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경성 잠입
## 1921년 상해, 4월 초
정섭은 심훈의 집 창문을 통해 상해의 아침을 바라보았다. 1921년의 상해로 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낯선 시대의 모든 것이 여전히 생소하고 한편으로 신기하기도 했지만, 심훈의 도움으로 상해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배우고, 김의한과 정정화를 포함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강한 유대도 형성되고 있었다.
4월 상해의 날씨는 서울보다는 더운 느낌이었다. 신록의 계절, 봄. 그러나 그런 것을 느낄 겨를 없이 지난 한 달이었다. 정섭은 정정화가 만들어준 중국식 장삼을 입고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심훈이 방에 들어오며 말했다. 그는 찻잔 두 개가 놓인 쟁반을 들고 있었다.
"네, 오늘 아침 날씨가 너무 좋아서."
"오늘 정정화 선생을 만나기로 했지? 듣기로는 정정화 선생이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던데."
정섭은 심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침에 만나기로 했는데. 그런데 무슨 임무인지...?”
"자세한 내용은 나도 모르네. 그저 동지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있을 뿐이야."
심훈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나도 함께 가지. 나도 정정화 선생과 김의한 선생 못 본 지 꽤 됐어."
프랑스 조계지의 신보 싸롱에서 정섭과 심훈은 정정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싸롱 안은 상해의 지식인들과 문화인들로 북적였다. 신보는 유럽풍의 인테리어에 중국식 장식이 더해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정정화가 도착했을 때,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진지해 보였다. 정정화는 두 사람 맞은편에 앉으며 주변을 경계하듯 살피고는 김의한과 함께 오지 않은 이유부터 먼저 설명했다.
“성엄은 임시정부에 들러서 오기로 했습니다. 잠시 후에 올 거예요.”
심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근데 무슨 일 있나요?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요."
정정화는 잠시 망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어요. 제가 국내로 들어가 자금을 모금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정섭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언젠가 수현의 할머니에게서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정화의 바로 그 국내 잠입 활동이 지금 결정된 것이었다.
"국내로요?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심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정화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에요. 각별히 주의하겠지만 위험은 감수해야 해요. 지난번 이륭양행에서 가져온 자금도 동이 난데다, 어른들께서 끼니를 거르는 경우도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혼자 가는 건 너무 위험해요. 동행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버님께서도 그 점을 걱정하셨어요. 그래서...“
정정화가 정섭을 바라보았다.
"박정섭 씨가 함께 가주셨으면 어떤가, 의견을 듣고 싶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정섭은 놀라 차를 마시다 기침했다.
"제가요?"
"네. 아버님이 직접 박정섭 씨를 추천하셨어요. 지난번 이륭양행에 동행한 경험도 있는 데다 아직 일본 밀정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새 얼굴이라 다른 동지들보다는 들고 나는 것이 나을 거라고 하셨죠."
정섭은 잠시 고민했다. 연통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국내 잠입은 여전히 위험한 임무였다. 하지만 ‘동농 선생이 추천하신 일이라면...’ 잠깐의 생각 끝에 정섭이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정섭이 진심으로 걱정되는 심훈이 놀란 눈으로 정섭을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나?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면 죽음보다 더한 고초를 당할 수도 있다네."
정섭은 미소 띠며 대답했다.
"동농 선생님께서 아마도 제가 이 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고 저를 추천하셨을 겁니다. 동농 선생님이 하라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때 싸롱의 문이 열리며 김의한이 들어왔다. 정정화가 손을 들었고, 그는 세 사람을 발견하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긴급한 소식이 있소.“
김의한의 표정은 긴박해 보였다.
"모두 임시정부로 갑시다."
임시정부 건물 안. 동농의 사무실에는 예닐곱 정도 되는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었다. 아마도 동농이 지정한 사람들로 보였다. 정섭은 김의한 옆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섰다.
정섭보다 한두 살 정도 많을 것 같은 젊은이를 보며 동농이 말했다.
“나창헌 동지, 의열단의 요청을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말씀해 주시오.”
나창헌이라고 불린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의열단의 김원봉 단장이 우리 임시정부에 보낸 요청을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손에 든 종이에 잠깐 눈길을 준 다음 모두를 보고 이어 말했다.
