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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h Sep 21. 2024

1. 암 말기, 아버지의 죽음 1

아버지와의 마지막 8주

아버지는 1943년 10월 27일 일본 오사카에서 삼남으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2024년 7월 27일 뉴질랜드 타우랑가에서 항년 80세로 임종을 맞으셨다. 한국인이시고 인생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내셨는데, 어찌 삶의 시작과 끝이 모두 타국에서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마지막 4년은 공기 맑고 자연환경이 좋은 뉴질랜드에서 보내시며 은퇴 생활의 정점을 찍으셨다고 생각한다. 당뇨 2형과 전립선 문제를 빼고는 건강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이셨고, 양약 챙겨 드시기를 십계명보다 잘 지키셨기에 본인 건강 문제에 관한 약들을 드셨고, 그 약들의  부작용을 막거나 낮추기 위해 추가적인 약들을 복용하셨다. 드시던 약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의 간은 정말 피로하겠구나, 좋을 수가 없겠구나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간암까지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보고 싶은 아버지, 그리고 한걸음에 달려와 위로를 건네준 고마운 교회 언니들과 교회 언니오빠 부부


요즘은 암이 너무나 흔해서, '암에 걸린 사람'과 '앞으로 걸릴 사람' 두 부류로 나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에도 암세포는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고 하며, 지병 없이 노령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사체에서 실제로 암덩어리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아버지의 암 진단은 이미 위, 식도, 간에 크게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단계인 '말기'에 발견되었다. '말기'와 '4기'의 차이점은 간단하다. 원발암이 다른 곳에 전이되면 '말기'이다.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암 말기 극복 사례'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발암 한 곳의 4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으니 정보를 잘 가려서 식별해야 하겠다. 


2024년 초부터였을까, 아버지는 입맛이 없고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단언컨대, 그동안 단 한 번도 입맛이 없다고 하신 적이 없었다. 반찬 투정 없이, 몇 번 씹지 않고 꿀떡꿀떡 삼키셔도 소화 문제로 속을 썩인 적은 없으셨던 분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가 아버지가 나이가 많아지시니 몸에 변화가 있겠거니,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문제겠거니, 가벼이 생각했다. 사실은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신기한 것은 그 누구도 암의 가능성을 생각조차 안 했다는 것이다. 참 무지했고 무심했다. 집안 통틀어 암 병력이 없었기에 마치 우리 식구들 모두가 암에 대한 슈퍼 항체 유전자라도 지닌 듯 착각한 것은 아닐까. 가족력을 떠나 기대 수명이 팔순을 넘어가는 이 시대 노인분들에게는 작은 신체적 변화라도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으니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되겠다. 별 것 아닌 증상이라 하더라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늘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 점에 있어서 어머니와 딸 셋 모두가 그리 세심하지 못하였음을 고백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흔한 70년대 스타일의 부부이셨다. 대단히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닌, 외삼촌의 강력한 추천으로 혼인한 사이었는데, 안타까움이 많이 남는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보다 더 아끼고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주 모시듯 하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지 못하였다. 서로 존중받지 못하였고 서로 할퀸 상처에 아파했다. 이 십여 년 전 은퇴 자금의 대부분을 사업 매매 사기로 날리신 일과 (정확한 금액은 말하신 적이 없어 모름), 그 후에도 온갖 동향 후배나 지인들의 꾐에 넘어가 투자 명목으로 날린 수억 원,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마이너스의 손 주식  등... 부부가 일심동체 파트너십이 되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어머니 모르게 재정을 휘두르셨고, 어머니는 크게 상처받았고, 그 상처가 아버지에게 되돌아가는 악순환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부부가 서로에게 스트레스 요인으로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적기 위해서다. 부모님 두 분이 늘 싸운 이유는 '내가 옳다'는 생각(이라고 적고 '죄'라고 읽는다)에 있다고 생각한다. 늘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기에 아무도 지지 않으려 하는, 아니 질 수 없고, 져주기도 싫은 부부였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존중했다면 그렇게 임종에 임박한 시간까지 투닥거릴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 아름답지 못한 모습들을 지켜보기 힘들었다. 


