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마지막 일주일 - 감사한 호스피스 완화케어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당장 오지는 않더라도, 언제가 오는 것은 확실하다. 세상에 공평한 것 하나 있다면, 태어난 자는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의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죽음을 더 실감 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지구에는 수많은 인간이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다. 어느 날 생명이 뿅 하고 나타났다가 다시 뿅 하고 사라지는데, 그저 '나 왔다 감' 하는 인생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어차피 죽는 인생을 과연 왜 사는지 그 진짜 목적과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고, 그 이유를, 그 진리를, 그 도를 깨치는 사람도 있겠지만, 찾다가 포기한 사람, 엉뚱한 결론에 이른 사람도 있겠고, 또 많은 수는 그런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태어났으니 그냥 살뿐이다.
아, 우리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탄생도 죽음도, 그 어느 것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있은 자들이 아니라 창조된 피조물일 수밖에 없음을 느낄 수 있는가. 인간은 인간을 낳을 수 있지만 그 무엇으로도 지어낼 수 없다. 지구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다. 식물도, 하다못해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모기조차도, 작은 모래알갱이조차 우리는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과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우리가 잘나서 태양과 달을 허공에 매달아 지구를 비추게 하고, 물과 땅과 온갖 먹을거리들을 갖추어 놓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 존재를 이룬 것이 아님을,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생명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다. 생명권은 모든 생명을 만드신 크고 위대하신 우리의 창조주께 있다.
아버지는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오전 8시 17분에 돌아가셨다. 22일 월요일, 오클랜드 감리교회 김지겸 목사님과 장로님 두 분께서 타우랑가까지 오셔서 아버지를 심방하셨는데, 아버지는 주일부터 완전한 금식에 들어가신 상태였다. 23일 화요일 오전에는 호스피스 간호사가 방문하여, 아버지가 모르핀 알약을 잘 못 삼키실 정도이니 약물 투여 방식이나 전략에 변화가 필요하다며, 수요일에 피검사를 가고 목요일에 호스피스에 외래로 방문을 오라고 하였다. 외래 방문을 오라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간호사가 나가는 길에 쫓아가 따로 물었다.
"아버지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나요?"
이에 간호사는 대답했다, "정말 알 수 없지만, 크리스마스까지는 어려울 것 같아요."
의외였다. 나는 아버지가 작은 언니네 가족이 방문 예정이었던 8월 초에 초상을 치르게 되는 건 아닌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호스피스 경험이 십 수년이라 감이 좋을 것 같았던 간호사가 너무나 먼 시점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니, 과연 그럴까 싶었다. 아버지가 삼일째 식사를 전혀 안 하고 있다는 얘기를 과연 귓등으로라도 들은 건가 싶었다.
그다음 날인 수요일, 아버지는 잠도 못 잤고, 통증이 너무 심하다며 큰 병원 응급실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호스피스에 전화를 넣어 구급차를 부르는 게 좋을지 간단히 상담을 했는데, 구급대원이 먼저 와서 통증을 빨리 잡아주는 게 좋겠고, 호스피스 간호사도 최대한 빨리 와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응급실은 가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우선 집에 계시도록 했다.
아버지는 부엌에서 가까운 방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쪽으로 등을 대고 의자에 앉아계셨다. 등 쪽에 살이 없어 누우면 목 뒤와 등 뼈들이 아프다고 하셨다. 그 모습이 아버지가 살아 숨 쉬며 상호작용을 하시던 마지막 모습이었다. 눈은 너무나 퀭했고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시던 모습이었다. 구급대원 두 명이 와서 통증의 정도를 0에서 10까지 숫자로 표현하라고 하였을 때 아버지는 9라고 하셨고, 주사를 통해 펜타닐을 공급받았다. 약효는 빨랐고 곧 6으로 통증이 내려갔다. 그리고 3 정도까지 내려간 것을 확인하고 구급대원들은 돌아갔다.
"아버지 불쌍하지?"
"아버지, 아버지가 먼저 더 좋은 곳으로 가시는 거예요. 그곳은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고, 오직 주님의 사랑만이 가득한 곳이에요. 더 좋은 데 가는데 뭐가 불쌍해. 예수님만 꼭 붙잡고 계셔요."
내 팔을 벌려 힘없이 겨우 의자에 앉아계시던 아버지를 안아드렸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빠, 사랑해."
아빠의 앙상한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내 마음도 몽글몽글 따뜻해졌다.
"고맙다. 사랑한다."
이렇게 하길 얼마나 잘했는가. 의식이 있으실 때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호스피스 간호사는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였고, 마침 호스피스 센터에 침상이 하나 났으니 그곳으로 옮겨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어제 크리스마스 운운하던 그 같은 간호사이다. 그러니 나는 그때 그 질문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보호자가 너무 힘들면 환자가 호스피스에 일주일까지도 입원을 해서 자신들이 환자를 돌봐준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뭔가 우리가 힘들 것을 예상해서 입원을 권유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간호사는 이 날 아버지가 입원하면 그곳에서 임종까지 보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아뿔싸, 그런 거구나...
아버지는 안 간다고 했다가, 간다고 했다가를 번복하다 (이유는 가는 길에 은행에 들르려는 집념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게 더 좋으시다, 여기 계시라고... (참고로 아버지의 집이 아니고 저자의 집이다). 결국 집에 계시는 것으로 하고, 호스피스에서 환자용 침대를 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간호사는 아버지에게 기저귀를 채우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이 시점에 아버지는 통증이 잦아들으니 침대에 누워 빠르게 잠이 든 상태였다. 호스피스의 환자 침대가 도착하고 내가 시트를 끼우고 준비하는 동안 아버지는 잠이 드셨고, 아버지가 깨시면 그때 침대를 옮겨가자고 할 참이었다.