"진강 집하장 폭파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 임시정부의 협조에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의열단은 국내에서의 의거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다음 목표물은 경성에 있는 조선총독부입니다. 누구를 보낼 것인지는 별도의 경로로 통보하겠습니다만 문제는 폭약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나창헌이 숨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구국모험단의 폭약이 가장 믿을 만하다고 평가됩니다. 구국모험단 측에서 폭약 두 개를 구해 주시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국내로 들어가는 일은 임시정부가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일이므로 의열단 독자적으로 개척하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김의한에게 정섭이 속삭이듯 말했다.
"의한 동지, 죄송하지만 구국모험단이 뭡니까?"
김의한이 빠르게 말했다.
"폭약 제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임시정부의 일종의 별동대입니다. 지난 진강 집하장에 투척한 폭탄도 구국모험단이 만든 것입니다."
동농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나창헌 동지 수고했습니다. 동지들께서 지금 들었다시피 의열단의 요청은 폭약을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원봉 단장의 제안에 대한 임시정부의 공식 입장은 두 가지입니다."
동농이 잠깐 쉰 채 모두를 한번 둘러본 다음 이어 말했다.
"첫째, 우리는 의열단의 거사에 적극 협조할 것입니다. 둘째, 우리 측 청년 적어도 한 명 이상이 의열단의 의거에 함께 할 것입니다.”
동농의 말이 끝나자 모두들 웅성거리는 가운데 손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김의한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김의한 쪽으로 향했다. 동농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김의한을 바라보았다. 김의한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동농 선생님. 제가 가겠습니다."
동농이 김의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처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김의한이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동농 선생님... 아버님, 제가 가겠습니다. 1년 6개월 아버님을 따라 천리 먼 길 망명길에 선뜻 올랐을 때, 그때는 아버님의 뜻을 섬기는 것이 저의 목표였습니다."
정정화가 김의한 쪽을 향해 눈에 불이 날 듯 바라봤다. 김의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제 제가 세운 뜻에 따라 저의 길을 갈 차례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말을 하는 김의한의 목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죽을 수도 있는 자리에 아들을 보내는 것이니 동농으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동농이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들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정화의 국내 잠입은 잠시 미뤄야겠군.“
승낙이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그때였다.
"안 됩니다. 선생님."
모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정정화였다. 정정화가 앞으로 나섰다.
"안 됩니다. 아버님. 두 임무는 모두 중요합니다. 저 역시 계획한 대로 국내로 들어가겠습니다."
동농의 표정에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동농은 옆에 있는 40쯤 되어 보이는 장년에게 매달리는 심정으로 의견을 구했다.
“우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우천이라 불린 사람이 김의한과 정정화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사랑스러운 눈길이었다. 그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잠시 후 우천이 호방하게 말했다.
”조자룡의 일신이 도시 담이요, 의한과 정화의 일신이 도시 담이로다. 동농 선생님, 우리가 말릴 재간이 없을 듯합니다. 부부의 뜻이 저렇게 강경하니 선생님의 자식 농사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뿐입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인 듯 좌중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윽고 동농이 결심한 듯 말했다. 마치 군사작전의 작전 지휘를 하는 지휘관의 모습이었고 말투였다.
“그렇다면 양동 작전을 편다. 두 개 조로 나눠서, 한 조는 의열단을 도와 거사에 참여하고 다른 한 조는 독립자금 모금에 나선다. 우선, 의열단을 도와 거사에 참여할 사람은...”
그 순간 구석에 있던 정섭이 손을 들며 외쳤다.
“선생님, 김의한 동지와는 제가 가겠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정섭 쪽을 향했다. 심훈이 가장 놀란 듯했다.
동농도 당황한 듯 말했다.
"이 젊은이들이 도대체 무서운 것이 없이 무모하기만 하군."
정섭이 앞으로 나왔다.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가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첫 번째는, 제가 이미 이륭양행에 김의한 동지와 동행해 작전을 수행한 바가 있기 때문에 적어도 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게다가 저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장점이 있다는 말씀은 선생님께서도 저에게 하신 바 있습니다.”
우천이 '담 덩어리가 저기도 있었군.' 하고 허허 웃었다.
김의한과 정정화조차도 '저런 애송이' 하는 표정이었으나 내심 흐뭇한 마음이 더 컸다. 결국 그날 회합에서는 정섭과 김의한이 의열단의 거사에, 정정화와 지강대학 졸업생 엄항섭이 독립자금 모금에 동행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회합이 끝난 후, 작전에 참가할 정섭, 정정화, 그리고 엄항섭은 이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우천의 방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지도를 펼쳐놓고 국내 잠입 경로를 살펴보고 있었다. 김의한은 동행할 의열단원의 최종 확인을 위해 동농의 방에 그대로 머물렀다.
