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떠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당신에게

by 홍종민

카페에서 본 한 20대 청년의 모습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업무 창이 떠 있었지만, 그는 계속 여행 사이트만 들여다봤다. 제주도, 부산, 강릉... 클릭할 때마다 그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아, 나도 저랬지. 답답한 일상 속에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던 그 마음, 너무 잘 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그 마음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거다. 이유섭도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가 살아 가다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 도회지의 생활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나그네처럼 여행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이유섭, 2018: 114). 그렇다. 이건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다.


여행 욕구,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 청년을 더 지켜봤다. 30분 동안 여행 사이트를 뒤적이다가 결국 예약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거다. '돈도 없는데 뭔 여행이야. 현실 도피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지.' 그런데 잠깐, 정말 그게 맞을까?

프로이드가 발견한 건 이거다. 우리 마음속 충동들은 그냥 생겨나는 게 아니라는 것. 여행 가고 싶은 마음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의 압박감, 성취감 없는 반복,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는 혼란... 이 모든 걸 벗어나고 싶은 건 당연한 거다.

상담실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선생님, 제가 너무 나약한 건가요? 맨날 도망가고 싶어해서요."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나약한 게 아니라 정상이에요. 당신 마음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예요." 그게 팩트다.

또 다른 사람을 봤다. 도서관에서 여행 가이드북으로 빼곡한 책상 앞에 앉은 40대 여성. 몇 시에 어디 가고, 뭘 먹고, 어디서 사진 찍을지까지 꼼꼼히 계획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진심이 보였다. 이번 여행만큼은 정말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여행, 제대로 알고 떠나면 약이 된다


그 40대 여성을 보면서 위니코트의 중간대상 개념이 떠올랐다. 아이가 엄마 없이 잘 때 곰인형을 꼭 안고 자는 것처럼, 어른들도 힘들 때 뭔가에 기대고 싶어한다. 여행지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건 여행 자체가 아니라 여행에 대한 기대치다.

그 여성에게 여행계획서는 단순한 일정표 그 이상이었다. '이번엔 정말 새로워질 거야'라는 희망을 담은 애착담요 같은 거였다. 그런데 이게 나쁜 걸까?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보려는 건강한 신호다. 다만 한 가지만 알면 된다. 진짜 변화는 여행지에서가 아니라 여행을 통해 자신과 마주할 때 일어난다는 것.

위니코트는 말했다. 건강한 중간대상은 성장의 발판이 된다고. 아이가 곰인형을 통해 안정감을 얻고, 그 힘으로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여행은 자신감을 주고,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그 에너지가 지속된다.

이유섭은 이 현상의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길을 잃었을 때는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새 출발을 시도해야 하는 것처럼 삶이 지고, 공허하며, 탈진되면 무엇인가 근원을 찾고, 고향과 어머니를 찾는 것이 인간입니다"(이유섭, 2018: 115). 맞다. 여행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카페 청년도, 도서관 여성도 모두 그 근원을 찾고 있었다. 다만 방법을 모를 뿐이었다. 어떻게 여행해야 진짜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해야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그 에너지가 지속되는지를 말이다.


작은 여행부터 시작하면 된다


공원에서 본 한 할아버지가 모든 걸 보여줬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동네 공원에서 비둘기들을 보며 환하게 웃고 계셨다. 그 순간 깨달았다. 여행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구나. 마음을 여는 크기가 중요하구나.

그렇다고 무조건 마음만 열라는 뻔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여행 가고 싶으면 가야 한다. 다만 이것만 기억하자. 진짜 여행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유섭은 정말 실용적인 조언을 했다. "기왕 마음 먹었으니 용기를 가지고 실천해 보십시오. 인터넷,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혼자 가고 싶고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보세요"(이유섭, 2018: 116). 그렇다. 용기를 내자. 큰 여행이 부담스러우면 작은 여행부터 시작하면 된다.

카페 청년이 결국 제주도 대신 근처 바닷가 하루 여행을 예약하는 걸 봤다. 도서관 여성도 유럽 여행 대신 국내 소도시 2박3일을 계획했다. 그 선택들이 현명해 보였다. 여행의 크기보다 여행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 거 같았다.

진짜 자유는 어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여행을 꿈꾸는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마음을 무시하지 말고, 비난하지도 말자. 대신 그 신호를 소중히 여기고, 자신만의 속도로 움직여보자. 분명히 답이 보일 거다.


이유섭(2018). 현대인의 심리분석 에세이. 서울: 박영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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