그런데 12시간이 지나도, 24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시지 않는 아버지.
목요일 오전에 다른 간호사가 방문하였다. 아버지가 잠을 오래 주무신다고, 그래서 화장실도 안 가신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간호사는 아버지 엉덩이 밑 침대 시트에 소변 자국과 축축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 아버지... 이제 못 일어나시는구나... 그제야 아버지가 임종으로 들어가시는 줄을 '진짜로' 깨달았던 것 같다. 몸을 닦고 간호사가 소변줄을 채우고 옷을 갈아입혀드렸다. 그리고 임종이 가까우니 가족들 모두 빨리 오게 하라고 한다. 전화를 넣어 모두 바로 최대한 빨리 소집할 것을 언니들에게 전했다. 그리하여 오클랜드에 사는 큰언니는 형부와 그날 저녁에 도착하고, 서울 사는 작은 언니네는, 하필이면 여름휴가철 극성수기여서, 토요일 오전 도착 비행기 표를 겨우 구해 토요일 정오쯤 도착 예정이 되었다.
호스피스 남직원 두 명이 추가로 집으로 와서 아버지를 들것에 옮겨 거실에 둔 환자 침대로 눕혀드렸다. 그렇게 우리 집 거실이 영안실이 되었다. 간호사는 아버지에게 주사로 넣을 모르핀 및 기타 약들을 어떻게 투여하는지, 스펀지 스틱으로 입 안을 닦는 것 등을 교육을 해주었고, 나는 차분하게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목요일 밤에는 큰언니와 형부가 아빠 곁을 지켰고, 금요일 밤에는 내가 아빠 곁을 지켰다.
양일 동안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작은언니와 통화할 때나, 우리가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드릴 때, 약하게나마 '으' 신음소리를 내주셨다. 한 자 세로 있으면 불편하니 몸을 옆으로 돌려드리기 전에는 모르핀을 투여해 통증을 최소화하도록 했다. 그래도 늘 '아아아--' 고통에 반응하는 소리는 내셨다. 하지만 눈꺼풀조차,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태셨다. 사람의 기관 중 가장 나중에 닫힌다는 기관이 청각이라고 들었기에, 아버지에게 계속, 아버지, 막내예요, 오늘 금요일이에요. 작은 언니 비행기 타고 오고 있어요. 내일 토요일 아침에 도착해요. 그때까지 잘 견뎌주세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드리곤 했다. 금요일에는 요양사가 집에 와서 아버지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혀주었다. 우리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침상 목욕이 되었다.
금요일 밤을 아빠 곁 소파에서 잠을 자고,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한겨울이었지만 하늘도 푸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그런데 자정쯤에 비웠던 소변 주머니에 소변이 없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일체 마시는 게 없는데도 소변 주머니에 소변이 많이 찼었는데, 처음으로 소변이 없었다. 이제 수분이 나갈 때로 다 나간 건가...
그런데 여태까지 버텨주셨으니, 작은 언니네가 올 때까지도 버텨주실 거라고 믿어버렸던 것 같다.
8시경 나는 청소기를 돌렸고, 형부가 자신이 하겠다고 하여 청소기를 넘겼고, 큰언니와 엄마는 부엌에서 부엌일을 보고 있었다. 마침 아버지 옆에 아무도 없는 순간이었다. 그날 점심쯤엔 작은 언니네도 도착할 거고, 오후 4시에는 우리 교회에서 심방도 예정이 되어있어서, 나는 다 떨어진 화장지를 급하게 사러 나가려 했다. 차에 탔는데 너무너무 추웠다. 옷을 가지러 가기는 귀찮고, 그냥 가기는 추웠다. 결국, 추운 게 이겨서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보통은 귀찮아서 그냥 가는데, 이날은 아마도 천사들이 나의 멱살 잡고 안으로 들여보낸 것 같다. 거실 앞 복도를 지나는데 꽤나 큰 소리로 '아아-' 소리가 들렸다. 후딱 아버지를 보러 갔는데, 아니 왜 숨을 안 쉬시지?
"아빠, 왜 숨을 안 쉬어요?, 아빠! 숨 쉬어요!" "아빠, 왜 벌써 가"
나의 큰 소리에 언니, 형부, 엄마, 그리고 딸까지 모두 달려왔다.
숨이 없으시다가 짧게 두 번 숨을 마시는 모습을 보았고, 아버지의 숨은 그렇게 멎었다. 그리고 움직임이 없으셨다. 비교적 평온하게 가셨다. 암의 증상들은 있었으나 알지 못한 시간이 길었고, 암 진단을 받은 지 겨우 5주 만에, 통증으로 모르핀 투여를 시작한 지 4주 만에, 곡기를 끊고 7일째 되는 날, 물 안 드신 지 3일 만에...
그렇게 세 딸 중 두 딸이 함께했고 아내가 함께한, 나름 외롭지 않은 임종이었으리라.
눈부시게 아름답던 그날, 둘째 딸 가족이 뉴질랜드에 거의 다 왔을 즈음... 아버지는 이 땅에서의 몸을 벗고 영면에 드셨다. 소식을 목사님께 전했고, 가정의 병원에도 알렸고, 상조업체에도 전화를 넣어 도움을 청했다. 토요일 근무를 섰던 주치의가 퇴근 전에 전화를 주어 한참 동안을 질문과 답변을 하며 온라인 사망 진단서를 작성해 주었고 퇴근길에 들러서 눈으로, 청진기로 확인하고 사망 진단서를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네시, 한인교회에서 서른 분도 넘게 영면예배에 와주셨다. 참 복이 많으신 양반이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 상조업체에서 아버지 시신을 운구해 갔다.
우리 가족 모두가 떠나는 운구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아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