 이 젊은이는...?"

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의한이 악수를 하는 조지 쇼의 손을 당겨 힘 있게 그를 끌어안았다. 무뚝뚝한 김의한에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1년 수개월 전 동농과 김의한의 망명길, 안동에서 상해로 가는 망명길은 조지 쇼가 없었으면 열리지 않았을 길이었다.

그때도 그들은 계림호를 타고 안동에서 출발, 상해에 발을 내디뎠었다고 했다. 그러니 김의한으로서도 감개무량한 만남이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 정정화 역시 이후 혈혈단신으로 상해에 올 때도 안동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니 어찌 고맙고 반가운 마음이 없겠는가. 정섭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번 여행을 통해 정섭은 김의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역사에도 밝은 사람이었다. 안동항이 눈앞에 보이는 뱃머리에서 그는 안동의 지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대단히 못마땅하다’는 말을 했다.

”안동이란 지명은 동쪽을 안정시켰다는 뜻이오. 다시 말해 중국이 그 지역을 정복하고 복속시켰다는 의미가 배어 있소. 아주 불쾌한 명칭이 아닐 수 없소."

정섭은 '그래서 이름을 안동에서 단동으로 바꾼 것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쇼와의 깊은 포옹을 푼 김의한이 정섭을 쇼에게 소개했다.

"박정섭이라고 합니다. 동농 선생님의 비서입니다."

"반갑소, 박정섭 동지. 나는 조지 쇼라고 하오. 조지라고 부르시오.”

하고 악수를 청했다. 김의한은 정섭이 암호문을 푼 이야기와, 그래서 함께 오게 되었다는 배경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서 쇼에게 말했다. 쇼는 그렇지 않아도 동농 선생으로부터 연락받은 얘기, 연락을 받고 급하게 중요 문서들을 따로 정리해 놓았다는 얘기 등을 쏟아냈다.

쇼가 자신의 책상 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옆으로 돌리자 그 뒤에 숨겨진 작은 금고가 나타났다. 쇼는 금고에서 두툼한 서류 뭉치와 한 개의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 서류들은 임시정부가 그동안 우리를 통해 전한 외교 문서와 자금 조달 기록이오. 절대 일본 측에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상자들에는...“

그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얼마 안 되지만 독립운동 자금이 들어있소."

정섭은 서류 뭉치를 받아 들었고, 김의한은 상자를 챙겼다.

이들이 짐을 모두 챙긴 것을 본 쇼가

'왜경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차 한잔할 시간이 없다' 면서 급히 말을 했다.

"이륭양행 뒷골목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소.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나오는 골목이오. 이 골목만 빠져나가면 안동항까지는 별 탈 없이 갈 수 있을 겁니다. 뒷골목에서는 내 비서가 안내할 겁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했다.

"그리고... 모두의 안위를 위해 이륭양행 2층은 당분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의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감사합니다, 쇼 선생님.“

김의한이 말했다.

그 순간 큰길 쪽에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부산한 소리가 들렸다. 쇼가 창문을 내다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다니까. 일본 경찰이오. 1개 분대 정도 되는 병력입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김의한이 외쳤다.

"정섭 동지 서둘러 갑시다. 쇼 선생 부디 조심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정섭과 김의한은 쇼의 조언대로 이륭양행 뒷골목으로 튀어갔다. 마차에 타고 있던 쇼의 영국인 비서가 손짓을 했고 이들은 마차에 잽싸게 올라타 몸을 바닥에 엎드렸다. 막 마차가 출발해 대로로 접어드는 순간, 8~9명의 일본 경찰이 이륭양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스테이 다운! 바오츠 징쯔!(가만히들 계세요!)"

마차를 몰던 비서가 영어와 중국어로 속삭이듯 말하고 마차의 고삐를 당겼다. 마차는 이륭양행 뒷골목을 빠져나와 그대로 대로를 향해 달렸다. 엎드린 채 정섭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자신들이 이륭양행에서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정말 간발의 차이였군요.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정섭 동지“

한숨을 푹 쉬며 의한이 정섭 쪽을 보고 말했다.

