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어려움과 전이의 비밀

by 홍종민

영화 <조커>에서 아서가 지하철에서 웃음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을 보면, 관객들은 그의 기괴한 웃음소리에 당황한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서의 그 웃음은 기쁨이 아니라 절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들이 조커의 광기라고 부르는 그 순간, 사실은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린 시절의 상처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현상을 사빈 칼레가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신분석을 통하여 자신을 치유하려고 했던 나의 환자 스스로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겼던 악운을 물리치다'는 표현은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사실 치료는 실제로 환자가 아무 의미 없다고 여겼던 그의 존재의 어떤 현상이 무의식의 논리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련의 순간들이다"(칼레가리, 2017: 58). 영화는 픽션이지만, 그 속의 심리는 현실 그 자체다.


사랑이 만든 감옥, 반복의 악순환


아서 플렉은 자신이 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지 모른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 방식이 전부인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리 마음 속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면이 있다. 심리학자 칼융은 이를 '그림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바로 그 그림자야말로 우리 행동의 진짜 동력이다. 아서의 강박적인 웃음이 바로 그의 그림자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괴로운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 한다. 멜라니 클라인은 이런 현상을 '투사적 동일시'라고 불렀는데, 아서가 정확히 그런 케이스다. 아서는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한다. 사회가 자신을 거부한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자신이 먼저 사회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무의식의 작동방식이다.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반복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거다.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담아주는 그릇 역할을 해야 한다. 윌프레드 비온이 말한 '수용'이라는 개념이 바로 이거다. 그런데 아서의 어머니는 그의 감정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아이가 울 때 달래주는 대신 약을 먹였고, 진짜 감정 대신 가짜 웃음을 강요했다. 그래서 아서는 평생 자신의 감정을 수용할 수 없게 된 거다. 영화 속 아서처럼, 내 상담실의 사람들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사랑받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 오히려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든다는걸 전혀 깨닫지 못한다.


전이, 과거의 유령이 되살아나다


<블랙 스완>의 니나를 보면 전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생하게 보인다. 그녀는 토마스 감독에게서 어머니 에리카의 모습을 본다. 통제하고, 완벽을 요구하고, 절대 만족하지 않는 그 모습 말이다. 니나가 토마스에게 보이는 양가적 감정 - 사랑하면서 동시에 파괴하고 싶어하는 - 이 바로 전이다.

칼레가리의 환자처럼, 니나도 "악운"에 시달린다고 느낀다. 왜 자꾸 완벽하지 못할까? 왜 릴리처럼 자유로울 수 없을까? 하지만 그 "악운"의 정체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무의식적 패턴이다. "이러한 사랑의 어려움은 다른 일들을 포함하여 그의 무의식이 계획한 사랑의 실패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칼레가리, 2017: 58). 니나의 경우가 정확히 그렇다.

니나의 어머니 에리카는 자신의 좌절된 발레리나 꿈을 딸에게 투사한다. 방 안 가득한 니나의 사진들, 매일 밤 손톱을 깎아주는 행위, "내 스위트 걸"이라고 부르며 통제하는 모습. 이 모든 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옥이다. 니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 완벽한 백조가 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진짜 욕망은 억압된다.

그래서 니나에게는 흑조가 필요했다. 자신이 부정한 모든 것들 - 성적 욕망, 공격성, 자유로운 몸짓 - 을 대변하는 그림자 말이다. 릴리는 니나의 그림자가 투사된 존재다. 니나가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는 모든 것을 릴리는 자연스럽게 해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니나의 정신이 분열되기 시작한다.


치유, 사랑을 다시 배우는 길


하지만 희망이 있다. 영화들의 결말을 보면 변화의 가능성이 보인다. 아서는 조커가 되면서 오히려 진짜 자신을 찾는다. 니나는 백조가 되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지만, 그 순간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난다. 둘 다 파괴를 통한 재탄생을 경험한 거다.

하인츠 코헛의 '자기대상' 이론을 보면, 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진정한 수용과 이해였다. 자신의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통합할 수 있게 도와줄 누군가 말이다. 니나에게는 에리카 같은 통제적인 어머니가 아니라, 그녀의 흑조적 면모도 사랑할 수 있는 진짜 자기대상이 필요했다.

코헛이 말한 바로 그 자기대상이 칼레가리가 제시한 분석가의 역할이다. 환자의 공격성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약간의 거리를 두고" 수용하는 것. 그래서 칼레가리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가 이 전이를 견디는데 따르는 어려움에 굴복하여 나의 환자가 분석 관계를 깨도록 내버려둔다면, 나는 그에게 그가 처음에 언급한 '또 한 번의 정서적 실패'를 안겨줄 것이다"(칼레가리, 2017: 67-68). 진정한 치유는 바로 이런 견디는 사랑에서 나온다.

니나의 마지막 공연은 그녀만의 방식으로 이룬 통합이었다. 백조와 흑조를 모두 춤춘 그 순간, 그녀는 완벽했다. 물론 그 대가는 컸지만, 그녀는 마침내 진짜 자신이 될 수 있었다. 아서 역시 조커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억압된 분노와 슬픔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 아서의 웃음 같은, 니나의 완벽주의 같은 증상들을 가지고 있다. 그 증상들이야말로 우리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다. "나는 사랑받고 싶다", "나는 인정받고 싶다", "나는 진짜 나로 살고 싶다"는. 스크린 속 캐릭터들의 절규가 바로 우리 마음의 소리인 거다. 중요한 건 그 신호를 알아채고, 우리 안의 그림자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사빈 칼레가리(2017)/ 김유빈 역(2022). 증강된 삶. 서울: 달을 긷는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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