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그의 진심

by 정섭

제6화 그의 진심


## 1921년 경성, 4월 10일

새벽녘, 경의선 기차가 천천히 남대문정거장 역사로 진입하고 있었다. 정섭은 기차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경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1921년의 경성은 그가 알던 서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서울역도 경성역도 아닌 남대문정거장이라는 간판이 붙은 것부터 달랐다. 창문 너머 저 멀리 남산 자락에 보이는 조선총독부 건물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도시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김의한이 정섭의 어깨를 툭 쳤다.

"이제부터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시겠지만 경성은 상해나 신의주와는 다릅니다. 왜경의 감시가 훨씬 엄중하니까요."

정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약속대로 따로 행동하기로 했다. 정정화와 엄항섭은 이미 다른 객차에서 내려 먼저 역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정섭과 김의한, 김익상 세 사람은 기차에서 내려 개찰구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김익상은 두 살배기 정도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일본인 여성과 내내 동석이었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김익상은 간혹 그 여성과 대화하며 웃는 모습이었고 아이를 무릎에 안고 재우기도 했다.

그 모습을 건너 자리에서 본 정섭이 김의한에게

“김익상 선생은 참 싹싹한 분이군요.”

하고 말했을 때 김의한은 그저 씩 웃기만 했다.

남대문정거장을 빠져나오는 개찰구 앞에는 역무원과 함께 일본 경찰도 있었다. 개찰구에는 제각기 표를 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여행객을 살피던 일본 경찰이 젊은이들 가운데 조선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임의로 불러서 신분증을 요구하거나 가방 뒤짐을 하기도 했다.

정섭은 눈으로 얼른 김익상을 찾았다. 폭탄이 든 가방을 김익상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리번거리는 정섭의 눈에 김익상이 들어왔다. 그는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아이를 안고 있었고, 폭탄이 든 가방은 기차 안에서 봤던 일본 여성이 들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그 여성에게 다정하게 인사했고, 김익상은 여유 있게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정섭이 김의한을 보고 어이없는 웃음을 보냈다. 김의한도 ‘그것 보라’는 눈짓을 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지만, 정거장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출근하는 일본인 노동자들, 행상을 하는 조선인, 그리고 곳곳에서 감시하는 일본 경찰들.

시계탑 앞에서 기다리던 김익상과 합류한 김의한이 일행들에게 빠르게 말했다. 김익상은 함께 나온 일본 여성과 헤어지고 담대한 얼굴로 시계탑 앞에 서 있었다.

"지금부터 김익상 동지는 우리와 따로 갑니다. 경성의 댁으로 가 계셨다가 내일 정오에 세브란스 관사로 오시오. 관사는 남대문정거장 바로 건너편에 있으니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현재로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 그곳이오. 정섭 동지와 나는 지금 바로 세브란스 병원 관사로 갑시다."

검은 정장에 중절모를 쓴 김익상이 먼저 폭탄을 숨긴 트렁크를 들고 출발했다. 정섭과 김의한은 숭례문 방향으로 걸었다. 정섭은 현대의 서울과 너무나 다른 1921년 경성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한복을 입은 조선인들과 양복을 입은 일본인들이 뒤섞여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런 정섭에게 김의한이 한마디를 했다.

"경성은 처음이시오? 뭘 그리 두리번거리시오?"

“오랜만이라...”

미행을 의심해 숭례문에서 방향을 틀어 남대문정거장 방향으로 잠시 걸은 끝에 두 사람은 세브란스병원 관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문을 두드리자 일하는 아이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누구신지?’ 하고 묻는다.

김의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관 선생님의 문안을 전하러 왔다고 전해주렴.”

잠시 후 여자아이가 열어주는 대문에 들어서자 40대 여성이 마당에서 일행을 맞았다.

"들어오세요. 박사님은 곧 돌아오실 겁니다."

둘은 집 안으로 들어가 오른편에 있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다다미로 만든 바닥 한가운데 탁자가 놓여 있었다. 정섭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서양식 가구와 조선식 장식품이 조화롭게 배치된 공간이었다.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선 채로 여자가 말했다.

"저는 신 박사님의 아내 박양무라고 합니다."

김의한은, 박양무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인텔리 여성이 다르긴 다르구나’ 생각했다.

"남편은 병원에 긴급한 환자를 보러 밤늦게 나갔습니다만 곧 돌아올 겁니다. 정정화 선생과 엄항섭 선생은 이미 도착했습니다."