이륭양행에 도착한 이후부터 의한은 정섭을 동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눈치챈 정섭은 감격했다.

"그러게요. 정말 큰일 날 뻔했네요. 의한 동지도 수고 많았습니다."

그러고는 서로 마주 보면서 하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마차는 빠른 속도로 복잡한 안동의 거리를 누볐다. 쇼의 비서는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꾸며 혹시 모를 추적자들에 대비했다. 이제 남은 것은 안동을 빠져나가는 배를 타는 일이었다.

김의한이 말했다.

"계림호를 무사히 타려면 아무래도 우강 선생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면 일단 마차는 안전한 곳에 두고 정섭 동지가 우강 선생과 접선을 하는 것이 어떻겠소? 나는 어느 정도 알려진 사람이라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을 듯 하오만.”

우강 선생이라면 안동에서 일본 경찰의 형사 노릇을 하며 독립운동가를 돕는다던 최석순을 일컫는 것이다. 이미 시간은 정오가 가까웠다. 정섭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안동항이 보이는 골목길에 마차가 서자 날렵하게 내려 계림호 매표소를 향했다. 배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매표소는 혼잡스러웠다.

정섭이 매표소 앞에서 기웃거리며 우강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찾았다. 우강은 서른이 갓 넘은 사람이라는 것 외에 정섭에게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한참을 기웃거리는데 아까부터 정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 하나가 다가오더니,

“오늘 안개가 많아요. '안개 낀 부두'.”

한다. 최석순이었다!

정섭은 정신을 똑바로 다잡고,

”그러게요. 그래도 배는 떠나가네요. '떠나가는 배'.“

하고 답했다.

최석순이 다가와

”일행은 어디 있소?“

하고 속삭였다.

정섭은

"따라오시오.“

하고 말한 후 김의한이 있는 골목을 향했다. 김의한과 최석순의 짧은 만남 뒤에 최석순은 마차를 앞세워 선착장으로 갔다. 선착장 앞에서 사람들을 일일이 검수하던 일본 경찰 하나가 최석순을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최석순이 손을 들고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뭔가 속닥거렸다. 그 일경은 낄낄거리는 듯하더니 마차 쪽으로 손을 흔들어 오라는 표시를 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검표소를 무사히 지나 배에 타기 전에 최석순에게 김의한이 물었다.

”우강 선생님, 아까 뭐라고 한 겁니까?"

”아까 그놈, 지독한 아편쟁이야. 조선땅 함경도 양귀비로 만든 아편이 아주 좋거든. 쟤네들 환장하지.“

하면서 끌끌 혀를 찼다.

”미친놈.“

하면서도 김의한은 최석순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동농선생, 정정화 선생께도 내 안부 전해 주시오.“

최석순이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김의한은 다시 한번 그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했다. 붕 하고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계림호는 거침없이 달려 다음 날 저녁 무렵 상해항에 도착했다. 임시정부의 젊은이들 몇이 부두에 나와 있었다. 심훈도 손을 번쩍 들어 반가운 척을 했다. 무사 귀환이었다. 아니 작전 성공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동농은 정섭과 김의한을 반갑게 맞은 후 치하의 말을 했다. 결코 쉽지 않을 일을 해낸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쇼 선생은 잘 지내시던가?"

”네, 아버님. 쇼 선생은 예전과 변함없이 강건했습니다. 아버님과 내자에게 안부를 전했습니다."

”이번 일로 이륭양행이 무탈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야."

”쇼 선생이 이륭양행 2층 사무실은 당분간 폐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래... 현명한 판단이야. 이제 일본의 감시는 더욱 심해질 테니. 아무튼 정섭 군도 의한이도 수고했다."