"안동에서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까지는 함께 움직여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정정화가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다음 경성으로 이동하는 것은 두 개 조가 따로 움직이면 어떨까 합니다."
안동에 가본 적 있는 정섭이 아는 체를 하며 말을 덧붙였다.
"기본 통로는 연통제를 활용하되, 이륭양행이 일본 경찰의 주시 대상이 된 만큼 이번에는 이륭양행보다는 우강 선생의 도움을 주로 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배가 아닌 철교를 통해 신의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체 회합을 할 때 자리에 없었던 예관 신규식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우천의 방으로 들어왔다. 예관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정정화를 각별히 아꼈다. 정정화도 임시정부에서 가장 기댄 어른이라고 했다. 그는 정정화를 부인이라고 부르며 어른 대접을 했다.
”부인, 지금 국내는 사지나 다름없습니다. 동농 선생의 망명 건으로 시댁은 왜놈들의 눈총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조심해서 처신하겠지만 만에 하나 왜놈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이면 다시는 못 나올 것은 고사하고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입니다."
정정화를 걱정해 이 말을 하는 신규식이나 묵묵히 그 말을 듣는 정정화 모두, 서로 바라보는 눈빛은 그윽하기 그지없었다. 정섭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정정화가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예관 선생님."
신규식은 우천에게
”우천, 좀 말리지 않고서...“
하다가 말을 멈췄다. 말리려고 해 봐야 말려질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신규식은 정정화를 따로 불러 국내에서 머물 곳과 만날 사람에 대한 세세한 사항을 설명하고, 별도로 그것을 기록한 밀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부인, 이건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독립자금 모금 활동이오. 사적인 행차가 아니란 말이오. 그걸 명심하시오. 문제가 생기면 임시정부 전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서 일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오. 그걸 잊지 말아야 하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문이 열리고 김의한이 들어왔다. 손에는 상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동행할 의열단 단원이 정해졌소. 김익상 동지요. 오늘 밤 출항하는 계림호를 함께 타기로 했소.”
말을 마친 김의한이 상자를 탁자에 놓았다.
“구국모험단 김성근 단장이 전해온 폭탄입니다.”
늦은 저녁 상해항. 정섭, 김의한, 김익상, 엄항섭, 그리고 정정화, 다섯 명의 젊은이는 안동으로 출발하는 계림호에 올랐다. 겨울의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따스한 봄기운이 항구에 불어오는 바람결에 느껴졌다. 정섭, 김의한, 정정화는 갑판 위에서 멀어져 가는 상해항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섭이 말문을 열었다.
"정정화 선생, 우천 선생은 어떤 분인가요? 아까 하신 말씀도 무슨 말씀인지 해석이 안 되던데.”
정정화는 빙그레 웃었다.
“우천 조완구 선생은 도산 선생과 함께 대한협회 활동을 하신 분이에요. 대한협회 당시에는 아버님의 비서로 일하셨고요. 상해에 온 이후로 예관 선생 못지않게 저를 걱정하고 챙겨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임시정부에서 가장 곧고 용기 있는 분이라면 우천 선생을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강직하신 분이에요.”
“그럼, 우천 선생이 아까 하신 말씀은요?”
“조자룡의 일신이 도시 담이요, 의한과 정화의 일신이 도시 담이라고 하셨죠? ‘도시’는 모두라는 뜻이고, ‘담’은 겁이 없다는 뜻이니, 조자룡의 온몸이 담덩어리라고들 하는데, 의한과 정화의 온몸이야말로 담덩어리라는 말씀을 하신 거예요. 다 우리를 치켜세우는 말씀이지요.”
”그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두 분 선생은 '일신이 도시 담‘, 맞아요.“
하고 정섭이 웃었다. 정정화가 쓸데없는 소리라는 듯, 김의한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아까 예관 선생께서 우리가 경성에 들어가면 지낼 거처와 만날 사람이 적힌 밀서를 제게 주셨습니다. 품에 잘 간직해 두었습니다.”
김의한이 정정화의 어깨를 다정하게 툭툭 쳤다.