바깥의 기척에 정정화와 엄항섭이 응접실로 나왔다. 마침, 대문 간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박양무가 얼른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잠시 후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서양식 양복을 입은 남자가 함께 들어왔다.

남자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모두 무사히들 오셨군요. 신필호입니다."

김의한부터 차례로 신필호와 인사를 나눴다. 신필호는 일일이 손을 잡아 인사를 했다. 정섭도 신필호와 인사했다.

”박정섭입니다."

다들 신필호와는 초면이었다. 신필호는 예관 선생의 안부부터 물었다. 김의한이 예관 선생의 안부는 물론, 임시정부의 어른들이 모두 강건하다는 말을 전했다. 신필호는 김의한이 말하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의한의 안부를 전하는 말이 끝나자, 신필호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오시는 길이 멀어 힘드셨을 텐데, 모두 무사히 도착해 정말 다행입니다."

모두 다다미 바닥에 앉은 후 정정화가 자신들이 경성에 온 이유와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예관 선생이 신필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잘 아는 김의한은 김익상이 총독부에 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하고 있는 것까지도 솔직하게 말했다.

신필호는 가끔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면서 굳은 얼굴로 정정화와 김의한의 말을 들었다. 김의한의 말이 끝나자 신필호는 김의한의 손을 잡았다.

”나는 여러분의 거사가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세브란스 병원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이라 일본 경찰의 출입이 다른 곳보다 덜한 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국내 인사들과 연락하거나 거사 준비를 하시면 됩니다."

관사는 모두 방이 다섯 개였다. 일본식 건물에 방 두 개는 온돌이 깔린 신축집이었다. 박양무는 정정화에게 온돌방 하나를 내주었다. 다른 세 명의 남자는 다다미 방 하나를 차지했다. 정정화가 제 방에 짐을 놓고 남자들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슴에 품고 있던 밀서를 꺼냈다. 구석의 호롱에 불을 붙인 후 맨 위 밀서에 불을 가까이 댔다.

‘우당 민영달, 동농 막역지우, 김홍집 내각’

김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관 선생께서는 아버님과 생각이 같군요."

경성에 오기 직전 상해에서 김의한이 동농의 방에서 의열단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동농은 그에게 우당이 반드시 도와줄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동농은 김의한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당은 갑오경장 이후 김홍집 내각 시기부터 지금까지 근 삼십 년간 막역한 사이로 지낸 사람이다. 내가 아는 한 민족의식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고 돈도 다소나마 있는 형편이어서, 임시정부의 자금 모금에는 반드시 적극 협조할 것이다."

김의한은 동농의 이 말을 전하면서 혹 정정화가 우당을 만나러 가게 된다면 전하라는 말을 뒤에 붙여서 전했다.

”아버님께서는 매사 탄탄한 게 좋으니 우당을 만나러 갈 때는 일가인 병흥과 함께 가라고 주문하셨소."

김의한이 김병흥에게 기별을 하자 그날 저녁에 김병흥이 신필호의 집으로 왔다. 정정화가 우당을 만날 일에 대해 상의하자 김병흥이 말하기를

”우당 선생은 상당한 부자로 알려져 있소. 아마 동농 선생과의 정을 봐서라도 돈을 내놓을 것이오.“

하고 희망 섞인 말을 하였다.

이튿날 정정화는 아침 일찍 신필호의 집으로 온 김병흥과 함께 서강에 있는 우당의 집으로 향했다. 김병흥이 동행함에 따라 엄항섭은 신필호의 관사에 머물기로 했다. 상해와 달리 대중교통이 흔치 않아 둘은 족히 두어 시간을 걸어서 우당의 집에 당도했다.

김병흥의 안내로 정정화는 우당의 집으로 들어갔다. 일행이 들어가자 우당이 손을 잡고 반가워했다. 우당은 한눈에 보기에는 동농과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었다. 정정화는 큰 절로 인사했다. 우당은 동농 선생의 안부를 긴 시간 물었다.

김병흥이 우당에게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시 안채에서 뵙기를 청하자 우당은 짐작한 바가 있다는 듯, 병흥을 안채로 안내했다. 정정화는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났다. 김병흥이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안채에서 나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정화가 물었다. 김병흥은 한숨을 쉬었다.

"우당 선생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네.“

하며 정정화에게 안채로 들어가 보라고 했다.

처음 볼 때 느끼지 못했던 노쇠한 모습의 우당이 꼿꼿한 모습으로 방 가운데 앉아 있었다. 시아버지인 동농보다는 대여섯 살은 적은 우당이었지만 동농과는 달리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영락없는 노인이었다. 우당이 정정화에게 앉으라고 말하고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시작했다.

