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대부분은 크리스마스보다 행복했다.

매일 여름 : 치앙마이에서 친구와 보낸 30일

by 땅콩

프롤로그 : 대부분은 크리스마스보다 행복했다.


태국에서 한 달을 살면 매일 일기를 쓸 줄 알았다.

꼭 일기가 아니더라도 블로그에 글이라도 남기며 한 달을 기록할 줄 알았다.

한 달이면 멋진 기록 하나쯤은 남기기 충분하지. 그런 은근한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놓친 게 하나 있었다.

해외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나’라는 사실.

낯선 곳에서도 나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운동을 종종 했고, 매일 커피를 마셨고, 팟타이와 팟카파오무쌉을 좋아했다.

그리고 일기는 안 썼다.원래 안 쓰던 거니까.


새해에는 빼곡하지만 연 말로 다가갈수록 백지에 가까워지는 다이어리들.

그런 다이어리를 연례행사가 끝난 후 얻는 기념품처럼 모았다.


그러다 노트처럼 쓸 수 있는 어플을 발견했다.

사진도 넣을 수 있고, 스티커도 붙일 수 있었다.

그렇게 사진을 넣고 스티커로 꾸민 정성어린 일기를 꽤나 열심히 써나갔다.

그 마지막 기록은, 몇 년 전 크리스마스.

‘이 날은 멋진 하루였으니까 나중에 제대로 써야지’ 라고 미뤄두다가 까지 온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꼭 일기에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기억은 휘발성이고, 내 기억은 유독 가볍게 날아간다.

그래서 결심했다.

태국에서의 한 달을 얼른 기록하자고.

왜냐면, 태국에서의 하루하루는 대부분 크리스마스보다 행복했으니까.


1 : 방콕에서는 1.5배속으로 행동하기.


한 달.

태국에서 한 달을 살기로 결심했을 때, 한 달은 그렇게 길진 않지만 결코 짧지는 않은 시간일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 본 한 달은 그 예상보다도 훨씬 더 짧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기록 할 시간을 낼 수가 없을 정도로 바빴다. 먹느라 바쁘고 돌아다니느라 바빴다. 정신차려보니 귀국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정도로, 그렇게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태국에서 지내는 내내 시간이 빠르게 흘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지나간 건 방콕이었다.

난 방콕에서의 기억이 없다. 태국 한 달 살기는 방콕으로 시작해서 4일 후 치앙마이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는데, 방콕에서의 여행 중 드문드문 기억나는 건, 시간 없으니 음료는 걸어가면서 마시자는 내 친구. 아직 해도 안 뜬 어둑한 새벽, 아직 잠에서 깨지 못 한 나를 보고는 혹시 더 잘 거냐고 묻는 내 친구. 마치 누군가 1.5배속 버튼을 눌러놓은 것만 같은 그런 내 친구의 모습이었다. 방콕에 와서 기념품으로 아주 귀여운 작은 코끼리 인형을 샀었는데, 나는 그 코끼리인형에 있던 영혼이 내 친구에게 들어간 것은 아닐까 방콕에서 내내 걱정했다.



훈련같은 여행이었지만, 친구가 방콕에 있는 동안 극기훈련의 조교같이 굴었던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일정을 미리 계획할 땐, ‘빡빡한 일정이긴 하지만, 중간에 상황 보고 몇 군데는 안 가도 돼.’ 라며 너무 무리하지 말자고 서로에게 말했었지만, 막상 와 보니 안 가도 아쉽지 않은 그런 곳은 없었던 것이다. 치앙마이의 아기자기함에 익숙해져있던 시골쥐들이 대도시 방콕으로 처음 와 보니 생긴 부작용이었다. 그러니 나는 친구가 ‘이 오렌지 쥬스가 그렇게 맛있대. 너도 들어봤지? 이게 그거야. 자, 마시면서 걷자. 이동.’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오렌지쥬스를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며 뒤따라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내 행동에 따라서 내 친구는 방콕에서 천사가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있는 조교였으니까.