"수당, 작전은 반드시 성공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이제 다들 그만 들어갑시다."
정섭은
”먼저들 들어가십시오. 저는 상해항 밤바다를 좀 더 감상하겠습니다."
꼬박 하루가 지나 안동 항에 도착한 다섯 사람은 안동경찰서에서 형사로 일하는 우강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우강과 상의한 끝에 정정화는 그의 누이동생으로, 김의한과 남자들은 그의 친척으로 가장했다. 일본 형사의 누이동생 일가가 된 그들은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무사히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의주 시내에서 그들은 세창양복점을 찾아갔다. 세창양복점의 주인이면서 재단사인 이세창은 연통제의 일원이었다. 동농과 김의한, 그리고 정정화의 상해 망명길에 도움을 준 것도 이세창이었다.
김의한과 정정화를 확인한 이세창은 반가운 기색을 한 후, 일행 다섯 명을 안으로 인도하고 양복점의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이세창은 정정화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아주머니래 지난번에 봤을 때와 딴 사람이 됐소. 왜 이리 말랐소? 긴데 또 무슨 일이오? 상해에서 천리 길인 여기 신의주까지는..."
정정화는 그저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경성으로 들어간다고만 말했다. 이세창은 내일 새벽 경의선 기차를 타면 모레 새벽에는 경성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세창의 아내가 준비한 음식으로 간단한 요기를 한 후 정정화가 호롱불에 불을 붙였다. 품에서 신규식이 건넸다던 화선지 한 장을 꺼내 잘 편 후 호롱불에 가까이 하자 글씨가 나타났다. 정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것도 없던 화선지에 글자가 나타나다니. 정정화가 정섭이 놀란 양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백반 물로 글씨를 쓰면 이렇게 된답니다."
‘세브란스병원 관사, 신필호 박사’
화선지에 나타난 글자를 보며 정정화가 말했다.
"예관 선생님께서 써 준 첫 번째 암호문이에요. 신필호 박사께서 거처를 마련해 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김의한이 정정화의 말을 이었다.
”신필호 박사라면 예관 선생님 형님의 장남이라 이야기 들은 적 있소. 산부인과 의사인데, 남자가 산부인과를 배운 것 때문에 한 때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소."
정정화가 말을 받았다.
“부인되는 분이 이화학당에서 피아노를 배웠고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인텔리 여성이라고 들었어요. 그 아버지가 백정이라 혼인하기까지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어요."
정섭은 처음 보는 광경과 처음 듣는 이야기에 넋이 빠진 듯했다. 정신을 차린 정섭이 말했다.
“이제 내일 어떤 방식으로 경성으로 갈지 상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리 복잡한 일은 아니었다.
"숫자가 많아 같이 움직이면 눈에 띌 수 있어요. 따로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정정화가 말했다.
김의한이
"정섭 동지와 나, 그리고 김익상 동지가 같은 칸에 타고, 정화 동지와 엄항섭 동지는 다른 칸에 함께 타는 것으로 합시다.“
하고 답했다. 엄항섭도 김익상도 김의한의 제안에 동의했다.
김익상과 엄항섭이 잠을 청하러 들어간 사이 정정화는 이세창에게 조선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고 이세창은 흔쾌히 동의했다. 정섭과 김의한도 함께였다.
세창양복점에서 그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정섭이 가장 놀란 것은 이세창이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그는 무척 소박하고 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별로 배운 것도 없고,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세도가의 압제를 받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은덕이라곤 한 줌도 베풀지 않았던 조국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숨통마저 끊긴 그 조국을 되찾는 일에 일신의 안위를 뒤로한 채 위험을 무릅쓰고 있었다. 정섭은 그 밤, 이 나라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되뇌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이세창은 경성행 차표를 손수 끊어주었다. 열차에 오르기 직전 이세창은 거친 평안도 사투리로 정정화에게 이렇게 말했다.
”몸조심하라요. 자기만 생각할 거이 아니라 남도 생각을 해야 되는 일이야요. 기래야 또 들어올 수 있으니까니. 명심하라요. 내레 솔직하게 한마디 하갔는데, 젊은 아주머니레, 더구나 귀골로 곱게 산 사람이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시다. 독립운동하는 유명한 사람들이레 하나같이 다 이런 험악한 일을 하는 건 아니디요? 기렇디요? 나 같은 놈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거든.”