”부인, 동농 선생은 나보다 여덟 살 위의 형님입니다. 과거는 내가 이 년밖에 안 늦었으니 동농 선생의 과거 급제는 늦은 편이었지요. 하지만 아시다 시피 동농 선생은 서얼 출신으로 이씨 조선 오백 년 역사에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한 분 아닙니까."

정정화가 숙연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갑오개혁 당시에는 우리 둘 다 내무협판으로 있었는데, 개혁안의 초안은 모두 동농 선생이 작성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쓰러져 가는 조국을 어떻게 일으킬 것인가를 두고 밤을 새우며 토론한 적이 많습니다. 나의 행운으로 나는 동농 선생이 걸은 길 뒤를 따라갔습니다. 내부대신, 중추원 의관 등의 자리를 동농 선생이 앞서고 나는 뒤 따르는 형국이었습니다."

숨을 고른 우당이 그윽한 표정이 되었다. 정정화도 덩달아 숙연한 마음이 되었다.

”경술국치가 일어나던 해에 나는 불행 중 다행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이었습니다. 중추원 의관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원로 관리들에게 예우 차원에서 부여한 직위였습니다. 그건 동농 선생도 비슷했지요."

여기까지 말한 우당이 며느리를 불러 벽장 속에 동농이 보낸 서신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며느리가 가져온 봉투를 손에 든 우당이 이를 정정화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열어 보시지요."

오래 전의 것인지 봉투는좀 낡은 느낌이었다. 정정화가 손에 든 봉투에 잠시 눈길을 준 뒤 봉투를 열었다. 거기에는 한문으로 쓴 여덟 글자가 있었다. 익숙한 시아버지 동농의 글씨임이 분명했다.

”寧爲玉碎 不爲瓦全(능위옥쇄 불위와전)"

‘차라리 옥이 되어 가루가 될지언정, 기와장이 되어 보전할 수는 없다.’

정정화는 이 글귀를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한 소식을 듣고 동농은 밤새 울었다. 새벽에 부의문을 작성해 조문으로 썼다. 장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동농이 며느리 정정화를 불러 남북조 시대 이야기 한 토막을 했다.

남북조 시대 위나라가 망하고 북제가 건국했을 때 위나라 충신인 원경호가 절개를 지키며 쓴 글귀가 바로 그 글귀였다. 사내대장부 차라리 옥이 되어 가루가 될지언정 기왓장으로 보전되는 수모는 겪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결국 그 글귀를 쓴 원경호는 목이 베어 죽었다는 말을 정정화에게 하면서 동농이 슬픈 표정을 지었던 기억이 또렸했다.

정정화를 바라보던 우당이 말을 이었다.

”그 글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 동농 선생이 내게 보낸 글귀입니다. 을사조약의 치욕을 견디지 못해 민영환 공이 자결한 것을 따라 동농 역시 경술국치의 치욕을 자결로 저항할 결심을 하고서 내게 보낸 글귀입니다. 차마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 한 자신의 결심을 내게 전한 것입니다."

정정화는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을 받았다. 앉은자리가 선 자리로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경술국치 당시 동농은 중추원 참의직과 규장각 세학을 마지막으로 모든 관직을 떠난 상태였다. 대한자강회가 해산당한 후 그 후신인 대한협회의 회장을 맡아 국민운동에 전념하던 시기였다.

당시 정정화의 시어머니, 동농의 부인 이 씨는 남편이 충정공 민영환의 모범에 따라 자결할지 모른다는 강한 의심을 품고 있던 상태였다. 이 씨는 정정화에게 시아버지에게서 하루 종일 눈을 떼지 말고 감시할 것을 강하게 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정화의 친정 오라버니 정두화가 정정화를 찾았다. 정정화보다 열 일곱살이 많은 정두화는 신식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가 많은 사람이었다. 시아버지 동농은 정정화의 친정 오라버니 정두화를 각별히 사랑스럽게 대했다. 예산 친정에서 경성에 오는 때면 정두화는 동농과 오랫동안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런 정두화가 정정화를 찾은 것이다.

”정화야. 이 이야기는 네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말을 꺼낸 정두화가 품에서 약봉지 하나를 꺼냈다.

”두화 오라버니, 이건...?"

잠시 머뭇거리던 정두화가 말을 이었다.

”네 시아버지가 내게 청하신 약이다..."

