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

쥐 인간이 보여준 현대인의 초상

by 홍종민

현대인의 초상: 우유부단함과 불확실성의 감옥


당신은 지금까지 자신의 선택이 대부분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 믿어왔다. 아침에 어떤 옷을 입을지,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어떤 길로 출근할지를 결정하는 그 모든 순간이 당신의 주체적인 판단의 결과라고 말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진료실에 들어온 한 남자, '쥐 인간' 에른스트 랑저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정신분석 상담실에서 수많은 강박증 환자들을 만났다. 그들 중 한 명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선생님, 저는 오늘 여기 오는 데만 3시간이 걸렸어요.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 결정하는 데 1시간, 어떤 옷을 입을지 정하는 데 30분, 현관문을 제대로 잠갔는지 확인하느라 20분..." 이것이 바로 강박적 주체의 일상이다.

에른스트 랑저의 경우는 더욱 극단적이었다. 그의 삶은 거대한 결정, 예컨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하는 문제뿐 아니라, 가장 사소한 선택 앞에서조차 끝없이 마비되는 우유부단함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했다. 라캉이 말했듯이, 강박증자는 '욕망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려는 주체다. 그들은 욕망하는 순간 그 욕망이 실현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의 고통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는 바로 우체국 소포에 관한 것이다. 한 장교가 그를 대신해 '착불' 소포 값을 내주었는데, 그는 이 돈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를 두고 끝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A 중위에게 직접 갚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 돈을 대신 전해주겠다는 B 우체국 직원에게 맡겨야 하는가?

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만약 B에게 돈을 줬는데 그가 전달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러면 나는 A에게 빚을 갚지 않은 파렴치한이 될 거야. 하지만 A에게 직접 주려다 길에서 돈을 잃어버리면? 그것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라캉은 이를 '대타자의 욕망'에 대한 불안으로 해석한다. 강박증자는 대타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한다. A 중위는 무엇을 원할까? B 직원은 진짜 믿을 만한가? 이 모든 의문은 결국 "나는 타자에게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된다.

이 사소한 문제는 그의 머릿속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의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거대한 괴물이 된다. 그는 수많은 가능성을 저울질하고, 모든 잠재적 위험을 계산하려 애쓰지만,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완전한 마비 상태에 이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에른스트의 생년월일시다. 그는 기묘년(己未年) 생으로, 기토일간에 미토가 겹친 구조다. 이런 사주는 특히 우유부단하고 결정 장애를 겪기 쉽다. 토(土)가 과다하면 생각이 많아지고, 특히 기토는 습토여서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성질이 있다. 마치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한 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맴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강박적 구조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 표지다. 당신의 삶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중요한 이메일의 답장 문구를 수십 번 고쳐 쓰다 결국 보내지 못하는 밤, 온라인 쇼핑몰의 장바구니에 수많은 물건을 담아두고는 결제 버튼 앞에서 몇 시간이고 망설이는 주말, 연인에게 보낼 짧은 메시지 하나를 두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핸드폰을 껐다 켜기를 반복하는 오후.

라캉은 강박증을 "시간의 정지"라고 표현했다. 강박증자는 결정의 순간을 무한히 연기함으로써 시간을 멈추려 한다. 왜냐하면 선택한다는 것은 곧 다른 가능성들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상징적 죽음과 같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임상 관찰에 따르면, 강박증 환자 중 대부분은 남성이고, 히스테리 환자 중 대부분은 여성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구분이 아니다. 라캉이 지적했듯이, 이는 주체가 성차(sexual difference)와 맺는 관계의 문제다. 강박증자는 "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하고, 히스테리자는 "나는 무엇인가?"라고 끊임없이 묻는다.

남성에게 강박증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남성적 주체가 팔루스적 기능과 맺는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팔루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압박을 느낀다. 반면 히스테리는 타자의 욕망이 되고자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결여를 드러내는 특징이 있다.

현대인들은 정보의 과잉 속에서 더 합리적이고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지만, 오히려 선택의 가짓수가 늘어날수록 강박적 주체는 더욱 깊은 불확실성의 감옥에 갇힌다. 그들이 완벽한 선택지를 찾으려 애쓰는 것은, 사실 그 선택이 초래할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른스트의 소포값 고민은 단순한 돈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책임을 질 수 없음'의 문제였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면, 강박증자는 '욕망의 주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타자가 자신의 욕망을 대신 보증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끊임없이 규칙과 의무를 만들어낸다. "나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초자아의 명령 뒤에 숨어, 자신의 욕망을 회피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증오: 억압된 분노의 그림자


당신은 지금까지 사랑이 순수하고 이타적인 감정이라고 믿어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고, 그의 안위를 염려하며,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이보다 더 숭고한 감정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정신분석의 치료실에서 우리는 종종 사랑이 증오의 가장 정교하고 교묘한 가면임을 목격한다.