신의주역에서 정섭과 김의한은 유학생 형제로 가장해 동석을 했고 김익상은 같은 칸 다른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정정화와 엄항섭은 오누이로 가장해 다른 칸에 함께 앉았다. 경성행 기차가 꽥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 1980년 서울
'어용교수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가의 시위가 날로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정정화의 집에서 자료를 뒤적이던 수현은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불안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4월 초, 서울 곳곳에서는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다. 정섭이 사라진 지 이미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국 불안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이제는 으레 정정화의 집으로 전화해서 수현을 찾는 태훈이었다.
"수현아! 나야, 김태훈."
전화기 너머로 태훈의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나와. 중요한 정보, 또 찾았어. 너희 할머니 댁 대로에 있는 혜화 다방에서 만나자."
전화가 끊겼다. 수현은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거리는 평소보다 한산했지만, 곳곳에 전경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녀는 괜히 움츠러들어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썼다. 혜화 다방에 도착하자 김태훈이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두꺼운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내가 국립도서관 기록보관소에서 추가로 자료를 찾던 중에 우연히 발견했어."
김태훈이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1920년대 임시정부 관련 비밀문서들 중에서 박정섭에 대한 기록을 또 찾았어"
수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게 어떤 내용인데?"
김태훈은 봉투에서 복사본 몇 장을 꺼냈다.
"이건 일제 경찰의 비밀 감시 기록인데, 신원미상의 '박정섭'이라는 인물이 김의한, 김익상, 그리고 정정화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해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모금했다는 내용이야. 가장 놀라운 건..."
그가 한 장의 종이를 수현에게 건넸다. 그것은 일본 경찰이 작성한 용의자 몽타주의 복사본이었다. 거기에는 분명 정섭의 얼굴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건... 정말 정섭 선배야!"
그때 다방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민간인 차림이었지만, 수현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님을 느꼈다.
김태훈이 그들을 보자 서류를 봉투에 넣으며 속삭였다.
"저 사람들 학교에서도 봤는데, 아무래도 나를 쫓아온 것 같아. 수현아 나가자. 이상해."
두 사람은 계산을 하고 다방을 빠져나왔다. 좁은 골목을 돌아 정정화의 집 방향을 향했다. 그들이 막 골목을 돌아 나왔을 때, 검은 지프차 한 대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김수현 씨와 김태훈 씨죠? 차에 타십시오."
김태훈이 수현을 자신의 등뒤로 밀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들 누구요? 영장 있습니까?"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신분증을 꺼냈다.
"국가안전기획부입니다. 두 분을 보호하러 왔습니다."
수현은 김태훈의 팔을 잡고 겁에 질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해?"
신분증을 본 김태훈이 포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아. 일단 따라가자."
차는 도심을 빠져나와 한적한 교외 지역으로 향했다. 표지판으로 보면 송파 쪽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이거 납치 아니에요?“
수현이 큰 소리로 다그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차는 인적이 없는 단층 건물 앞에 멈췄다. 그들은 건물 안으로 안내되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놀랍게도 그곳에는 정정화가 앉아 있었다. 수현은 정정화에게 뛰어갔다.
"할머니!“
다행히 정정화는 별 탈이 없는 것 같았다.
"수현아.“
정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긴장되어 있었다. 방 안에는 중년의 남성, 그리고 그 옆에 젊은 청년 한 명이 서 있었다. 중년의 남성은 책상 뒤에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앉으세요.“
그가 말했다.
"저는 안기부 특별조사팀 팀장 박진호입니다."
수현과 김태훈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박진호가 서류 한 장을 내밀며 거두절미하고 정섭 이야기를 꺼냈다.
"두 분이 찾고 있는 '박정섭'이라는 인물은 일급 보안 등급으로 올라가 있는 케이스입니다."
수현이 놀라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정정화는 잠시 눈을 감더니 입을 열었다.
"박진호 선생, 이 아이들에게 설명해도 될 것 같아요."
박진호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김수현 씨, 김태훈 씨. 두 분이 추적하고 있는 박정섭이라는 인물은... 실종된 김수현 씨의 남자친구이자, 동시에 60년 전 독립운동가였던 것으로, 즉 두 사람이 동일인인 것으로 보입니다."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김태훈이 중얼거렸다.
"정확한 사실을 아직은 특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추적한 내용은..."
박진호가 말을 멈추고 옆에 서 있는 젊은이를 보며 말했다.