그날 정정화의 시어머니 이 씨는 동농과 단판을 지었다. 원래 그 성정이 억센 이 씨였다. 며느리에게도 더 이상 없을 정도로 모질디 모진 시어머니였다. 동농은 그런 아내에게 결국 손을 들고, 죽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동농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시어머니의 억센 성정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당시 자신의 그런 뜻을 민영달에게 전한 것이었다. 동농의 결의가 얼마나 굳은 것이었는지,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기어이 임시정부로의 망명을 감행한 것이 얼마나 절절한 결심의 결과인지, 정정화는 비로소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정화에게 동농은 한없이 따뜻한 분이었다. 모진 시집살이를 견딘 힘도 동농의 그 자상함이었다. 그런 시아버지를 뒤따라 혈혈단신 상해로 간 것도 그런 동농을 진심으로 존경해서였지 않았던가. 정정화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우당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날 정정화는 빈손으로 우당의 집을 나왔다. 서강에서 관사까지 돌아가는 두어 시간 동안 정정화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거부였던 우당이 자금을 내지 않은 것은 위험을 걱정한 것으로 짐작할 뿐, 정정화로서는 서운한 일이었다. 민족의식이 없는 분도 아니었다.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정정화는 빈손으로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말이나마 남겨야겠다 생각했다.

”아버님께서는 늘 우당 선생님을 각별히 생각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자결할 결심을 우당 선생님께 서면으로 밝힌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자결을 결심하던 아버님의 결기는 이제 조국 독립을 향한 결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하루하루 각기병으로 고통받는 몸이지만 우리 젊은이들의 귀감이 되어 주시니 참으로 저희는 복 있다 생각합니다. 선생님, 부디 몸 건강히 내내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정화는 우당에게 큰절하고 돌아서 나왔다. 물끄러미 정정화를 바라보던 우당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음날 독립신문에는 민영달이 일제가 수여한 남작 작위를 반납했다는 기사가 떴다.

김의한은 우당이 독립자금 기부를 거절했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이는 그만큼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이 난관에 부딪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말을 들은 김의한이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입장을 낸 반면, 정정화는 더 공격적으로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의 생각이 팽팽할 즈음 정섭이 끼어들었다.

”도시 담이신 두 분이 이리 다투니 제가 좀 끼어들겠습니다."

두 사람이 정섭을 봤다.

”두 분 다 옳은 주장입니다. 신중론과 강행론. 이 둘을 절충하는 방법을 강구하면 어떻겠습니까?"

두 사람이 함께

”어떻게...?"

하고 의아한 표정이 됐다.

”제 생각에는 이 과업을 그만둔다면 정정화 선생이 어렵게 경성에 온 보람이 없으니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정정화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정섭이 이번에는 정정화를 보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막 다니다간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예관 선생께서도 일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김의한이

”그렇지."

하고 대꾸했다.

정섭이 두 가지를 다 충족할 방안을 내자고 말했다.

”그러니 목적도 도모하고 안전도 기할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김의한이 정섭을 향해 다소 높은 언성으로 말했다.

”그런 방안을 못 찾고 있으니 이러고 있는 판국인데 끼어들긴 왜 끼어드는 거요?"

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중간에 사람을 하나 둡시다. 수당이 만날 사람을 미리 그 사람이 만나서 접촉한 연후에, 안전을 확인하고 정화 씨가 만나는 것이오."

”그래, 그거 좋겠소."

정정화가 김의한의 말을 받았다.

왜 이런 생각을 못 했나 하는 표정이 된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봤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결정이 나자 엄항섭이 끼어들었다.

”그 역할은 내가 하겠소."

김의한이 바로 말을 받았다.

”우리 신변이 위험해서 중간에 사람을 두자는 것인데 엄항섭 동지가 나서면 어쩌자는 것이오?"

정정화도

”그건 성엄 말이 맞소. 당치 않습니다.“

하고 받았다.

엄항섭이 두 사람을 한 번씩 본 다음 정색을 하고 말했다.

”참 답답들 하시오. 생각을 해보시오. 우당 선생 같은 분이 거절하는 것이 독립자금 모금입니다. 하물며 그 앞잡이로 사람을 미리 만나라고 하면 누가 중간에서 그 일을 하겠다고 선뜻 나설 것이며,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만약 그 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사람은 무슨 죄요? 게다가, 가까운 사람이라고 의향을 물었다가 발고라도 하면 그건 또 어찌할 작정입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김의한도 정정화도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해서 독립 자금을 모으는 일은 엄항섭이 먼저 대상과 접촉해 길을 뚫으면 정정화가 나서는 것으로 정해졌다.