다시 2024년 초로 돌아가자면, 큰 스트레스 요인들에 의해 위암이 이미 꽤나 진행 중이었던 단계로 추측할 수 있고, 먹은 것이 잘 안 내려가고 식도에 얹힌 느낌은 식도암 증상이었던 것 같고, 그리고 소리 없는 살인자 간암은 간 벽까지 암이 퍼지기 전까지는 느낄 수가 없으니 증상은 없으셨다. 막내딸인 나는 연초에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연 4학기 중 1학기를 마친 후, 피로로 인해 학업을 지속하기가 어려워 2학기부터 운동을 겸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쉬는 김에 식욕감퇴와 소화불량으로 힘드시다는 아버지를 위해 이것저것 식사도 챙겨드리고 같이 운동도 할 요량으로 집으로 모셔왔다. 


"아빠, 엄마는 두고, 아빠만 저희 집에 오셔서 지내시면 어때요? 제가 식사 잘 챙겨드릴게요, 오세요."

5월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잘 모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제안을 드리자 아버지가 흔쾌히 응하셨다. 엄마 빼고 아빠와 지내본 건 내 인생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되었다. 그리하여 5월 27일 오클랜드로 올라가 아버지를 모시고 타우랑가로 내려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 내가 다니는 헬스에 등록하여 가벼운 스트레칭, 자전거 타기, 수영장에서 걷기, 사우나를 함께 다녔다. 매일 주중 아침, 아이들과 아버지 아침을 챙기고,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준 다음, 바로 헬스장으로 가서 운동하고 씻기도 했지만 모닝커피도 마시고, 때론 우동을 사 먹기도 하면서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수영장과 사우나를 함께 다니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근육이 다 빠지고 뼈 밖에 안 남고 마르셨는지 볼 수 있었는데, 몸 컨디션이 나쁜 상태였기에,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막연하게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점을 온몸으로 보고 느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떨칠 수가 없고, 의사에게 진료를 받자고 해도, 오클랜드로 복귀한 후에 주치의에게 가신다고 했기에,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점 우울해져 갔다. 식사량이 정말 적으셨지만 그래도 된장찌개와 부드러운 두부, 누룽지 죽, 생선튀김, 달걀찜을 좋아하며 드셨다. 식사도 대부분 유동식을 해야 했고, 유동식마저도 잘 안 넘어가신다며 오클랜드 주치의에게 받은 소화제 종류와 추가로 활명수 등을 드셨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통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식욕 부진, 배가 늘 부른 느낌, 식도에 걸리는 느낌, 더부룩한 느낌과 배변 문제만을 호소하셨던 것이다. 