에른스트 랑저는 자신이 '사랑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이 닥칠까 봐 늘 걱정했다. 그는 약혼녀가 마차 사고를 당하는 장면을, 존경하는 아버지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이러한 상상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침입 사고'의 형태로 나타났다.

여기서 더욱 기묘한 것은 그의 언어 유희였다. 프로이트와의 분석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에른스트는 여름에 달리기(Laufen)를 하면서 이상한 강박에 시달렸다. 그의 약혼녀를 빼앗아간 남자의 이름이 리하르트(Richard)였는데, 독일어로 '달리다'를 뜻하는 Laufen과 연결되어 기이한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

그는 달리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지금, 리하르트가 있는 곳으로!(Jetzt, wo Richard ist!)"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이것은 즉시 "지금, 쥐가 있는 곳으로!(Jetzt, wo Ratten ist!)"로 변형되었다. 독일어로 쥐를 뜻하는 Ratten과 Richard의 음성학적 유사성이 무의식적 연결을 만든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달리기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빨리 달려, 죽을 때까지!(Lauf dich tot!)"라고 중얼거렸다는 사실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에게 하는 격려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리하르트를 향한 죽음의 소원이었다. 이 언어 유희는 라캉이 말한 '기표의 연쇄'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음성학적 유사성을 통해 억압된 욕망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양가감정(ambivalence)의 비극이다. 라캉은 이를 더 정교하게 설명한다. 사랑은 항상 '대상 a'를 향한다. 대상 a는 우리가 타자에게서 욕망하는 그 무엇, 하지만 결코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그것이다. 강박증자에게 사랑하는 대상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증오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자신의 결여를 끊임없이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에른스트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라 믿고 싶었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를 실패자, 사기꾼, 비겁한 악당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는 그의 사주에서도 드러난다. 기토일간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포용력 있어 보이지만, 내면에는 강한 자기 의심과 죄책감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의 '걱정'은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억압된 분노가 검열을 피해 의식으로 돌아오는 유일한 통로였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환상(◇a)′의구조다.주체(◇a)'의 구조다. 주체( ◇a)′의구조다.주체()는 대상 a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욕망을 구성하는데, 강박증자의 경우 이 관계가 파괴적 환상으로 채워진다.

당신이 가장 걱정하는 그 사람을 떠올려보라. 그의 건강, 그의 안전, 그의 미래를 노심초사하는 당신의 그 헌신적인 마음 뒤에는 어떤 그림자가 숨어 있는가? 자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기며 "다 너를 걱정해서 그런다"고 말하는 부모의 마음속에는, 사실 자녀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공격성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한 내담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남편이 출장 갈 때마다 비행기 사고가 날까 봐 너무 걱정돼요. 그런데 이상한 건, 그 걱정 속에서 묘한 흥분을 느낀다는 거예요. 마치 제가 그 사고를 상상하면서 즐기는 것 같아요." 이것이 바로 강박증자의 비밀이다. 그들의 걱정은 사실 소원(wish)이다.


무능력이라는 전략: 선택을 피하는 완벽한 방법


당신은 지금까지 실패와 무능력을 인생의 장애물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시험에 낙방하고, 승진에서 누락되며, 중요한 프로젝트를 끝내지 못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피해야 할 고통스러운 경험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 무능력이, 그 실패가, 사실은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한 완벽한 전략이자 기묘한 해결책이라면 어떨까?

에른스트를 분석실 문턱까지 밀어 넣은 직접적인 고통은, 자신이 선택한 법학 공부를 기이하게도 전혀 해낼 수 없다는 자각이었다. 그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앞두고는 책 한 줄 읽지 못하는 극심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여기서 라캉의 통찰이 빛을 발한다. 강박증자는 '시간의 주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영원히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결정적 순간을 연기한다. 에른스트의 경우, 이 연기는 매우 구체적인 기능을 했다.


프로이트가 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해보자, 이 공부 마비가 아버지의 사망 직후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때 어머니는 그에게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 "네가 변호사가 되면, 그 집안에서 널 사위로 받아줄 거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에른스트는 운명의 갈림길에 놓인다. 한쪽에는 10년 동안 사랑해 온 가난한 여자 지타, 다른 한쪽에는 집안에서 정해준 부유하고 아름다운 소녀. 이것은 과거 그의 아버지가 겪었던 딜레마와 정확히 일치했다. 아버지 역시 젊은 시절 사랑했던 가난한 여자 대신, 돈과 지위를 보고 어머니를 선택했던 것이다.