동농은 이륭양행에서 가져온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펼쳤다. 서류 뭉치에는 임시정부가 각국 정부와 주고받은 외교 문서, 독립운동 자금 기록, 그리고 몇몇 암호화된 문서들이 있었다. 외교 문서는 특히 일본 경찰에 넘어가면 안 되는 문건이었다. 자칫 임시정부의 외교 전략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류를 보고 나니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천만다행이야."

동농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만약 이것들이 일본 손에 넘어갔다면 우리의 많은 활동이 위태로워졌을 게 분명합니다."

문서를 정리하면서 정섭은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과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 문서들을 보니, 임시정부가 미국, 영국, 중국 등 여러 나라와 외교적 접촉을 하고 있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맞네, 우리는 무장투쟁을 반드시 전개해야 하지만, 한편으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지 않는 무장투쟁만으로는 최종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네.”

동농은 말을 잠깐 쉰 뒤에

"의열단의 무장투쟁,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국내 연통제를 통한 정보 수집과 지시 전달, 이륭양행 같은 국내 연락망까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네."

저녁 무렵이 되자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모두 피곤할 테니, 돌아가 쉬도록 하게."

정섭은 심훈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의열단의 폭탄 테러와 이륭양행을 설립한 조지 쇼의 헌신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조지 쇼와 같은 다른 나라 사람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는 사실은 감사한 마음만으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정섭은 이 모든 일이 그저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자신이 뛰어들어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한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정섭은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꺼내 바라보았다. 시계는 여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속한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 1980년 서울, 다음 날

수현은 약속대로 정정화와 함께 김태훈을 만나러 대학 도서관으로 향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정정화를 위해 수현은 택시를 불렀다.

도서관에 도착하자 김태훈이 이미 자료를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현아, 안녕!“

김태훈이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정정화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도 오셨네요."

"할머니가 함께 자료를 보고 싶다고 하셨어.“

수현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태훈 학생.“

정정화가 온화한 미소로 인사했다. 김태훈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할머니. 제가 역사학과에서 독립운동사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경험하신 분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그래, 그런데 무슨 자료를 찾았다고 했지?“

정정화가 물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태훈이 서류철을 정정화 앞으로 돌렸다.

"이건 제가 국립도서관 특별자료실에서 발견한 1921년 상해 임시정부 관련 자료입니다. 여기 보세요..."

그것은 오래된 문서의 복사본이었다. 거기에는 '1921년 3월 의열단 진강 집하장 폭탄 투척 사건 관련 기록'이라는 제목이 있었고, 그 아래에 사건 개요와 관련자 명단이 적혀 있었다.

"여기 보세요. '박정섭, 의열단원 허영백을 일본 경찰로부터 구출. 이후 동농 김가진의 비서로 임명.'이라고 적혀 있어요."

수현은 그 문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문서 하단에 첨부된 흑백 사진에서 정섭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진 속 정섭은 장삼 같은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지만, 분명 그녀가 아는 정섭이었다.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사진 가운데 하나였다.

"놀랍지 않니?“

김태훈이 말했다.

"처음 이 사진을 봤을 때, 내 눈을 의심했어. 아니 정섭이하고 똑같은 거야. 게다가 그 사진 속의 사람 이름이 진짜 박정섭이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러웠던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수현은 정정화를 바라보았다. 정정화는 아무 표정이 없었지만, 눈빛만은 아련했다.

"태훈 학생. 이건 참 우연한 일이긴 하군. 이름도 박정섭이고 사진도 박정섭 군하고 닮았고. 하지만 이건 수현이 친구 정섭 군과는 다른 사람이야."

"정말이요, 할머니?“

하는 태훈의 목소리와

”할머니!“

하는 수현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아니 생각을 해 보렴. 수현이 남자친구 정섭이가 어떻게 거기에 있어? 그저 닮은 데다 우연히 이름이 같은 게지. 박정섭 동지는 내가 아주 잘 알아는, 다른 사람이야. 수현이 남자친구 그 정섭이 아니야.”