내가 우울해지니 남편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두 시간 거리의 관광명소가 있는 예쁜 해변 마을 하헤이에서 비치리조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곳으로 아버지를 초대하였다. 물론 어머니도 함께. 아버지가 나와 3주를 함께 보낸 후의 일이다. 그리하여 부모님은 막내사위의 차를 타고 타우랑가보다도 공기가 더욱 맑은 그곳으로 가셨다. 그런데 꼬불길을 달린 후 아버지의 컨디션은 급격히 나빠지셨는데, 남편이 증상을 자세하게 여쭈다 보니 혈변을 삼 주간이나 보신 말씀을 하셨고, 그리하여 남편은 그날 밤 나에게 전화를 넣어 아무래도 위암 증상 같으니 당장 검사를 받아 볼 것을 종용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튿날 오전 열 시, 아버지를 모시고 예약 없이 가는 1차 진료 병원에 가서 증상을 설명하였더니 의사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상급병원 타우랑가 호스피털로 급행 리퍼럴을 넣어주었다. 오후 네 시, 종합병원 응급실에 입장하면서부터 모든 것은 급물살을 탔고, 나는 보호자이자 통역자로 아버지와 의료진 사이에서 의사소통을 도왔다. 검은색 혈변을 보는 것은 대장보다는 위암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여러 가지 검사들을 했고, 그동안의 출혈로 인해 피가 많이 모자랐기에 우선 응급조치로 1리터의 수혈을 받았다. 응급실 침대를 배정받고 그렇게 병원에서 첫날 밤이 지났다. 마음속으로 나는 아버지의 암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지표가 너무나 명확했기에. 그다음 날은 추측을 확정 짓는 두려움의 날이었다. 뭔가 다 거짓말 같고 현실 같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CT촬영. 뉴질랜드 공적 의료 체계에서 CT나 MRI, 내시경 등은 대기가 길어 2-3달은 기본으로 기다리는데, 아무래도 병세가 매우 심각했다 보니 이튿날 아침에 그렇게 가능했던 것 같다. 오전 9시경 촬영 후 점심시간 전 방사선과 의사와 훈련 중인 의사들 두 명이 찾아와 CT결과를 설명하겠다 하였다. 이미 얼굴 표정에서부터 읽힌다. 암이 맞는구나 예상한다. '매우 심각하다'는 첫마디로 시작하여, '간암에 큰 종양 덩어리 및 여러 작은 덩어리들이 관찰되고, 시발점은 '위암'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위암에서 식도와 간으로 퍼졌을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과 수술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고,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면역치료 등의 치료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이 설명을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그것을 아버지에게 통역해 주고, 아버지의 질문들을 의사에게 통역해주어야 했다. 사실 이건 좀 잔인한 일이었다. 물론 보호자로서 알아야 할 일이긴 하지만... 보호자는 보호자로만 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기막힌 상황에 정신줄 붙잡고 통역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그래도 전문 통역사 딸을 둔 아버지는 못 알아듣는 말 없이,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셨지 않았을까. 


Let that sink in...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서서히 받아들일 때 쓰는 표현인데, 이때가 딱 그렇게 해야 할 시점이었다. 의사는 몇 개월, 몇 주 예상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늘 알고 싶어 한다. 얼마나 시간이 남았나요?

의사들도 자신이 신이 아니기에 타임프레임을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여러 표현으로 다시 되물어야 했다. "말기(terminal stage) 인가요?", "1년 이상 기대하기 어렵나요?"


말기도 맞고, 1년 미만으로 예상하며, 수 주에서 수 달에 이를 수 있는데, 정확히는 아무도 모른단다.

항암치료는 젊은 사람들도 견디기가 매우 힘든데, 아버지의 경우 항암으로 고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다. 의미가 없다. 위 내시경으로 상태를 자세히 확인하고 조직검사로 위와 식도가 같은 종류의 암인지 알아볼 수 있지만,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고 환자를 괴롭힐 텐데, 꼭 하시고 싶으신지 등을 포함해 여러 말들이 오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뭔가 해볼 수 있는 게 있지 않겠나 싶은 희망 같은 것이 있었을 테고, 그래서 내시경과 조직검사를 하시겠다 하셨다. 그리고 그 뜻은 존중되었다. 그렇게 하루 더 입원이 연장되었다. 저녁 식사가 나오기 조금 전, 교회 언니들이 아버지 드실 것과 꽃 등을 들고 방문을 와주었다.

애써 웃음지은 아버지, 나, 아들. 우리는 이때 그 의미를 알았을까.


그리고 그날 밤 암 말기 진단으로 충격받으셨을 아버지를 입원실에 두고, 간호사들에게 아버지를 잘 봐달라, 의사소통이 안되거나 문제 있으면 바로 전화를 달라고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쓰러져 긴장이 풀리니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하며 꺼이꺼이 정신없이 울다가, 쉬다가, 다시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쉬다가, 그렇게 또 울다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힘든 마음 부여잡고 새로운 현실에 억지로, 억지로 적응을 시켜나갔다. 


[다음 내용은 <암 말기, 아버지의 죽음 2>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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