라캉은 이를 '상징적 부채'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선택은 아들에게 갚을 수 없는 부채로 남는다. 에른스트는 아버지를 비난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그 '계산적인' 선택 덕분에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선택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주로 보면, 기토일간은 특히 조상과의 인연이 깊다. 토(土)는 무덤을 상징하고, 조상의 기운을 이어받는다. 기미년생은 더욱 그렇다. 미(未)는 묘지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조상의 업보를 대신 짊어지는 운명을 타고난다.

이제 똑같은 선택지가 아들에게 주어졌다. 사랑을 택할 것인가, 계산을 택할 것인가? 이 견딜 수 없는 압박에 대한 그의 대응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정신적 발병이었다. 그는 공부를 일부러 끝내지 않음으로써, 졸업과 동시에 직면해야 하는 이 끔찍한 선택 자체를 무기한 유예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한 '행위(act)의 거부'다. 강박증자는 행위의 순간, 즉 주체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을 무한히 연기한다. 그들의 무능력은 사실 매우 유능한 전략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은 영원히 준비하는 상태에 머문다.

한 내담자의 사례가 떠오른다. 그는 10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매번 시험 직전에 몸이 아프거나, 집안에 급한 일이 생기거나, 어떤 이유로든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상담 과정에서 밝혀진 것은, 그가 진짜 두려워한 것은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합격하는 것이었다. 합격하면 더 이상 '수험생'이라는 안전한 정체성 뒤에 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에른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무능력은 그를 실패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를 선택의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구원해주었다. 졸업하지 않으면 결혼할 자격도, 능력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었고, 지타에게는 "조금만 더 기다려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강박의 역설이다. 증상은 문제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물론 매우 비효율적이고 파괴적인 해결책이지만, 주체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다. 당신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피하기 위해 무능력을 전략으로 삼고 있는가?


강박 속의 주이상스(Jouissance): 고통 속에서 찾는 비밀스러운 쾌락


당신은 지금까지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이고, 쾌락은 추구해야 할 것이라는 단순한 이분법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라캉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기이하고 불편한 진실 중 하나는, 인간이 고통 속에서 일종의 비밀스러운 만족, 즉 '주이상스(Jouissance)'를 찾는다는 사실이다.

주이상스는 단순한 즐거움(plaisir)과는 다르다. 그것은 쾌락 원칙을 넘어선, 고통과 뒤섞인 극한의 향유다. 라캉은 이를 "쾌락 원칙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것은 주체를 파괴하면서도 동시에 주체가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쥐 인간'이 프로이트에게 동양의 끔찍한 고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 주이상스의 섬광을 목격한다. 굶주린 쥐 떼를 통 속에 넣어 죄수의 엉덩이에 묶으면, 쥐들이 탈출하기 위해 항문 속으로 파고든다는 끔찍한 이야기. 프로이트는 이 이야기를 하는 에른스트의 얼굴에서 매우 기묘하고 복합적인 표정을 발견했다. 그것은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쾌락에서 비롯된 공포의 표정"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쥐(Ratten) 이야기가 에른스트의 무의식적 연상 사슬을 따라

확장된다는 점이다. 독일어로 쥐를 뜻하는 Ratten은 그에게 여러 의미로 연결되었다:

Raten (할부, 분할) - 그가 갚아야 할 빚


Heiraten (결혼하다) - 그가 피하고 있는 선택


Spielratte (도박꾼) - 그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도박으로 돈을 잃은 이력


이 모든 기표들이 '쥐'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되어, 그의 핵심적 갈등을 드러낸다. 라캉이 말했듯이, "증상은 은유다." 쥐는 그의 모든 불안과 욕망이 응축된 상징이었다.

에른스트는 이 끔찍한 고문이 자신이 사랑하는 약혼녀와 존경하는 아버지에게 가해지는 장면을 강박적으로 상상했다. 의식적으로 그는 이 상상에 엄청난 죄책감과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은, 이 상상을 통해 억압된 공격적 충동을 충족시키며 끔찍한 만족을 얻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주의 관점도 함께 볼 수 있다. 기토일간은 특히 죄책감에 시달리기 쉬운 구조다. 토(土)는 중앙을 상징하고, 모든 것을 품으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의 무게에 짓눌린다. 특히 기토는 습토여서 더러운 것, 부정한 것들이 달라붙기 쉽다. 그래서 이들은 종종 자신이 더럽다고 느끼며, 끊임없이 정화 의식을 행한다.

이것이 바로 강박의 엔진이다. 강박 증상은 단순히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에게 비밀스러운 만족을 제공하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 라캉은 이를 "증상은 주이상스의 형식"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손이 더럽다고 생각해 몇 시간이고 손을 씻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오염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동시에, 금지된 무언가를 만지고 싶은 욕망을 처벌하고 정화하는 과정에서 기묘한 만족을 얻는다. 이는 라캉이 말한 '초자아의 명령'과 연결된다. 초자아는 "향유하라!(Jouis!)"고 명령하면서 동시에 그 향유를 금지한다.