"이종학 박사께서 설명해 주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의자에서 일어난 박진호가 그 젊은이의 어깨를 뒤에서 툭 치며
"이분이 이종학 박사십니다. 박사님이 설명을 해 주시죠.“
하고 자리를 비켰다. 이종학 박사라고 소개된 젊은이가 자신을 소개했다.
"이종학입니다. 천문연구원 이상현상팀을 맡고 있습니다. 천문연구원은 5, 6년 전부터 지구 자기장 변화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종학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최근 에이엠제이... 에이엠제이라는 건 쉽게 말하면 지구 자기장의 방향이 짧은 시기동안 매우 급격하게 변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처럼 자기장 방향이 급격하게 변하면 여러 이상 현상을 동반하는데, 소수의 학자들이 시간 왜곡 현상을 동반한다는 가설을 꾸준히 제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동아시아 지역에 이 에이엠제이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종학 박사의 얼굴에 집중됐다. 느닷없는 이상한 용어와 말에 모두 어리둥절한 가운데 말을 잠시 멈춘 이종학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 최근 박정섭 군이 사복경찰과의 대치 중 사라졌다는 보고가 타전되었습니다. 천문연구원에서는, 이것이 에이엠제이 현상이 유발한 시간 왜곡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상현상팀을 꾸렸고, 제가 팀장으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박진호가 말을 받아 이었다.
"국가안전기획부도 특별수사팀을 구성해서 천문연구원과 공조해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몇몇 역사학자들이 1921년 박정섭 군을 찾았다는 보고를 받게 됐습니다. 우리는 당시 사진 속의 박정섭 씨와 함께 있던,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정정화 여사님을 찾아 사실 확인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여사님의 협조로 최종적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요. 그 사진을 김태훈 군도 찾은 것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세 사람을 둘러보던 박진호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저희가 세 분을 비밀리에 한 자리에 모신 이유는, 최근 남북 관계 긴장과 국내 정세 불안정 속에서 이 사안이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남북관계, 국내 정세, 국가 안보와 같은 단어가 튀어나오자 세 사람은 긴장한 표정이 되어 박진호를 바라보었다.
"우리가 국가 안보와 관련해서 이 문제를 보는 것은, 박정섭 군에 관한 정보를 일본과 북한 측 정보원들도 쫓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납북된 김의한 선생의 과거 행보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수현은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까지 관련이 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박진호가 책상 앞에 놓인 컵의 물을 입에 축이고 말했다.
"정정화 여사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김의한 선생은 특별한 문서들을 보관하고 계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진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해방 후 김의한 선생께서 일제강점기 시절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와 증거들을 수집하셨던 것은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위안부와 관련된 증언 내지 자료와 고위급 인사의 친일 행적이 기록된 자료들도 포함된 것을 여사님께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수현의 눈이 커졌다.
"할아버지가 그런 문서를 가지고 계셨다고요?"
"네. 그런데 문제는... 그 문서들이 김의한 선생의 납북과 함께 사라졌다는 겁니다. 정정화 여사님의 말씀으로는, 그 문서들이 집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김의한 선생이 납북된 후 함께 사라졌다고 하시더군요."
정정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현을 향해 말했다.
"할아버지는 그 문서들이 역사적 진실을 증명할 중요한 증거라고 늘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가 분명히 기억한단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그들을 강제로 동원한 일본군 관계자들의 명단, 그리고 일제에 적극 협력한 친일파들의 상세한 행적이 담겨 있는 자료였어. 그걸 보면서 함께 분노한 기억도 뚜렷해."
박진호가 말을 이어받았다.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지난 삼십 년간 북한 측도 그 문서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김의한 선생이 어딘가 숨겨둔 것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일본으로서도 그 문서가 공개되는 것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막고 싶을 것이고요."
"그래서 세 나라 정보기관이 모두 움직이고 있는 거군요.“
수현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박진호는 세 사람을 다시 둘러본 다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 나라 정보기관이 움직이는 어쩌면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박진호에게 모였다.
"그것은 시간 이동이라는 놀라운 현상에 숨겨진 비밀을 밝히는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지구 자기장의 변화가 원인인 것으로 보이는데, 박정섭 씨만 시간 이동을 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밝힐 수 있다면 역사를 뒤바꾸는 엄청난 사건이 될 것입니다."
(제6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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