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동화] 순이의 고무줄

이 이야기는 나의엄마

by 호뚜니의 작은방


[어른동화] 순이의 고무줄
글 해피 / 그림 서은

1960년대, 어느 시골 마을 이야기





순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아니, 다닐 수 없었다.

순이의 직업은 ‘너미집 살이’.
아홉 살 어린 순이는 주인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아이를 돌보고, 밥을 차리고, 심부름을 다녔다.

주인집 딸은 책보자기를 메고 학교에 갔다.
책이 좋아서가 아니라, 학교가 당연한 길이었기에.
그 길 위에 순이는 없었다.

순이는 아기를 업었다.
바둥거리는 아이를 토닥이며, 하루를 견뎠다.
하지만 마음은 고무줄 놀이터에 가 있었다.

주인집 딸은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순이에게 글자를 가르쳐주려 했다.
순이는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봐봐, ‘가’는 이렇게 쓰는 거야.”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꾹꾹 눌러쓰던 주인집 딸.

그때 순이는 글보다 고무줄이 더 좋았을 것이다.
아기를 등에 업은 채로 고무줄을 뛰기도 했다.
등이 아프고, 허리는 일찍 굽고,
어른들은 "키도 덜 컸다"고 말했다.

지금에서야 순이는 안다.
그 아기가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었던 자신,
너무 일찍 짊어졌던 삶의 무게 때문이었다.

순이는 늘 배가 고팠다.
밥을 차리고도 입에 넣지 못했던 아이.

어느 날 저녁,
순이는 몰래 광문을 열었다.
손끝으로 설탕을 찍어 혀에 올렸다.

달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달지 않았다.
참 이상한 맛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순이에게 진짜 고팠던 건
따뜻한 품,
기다려주는 한 사람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밤이면 베개가 축축해졌다.
“우리 엄마는 지금 뭘 하실까…”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손길을 상상하며
작은 몸을 이불 속에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소문이 돌았다.
“순이네 엄마가 시집간대.”

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속에 돌처럼 가라앉는 말,
그 말을 안고 하루를 더 견뎠다.

며칠 뒤, 엄마가 왔다.
진짜로.
순이를 보러 온 것이다.

그 순간, 순이는 달렸다.
죽어라 달렸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엄마가 타고 있는 그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날 순이는 엄마 손을 잡고 집에 갔다.
하루를 함께 있었다.
따뜻한 밥을 먹고, 하룻밤을 잤다.

그러고 다시 돌아왔다.
너미집으로.
순이는 알고 있었다.
그게 오래 머물 수 없는 꿈 같은 시간이었다는 걸.

순이는 다시 아기를 업고 고무줄을 뛰었다.
다시 불을 지피고, 밥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가끔, 주인집 딸이 써주던 ‘가’를 떠올렸다.
불빛 속에서 흐릿하게 번지던 그 글자처럼,
순이의 마음엔 아직도 희미하게 남은 뜻함 하나가 있었다.

지금 순이는 말한다.
“그 딸아이에게 고맙지.
나한텐 세상이 다 닫힌 줄 알았는데,
그 아이 덕분에 글자를 배웠으니 말이야.”

그리고 나는 안다.
그 고무줄 위로, 불빛 아래로,
어릴 적 순이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를.
그 순이가 자라
내 엄마가 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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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나의 엄마, 그리고 우리 모두의

엄마를 기억하며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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