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의 덫에서 벗어나기

by 홍종민

커피숍에서 본 한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30대로 보이는 남성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엄마, 오늘 면접 뭐 입고 갈까요? 정장? 아니면 캐주얼?" 취업준비생으로 보였는데, 옷 하나 고르는 것도 어머니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표정에서 안도감과 초조함이 동시에 보였다. 누군가 대신 결정해줘서 편한 듯하면서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요즘 상담소를 찾는 사람들을 보면 비슷한 패턴이 많다. "부모님이 모든 걸 정해주셔서 좋긴 한데, 뭔가 답답해요." "남편이 경제적으로 책임져주니까 편하지만,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편하다고 말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모순적인 모습들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중요한 일이 생기면 여전히 "당신 생각은 어때?"라고 아내에게 묻는다. 이유섭 교수는 "지극히 의존적인 생활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동양 문화권의 여성들은 순종의 미(美)라 하여 무조건 감내하고 희생하는 것이 윤리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이유섭, 2018: 122)라고 했는데, 사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의존의 유혹에 빠져 살고 있다.


달콤한 포기의 함정


의존이 이렇게 흔한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로 편하기 때문이다. 내가 결정하지 않아도 되고, 실패해도 남 탓을 할 수 있고, 책임질 일도 없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마조히즘'이라고 하는데, 단순히 고통을 즐기는 게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해달라'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받는 것에서 느끼는 쾌감이다.

지하철에서 자주 목격하는 장면들이 있다. 20대 커플이 "오늘 뭐 먹을까?"라고 서로 묻는다. 둘 다 "아무거나"라고 답한다. 결국 아무도 결정하지 못해서 편의점 김밥으로 때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둘 다 상대방이 결정해주기를 바라면서, 정작 아무도 결정하려 하지 않는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회의 시간에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좋은 것 같은데요" "괜찮을 것 같아요" 같은 애매한 답변만 나온다. 구체적인 의견을 내면 책임져야 하니까 피하는 거다. 프로이드가 말한 '수동적 쾌락'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다.

더 놀라운 건 중년들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동네 상점에서 "이거 어때요?"라고 물어보는 50대 아주머니들, "사장님이 추천해주세요"라고 말하는 40대 아저씨들. 나이가 들어도 누군가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수동적 태도가 습관화되면 점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게 된다. 선택권을 계속 남에게 넘기다 보니, 정작 내 취향이나 내 의견이 사라지는 거다. 그게 의존의 가장 무서운 함정이다.


의존 속에 숨은 지배욕구


더 흥미로운 건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또 다른 패턴이다. 의존할수록 오히려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유섭 교수는 이를 "반동 형성"이라고 설명한다. "남성의 무능력을 이유로 남성을 지배하거나 과잉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경향 또는 남편이 잘 나가는 것을 시기하거나, 빠른 시일 내에 만족을 얻기 위해 부동산, 주식 투자를 하는 등 여성 스스로 어떤 큰 야망을 갖거나, 남의 친절을 과잉 거부한다든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이유섭, 2018: 124)라고 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본다.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면서도 "당신은 왜 이것밖에 못 벌어와?"라고 다그치는 아내들. 부모에게 용돈을 받으면서도 "부모는 왜 이렇게 간섭이 심해?"라고 불평하는 자녀들. 상사의 지시에 의존하면서도 뒤에서는 "팀장은 무능해"라고 욕하는 직장인들.

왜 이런 모순적인 행동을 할까? 의존하는 자신이 부끄럽고 화가 나기 때문이다. 그 수치심을 견디기 위해 내가 의존하는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심리적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저 사람도 별거 없는데 내가 왜 의존해야 하지?"라는 식으로 말이다.

카페에서 본 장면이 기억난다. 40대 여성이 남편과 통화하면서 "당신이 정해놓고 왜 이제 와서 바꿔?"라고 화를 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신이 알아서 해"라고 맡겨놓고는, 마음에 안 들면 상대방을 탓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행동의 밑바탕에는 깊은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의존하는 사람이 무너지면 나도 함께 무너진다는 공포. 그래서 끊임없이 상대방을 체크하고, 간섭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겉으로는 의존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은밀한 지배를 시도하는 거다. 그게 팩트다.


진짜 자립을 향한 작은 걸음들


그럼 의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유섭 교수의 말처럼 "누추하고 보잘것없어도 자기 인생을 살아야 행복합니다. 내 삶이 튼튼하면, 나아가 남친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이유섭, 2018: 124)라는 것이다.

상담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이 성공한다. 한 30대 여성은 매일 아침 "오늘 뭐 입을까?"라고 남편에게 묻던 습관을 바꿨다. 대신 스스로 옷을 고르고 "오늘 이거 어때?"라고 물어봤다. 작은 차이 같지만, 질문의 주체가 바뀐 거다. 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의견을 구하는 것으로.

또 다른 40대 남성은 "회사 일 어떻게 할까?"라고 아내에게 묻는 대신, 먼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상대방의 의견을 구하지만, 자신의 판단을 먼저 세우고 나서 하는 거다.

가장 중요한 건 작은 실패를 견디는 연습이다. 혼자 결정해서 잘못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패가 쌓여야 진짜 판단력이 생긴다. 누군가 대신 결정해준 성공보다 내가 직접 겪은 실패가 더 값지다.

의존의 달콤함을 완전히 끊기는 어렵다. 사람은 결국 서로 의존하며 사는 존재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의존의 방식이다. 떠넘기는 의존이 아니라 협력하는 의존. "당신이 알아서 해"가 아니라 "함께 고민해보자"는 자세. 그게 건강한 관계의 시작이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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