정정화가 자기 방으로 간 다음 잠자리를 준비하던 정섭이 김의한에게 물었다.

”김익상 동지는 오늘 어디서 잔답니까?"

엄항섭이 아는 체를 했다.

”이태원에 아우 댁이 있다고 들은 것 같소. 아마 거기서 자지 않을까 싶은데...“

하며 김의한 쪽을 봤다. 김의한이 답했다.

”맞소 이태원에 김준상이라는 아우가 있는데 거기서 잔다고 했소. 아마 김익상 동지의 내자도 남편이 집을 나간 이후로는 거기로 아예 거처를 옮긴 것으로 알고 있소."

정섭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럼 내외가 지금 상봉을 하고 있겠습니다 그려."

모두들 웃는 얼굴이 됐다.

잠시 후 엄항섭이 말했다.

”그런데 내 일전에 김원봉 선생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소."

정섭과 김의한이 엄항섭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별 이야기는 아니오. 김익상 동지가 경성 출생으로 용산철도국 공원으로 일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비행사가 되고 싶어 비행학교가 있다는 광동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다들 알 것이오."

정섭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김의한은 들었던 이야기였다. 김의한은 잠자리가 마련되자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정국이 혼란한 틈에 그 비행학교가 폐쇄된 것을 알고 광동에서 발길을 돌려 상해로 온 것이오. 그러다 김원봉 단장과 인연이 닿아 의열단원이 됐는데, 총독부 폭파 계획을 세우는 것을 알고는 김익상 동지가 자원했다 했소."

엄항섭의 말끝에 정섭이 말했다.

”아내가 있는 분이 참 쉽지 않은 일을 하는군요..."

모두 잠자리가 마련되자 불을 끄고 누웠다. 정섭은 김익상이야말로 ‘도시 담’이라는 생각을 하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1980년 서울

박진호의 말을 받아 이종학 박사가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시간 이동의 원인으로 잠정적으로 고려되고 있는 에이엠제이... 지구 자기장 방향의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 지역이 아까 동아시아라고 말씀드렸는데, 정확하게는 서울과 상해, 그리고 단동을 잇는 삼각지대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단동은 중국의 안동의 바뀐 이름이었다. 뭔가 생각하던 김태훈이 이종학 박사를 향해 말했다.

”박정섭 군의 경우 시간 이동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상해로 위치까지 변경된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종학이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이 가설이 맞다면 정섭 씨는 삼각지대 내의 어디에서도 시간 이동을 할 수 있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박진호가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혹시 세 분은 최근 북한이나 일본과 관련 있는 사람을 접촉한 일이 없습니까?"

김태훈이 박진호를 향해 말했다.

”사실 최근에 학회에서 만난 일본인 학자가 한 사람 있긴 합니다."

박진호가 되물었다.

”혹시 그 사람 이름이 야마모토 씨 아닌가요?"

김태훈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시죠? 혹시 그 사람이...?"

박진호가 김태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야마모토라는 역사학자는 일본 외무성 장학생으로 아마 이 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야마모토는 일본 정보국의 특수팀에 소속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틀림 없이 야마모토 씨가 태훈 군에게 접근했을 것입니다."

김태훈이 당시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상황이 심각하긴 심각한 모양이군요..."

박진호가 책상 위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것은 일본 외무성 비밀문서고에서 발견된 1921년 조선총독부 폭파 사건에 관한 기밀 보고서입니다."

그가 문서 한 장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일본어로 작성된 문서였다. 하단에는 몇 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언뜻 봐도 그중 하나에 정섭으로 보이는 인물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의열단원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 당시 밀정의 밀고에도 불구하고 거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진의 인물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찬호가 앞으로 내민 서류의 정섭의 사진 아래 가타가나로 박정섭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김태훈이 “박. 정. 섭.”이라고 읽었다.

수현은 놀란 눈으로 사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정섭 선배네요..."

김태훈이 문서를 자세히 살폈다. 거기에는 육하원칙에 따라 사건이 일어난 경위와 박정섭에 대한 언급이 세세하게 쓰여 있었다.

김태훈이 박진호에게 물었다.

"정섭 군이 실제로 역사적 사건에 참여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박진호가 대답했다.

"물론 박정섭이란 인물은 여전히 거사의 주요 인물은 아니지만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에 상당한 관여를 한 것은 분명합니다. 일본은 그걸 숨기고 있지만 기록으로는 남아 있는 것이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종학 박사가 정정화를 향해 물었다.