나는 너무 빠르게 지나친 순간은 영상이 아닌 사진으로 기억에 남게 되곤 했다. 이번 방콕 여행이 그런 경우였다. 훈련같은 여행의 기억은 방문했던 장소들이 사진이 되어 한 장 한 장 남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오래 들여다보게 된 사진이 있다. 그건 하늘이 분홍색으로 물들 때 쯤 보게 된 왓 아룬이다. 그 사진을 가장 오래 들여다 보게 되는 건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조금 더 큰 이유는 다른 이유이다.


이번에 함께 여행을 간 친구는 학생 때부터 함께였던 오래 된 친구인데, 그 시간을 함께 하며 알게 된 사실은 나와 내 친구는 막하막하로 운이 없다는 것이었다. 크게 불운하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행운이 따라주어야 하는 그런 상황이라면 기대하지도 말고 일찌감치 뒤로 빠져서 행운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하는 것이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왓아룬으로 가기 전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택시를 타고 식당으로 갔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지도를 보고 돌아다녀도 우리가 찾는 식당이 보이지 않았는데, 친구가 한 문 닫힌 식당을 가리키며 여기가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굳게 닫힌 문에는 휴가를 다녀오겠다고 적힌 종이가 붙여져 있었다. 우리는 사장님이 즐거운 휴가를 보내기를 바라며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택시를 불러서 왓아룬을 볼 수 있다는 장소로 이동을 하는데, 생각보다 길이 막혀서 알아보았던 시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택시 안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대로 노을도 못 보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던 찰나, 기사님께서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내리라고 하셨다. 목적지는 왓아룬이 보인다는 카페로 찍었는데, 카페도 왓아룬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잘못 내린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왓아룬을 구경이라도 하기 위해 왓아룬이 있다는 방향으로 친구와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발견했다. 한 골목의 끝에 걸쳐진 왓아룬이 보였다.



심지어 생각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지도 않아서 노을이 지는 왓아룬을 구경할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친구와 내가 왓아룬을 반 쪽씩 나누어 보아도 우리치곤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려고 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친구와 나의 반쪽짜리 운들이 하나의 운으로 합쳐진 순간이었다. 0.5+0.5=1 의 순간을 축하하기위해 가장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우연히 이름도 모르는 카페에 들어가서 이렇게 왓 아룬을 구경할 수 있다니. 나는 답지않은 운이 좋은 상황이 믿겨지지 않아서 잠시 조용히 창문 밖에 놓인 풍경을 구경했다. 친구도 잠시 조용한 걸 보니 믿겨지지 않는 건 피차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했다. 예상했던 시간대로 지도를 보며 경로를 따라가 마주했던 풍경이었다면 지금만큼 기뻤을까? 일이 꼬여가던 상황에서 마주쳐서 더 반가운 풍경이 아닐까? 그렇다면 계획했던 일이 잘 풀리지않던 그 상황도 꼭 운이 나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나온 ‘스텝이 꼬이면 탱고’라는 말을 친구에게 들었을 때,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실감한 건 지금에서야 였다.

나중에 왓아룬을 그렇게 볼 수 있었던 건 정말 우리답지 않은 행운인 것 같았다고 말하니, 내 친구는 ‘야, 나는 우리가 사람들 틈 새로 반 쪽 씩만 볼 줄 알았어.’ 라고 대답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의 운을 간파한 건 역시 나 뿐만은 아니었다.


방콕을 떠나기 전 날에는 치앙마이 출신의 택시기사님을 만났다. 야시장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는데, 우리의 여행계획을 물어보신 기사님께서 다음 목적지인 치앙마이를 듣고 굉장히 반가워 하셨던 것이다. 직장과 가족 때문에 지금은 방콕에 살고 있지만 고향인 치앙마이를 항상 그리워하고 있다고 하셨다. 나는 마음의 고향인데도 늘 치앙마이에 가고 싶어하면서 사는데, 진짜 치앙마이가 고향인 사람은 오죽할까. 목적지에 도착해서 인사를 하고 택시에서 내리는 우리에게 기사님은 ‘치앙마이는 추우니까 감기조심해!’ 라며 걱정어린 인사를 했다. 일 년 내내 따뜻한 나라에서 감기를 조심하라는 인사라니. 치앙마이출신다운 다정함이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