수현으로서는 의아한 말이었다. 정정화가 간직하고 있던 사진, 그리고 어제 정정화가 한 말, 모두 그 박정섭이 내가 아는 박정섭이 맞는데 왜 저러실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김태훈은 납득이 된다는 듯 ‘그렇죠.’ 하며 얼굴 표정을 누그려뜨렸다. 그러면서도 미심쩍은 마음을 떨치지 못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런 우연이 가능한 일인가요?"

정정화가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수현이 남자친구 정섭 군이 그 박정섭이라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갔다는 말인데,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냐?”

이렇게 말하고 정정화는

”힘들다. 수현아 이제 집으로 가자.“

하며 일어섰다. 김태훈은 못내 아쉬워 자료를 더 내밀었다.

”여기 더 많은 기록이 있어요. 박정섭이 이륭양행에서 중요 문서를 빼돌린 일, 암호 해독에 재능을 보인 일, 그리고..."

"그리고?“

수현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가 김원봉, 이범석 등 당시 주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그의 이름이 여러 중요한 사건과 연결되어 있어요."

정정화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수현에게 집으로 가자는 말을 되풀이했다. 수현은 김태훈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수현은 정정화에게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정정화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수현아, 그럴 수밖에 없었어. 혹시 사진 속의 정섭 군이 과거에 갈 때 입었던 옷을 입었다면 낭패가 아닌가 하고, 그걸 확인해 보고 싶었어. 만약 그런 사진이 자료실 같은 데 있으면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하겠어?”

수현은 그제야 정정화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역시 할머니야. 내가 머리가 나빴네.”

“그리고 태훈이라는 선배한테 내가, ‘그래 이게 그 정섭 군이다’ 하고 말해 버리면 태훈 군은 또 얼마나 우스운 꼴을 당할지 모르잖아.”

“와 우리 할머니”

수현은 달리는 택시 안에서 정정화를 와락 끌어안았다.

"할머니, 정섭 선배는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

수현이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듯 물었다.

"걱정 마라. 정섭 군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정섭 군은 우리와 함께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고,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때의 젊은 모습으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났어.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역사란다."

수현은 태훈에게서 받은 자료 속 정섭의 사진을 다시 한번 바라본 후 말했다.

"할머니, 이런 역사 자료가 있다는 건... 정섭 선배가 실제로 역사에 기록을 남겼다는 뜻이잖아요."

"그렇단다. 단순히 관찰자가 아니라 역사의 일부가 된 거지."

수현은 김태훈이 가져다준 다른 자료들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 의열단의 투쟁, 그리고 동농 김가진에 대한 더 많은 기록이 있었다. 수현은 그동안 궁금했던 점 하나를 물어봤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김의한 할아버지는 정섭 선배와 어떤 관계였나요? 나이도 비슷한 것 같던데."

"처음에는 서로 경계했지. 특히 성엄은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람을 신뢰하지 못했어. 하지만 점차 정섭 동지의 진심과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결국 둘은 가까운 동지가 되었단다."

정정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네 할아버지가 있었으면 수현이 네가 데려온 정섭 군을 보고 정말 좋아했을 텐데..."

수현은 정정화의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 김의한은 해방된 조국에서 6.25 전쟁통에 납북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그것은 정정화에게 평생의 상처였다.

"혹시 우리가 정섭 선배 데려오는 일을 도와줄 수도 있을까?“

수현이 물었다.

"우린 그저 기다리면 돼.“

정정화가 대답했다.

"정섭 군은 자기 길을 찾을 거고, 그가 할 일을 마치면 돌아올 거야. 우리는 그저 그를 믿고 기다리면 돼."

그건 정정화의 말이 맞았다. 과거의 일에 우리가 개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6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상황. 믿기지 않지만 감당하리라 생각하는 수현이었다.


(제5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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