"혹시 정정화 여사님.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1921년의 박정섭 씨가 사라진 시기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모두들 '왜 그 생각을 못 했나' 하는 표정으로 정정화를 돌아다봤다.

정정화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글쎄. 나는 정섭 군이 여기로 와야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말을 안 한 것인데... 나의 과거에 박정섭 씨가 사라진 건 한 5월 중순쯤이었어요."

'5월 중순이면 한 달 보름 정도 남은 것이 아닌가?' 다들 놀란 표정이 됐다.

"그땐 그랬는데... 정섭 군이 사라진 지금 똑같이 5월 중순에 온다는 보장이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 아닐까 하는데..."

이종학 박사가 정정화의 말을 받았다.

"여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현재까지 관측에 의하면 실제로 5월 중순 경에 다음 자기장 이상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어쩌면 여사님이 말씀하신 시기와 맞아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두의 시선이 이종학에게 모였다.

“다만. 그 사이에 박정섭 씨에게 어떤 변고가 생기거나, 아니면 회중시계에 문제가 생기면 백 퍼센트 장담할 수만은 없습니다. 거기에서 임시정부 인장을 손에 넣는다 해도 회중시계와 작용을 제대로 할지도 의문이고요. 아무튼 여러 가지 변수 때문에 장담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이종학 박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수현에게 말했다.

“수현 양, 혹 박정섭 군이 시간 이동을 할 때 떨어뜨렸다고 하던 인장을 지금 가지고 계십니까?”

수현이 정정화를 바라봤고, 정정화가 대답했다.

“정섭 군이 사라진 뒤 수현이가 주워서 가져와 지금은 내가 보관하고 있어요.”

이종학 박사가 안심이라는 듯,

“인장을 저희에게 잠시 내어주시면 인장이 다른 인장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 인장만의 특별한 성격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수현이 대신 답했다.

“그렇게 하세요. 그 에이엠제이인가 뭔가와 인장, 그리고 회중시계가 작용을 해서 정섭 선배가 과거로 갔다면 그 비밀을 꼭 풀어 주세요.”

이종학 박사가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나가시는 대로 제가 댁으로 받으러 가겠습니다.”

잠자코 있던 박진호가 수현과 정정화를 바라보며 놀라운 제안을 했다.

“혹시 여사님이나 수현 양이 북의 김의한 선생을 만나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수현과 정정화가 동시에 외쳤다.

“할아버지를요?”

“성엄을요?”

“네, 우리가 과거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지만 혹시 김의한 선생이 박정섭 군의 시간 이동에 관한 비밀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박정섭 씨와 김의한 선생은 매우 끈끈한 관계였던 것이 분명하고, 두 분 사이에 어쩌면 그와 관련한 특별한 대화가 오고 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겁니다.”

수현이 정정화를 향해 ‘할머니...’ 하고 불렀다. 그렇게 하자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정정화가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내 평생소원이 통일인 사람이 남편 보러 가자는 말처럼 혹하게 하는 말이 없네. 하지만 진호 군이 나를 휴전선을 통해서 보내줄 수 있으면 내 걸어서라도 갈 생각은 있네..."

박진호가 진지한 표정이 됐다.

천정을 바라본 정정화가 '후' 하고 한숨을 내 쉰 후 말을 이었다.

"그러나 중국 거쳐 가는 것은 내 사치스러운 마음이 허락을 안 하네. 이번에는 무슨 작전 같은 것을 해야 할 테니 더욱이 나는 거추장스러울 것이고..."

정정화는 남편이 남북관계 그리고 한일관계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해방이 된 지 삼십 년이 넘게 흘렀는데 아직도 조국은 분단된 채이고, 일본은 여전히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은폐하는데 몰두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삼국이 김의한을 이용하려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수현을 향해 말했다.

“나는 못 가도 수현이 너는 이번 기회에 할아버지를 만나고 오는 것이 어떨까 싶다.”

박진호가 예전에 없던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사님의 생각을 이해합니다. 감사합니다, 여사님. 수현 양과 상의하고 정보원을 통해 북의 사정도 파악한 후, 다소 시일이 걸리겠지만 수현 양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김의한 선생을 만나는 작전을 펴겠습니다.”

밖은 이미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1980년 4월의 서울 하늘은 저녁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수현의 마음에는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다. 정섭은 지금 1921년의 경성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을까? 그리고 자신은 과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제7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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