에른스트의 경우,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고통스러운 쾌락도 이와 연결된다. 그가 "죽을 때까지 달려!(Lauf dich tot!)"라고 외치면서 느끼는 것은 단순한 운동의 쾌감이 아니다. 그것은 리하르트에 대한 살인 욕망과 자기 처벌의 욕망이 뒤섞인 주이상스다.

한 내담자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제 머리카락을 뽑는 버릇이 있어요. 아프지만 멈출 수가 없어요. 뽑는 순간의 그 따끔한 고통이 묘하게 시원해요." 이것이 바로 주이상스의 본질이다. 고통 속에서 찾는 쾌락, 자기 파괴 속에서 얻는 만족.

당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그 강박적 사고와 행동의 이면을 들여다보라. 그 고통의 순환 속에서 당신은 어떤 비밀스러운 쾌락을 얻고 있는가? 당신의 불행과 자기 파괴가, 사실은 당신에게 익숙하고 안정적인 만족감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운명적 반복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도


당신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우연과 선택의 결과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쥐 인간'의 사례는 우리에게 섬뜩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삶이 사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모의 각본을 반복하는 무대는 아닐까?


에른스트는 자신이 아버지와 똑같은 결혼의 딜레마에 빠졌다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증상들이 아버지의 역사와 정확히 대응된다는 점이다:


1. 아버지는 젊은 시절 도박으로 큰 빚을 졌다 → 에른스트는 소포 요금이라는 작은 빚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2. 아버지는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돈 많은 여자와 결혼했다 → 에른스트는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3. 아버지는 군 복무 중 상관에게 큰 빚을 졌다 → 에른스트도 군 복무 중 중위에게 빚을 진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 질서의 반복'이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단순히 유전자만 물려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욕망, 그들의 죄책감, 그들의 부채를 함께 물려받는다. 라캉은 이를 "대타자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욕망은 사실 타자(부모)의 욕망이다.

사주의 관점에서도 이는 설명된다. 기미년생은 특히 조상의 업보를 이어받기 쉬운 구조다. 미토(未土)는 묘지를 상징하고, 기토는 무덤의 흙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조상의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짊어지고 온다.

에른스트의 경우,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한 '사랑과 돈 사이의 선택'이라는 과제가 그대로 아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즉 영원히 유예함으로써 이 반복을 '다르게' 반복했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반복 강박'이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은 반복된다"고 했고, 라캉은 이를 더 정교하게 "실재는 항상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상처와 갈등을, 현재의 삶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재연한다.

하지만 강박의 가장 깊은 심연에는 이 운명적 반복보다 더 근원적인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영원한 애도다. 라캉은 이를 '대상 a'의 상실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어머니와의 완전한 합일 상태를 잃어버린다. 이 최초의 상실은 결코 회복될 수 없다.

강박적 주체는 종종 이렇게 외친다. "이게 내 삶이라고? 이건 내 진짜 삶이 아니야."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이것이 아니야." 이들의 저항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잃어버린 최초의 완전한 만족에 비하면, 지금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성공이나 쾌락도 하찮고 무가치하다는 주장이다.


에른스트의 경우, 이 상실은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어린 시절 누이의 죽음을 목격했고, 이것이 그의 최초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누이가 죽기 전, 그는 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누이가 죽자, 그는 자신의 소원이 현실이 되었다는 끔찍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원초적 죄책감'이다. 우리는 모두 타자의 죽음을 소원한 적이 있고, 그 소원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강박증자는 이 죄책감을 평생 짊어지고 산다. 그들의 모든 의례와 금기는 이 원초적 죄를 속죄하려는 시도다.

한 내담자의 꿈이 떠오른다. 그는 꿈에서 죽은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버지가 "넌 왜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니?"라고 물었다고 한다. 깨어난 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20년째 같은 직장, 같은 직급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아버지를 넘어서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아버지보다 성공하는 것은 상징적으로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치유는 현재의 삶을 부정하고 '대체 인생'을 기다리는 것을 멈추고, 바로 이 근본적인 상실을 통과하며 애도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라캉은 분석의 끝을 "환상의 통과"라고 불렀다. 우리가 결코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애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완전한 삶을 살아내는 것. 이것이 인간 존재의 비극이자 존엄성이다.

당신은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현재의 모든 것이 그토록 무의미하게 느껴지는가? 당신의 삶이 '진짜 삶'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당신이 영원히 기다리는 그 '진짜 삶'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가?


에른스트의 치료는 그가 이 모든 반복과 상실을 언어화하면서 진전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선택이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누이의 죽음이 자신의 소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벽한 선택은 없다는 것을, 모든 선택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강박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우리의 선택은 모두 불완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다.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의 주인이 되는 것. 비록 그것이 실패할 운명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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