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외로워지자, 그게 내가 성장하는 방법이니까

by 홍종민

초가을 오후, 동네 도서관에서 이상한 장면을 봤다. 젊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끊임없이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었고, 중년들은 혼자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특히 한 40대 남성이 눈에 띄었다. 누군가 전화를 걸어와도 진동만 확인하고 다시 책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언제부터 연락을 안 받는 게 이렇게 당당해진 걸까?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40대가 넘으면 예전처럼 전화를 잘 안 받는다. 약속도 자주 미룬다. 모임에도 잘 안 나온다. 그런데 대부분 이유를 "바빠서"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유준상 배우가 예능 '짠한형'에서 한 고백을 들어보면 답이 나온다. "내 핸드폰에 연락처만 1,500명이 넘게 있었어. 그 정도로 사람 만나고 술 마시는 거 정말 좋아했거든. 근데 40대 중반부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술 한 잔 더 마시고 사람 한 명 더 만나면, 나에게 정말 중요한 걸 지킬 시간이 없겠다."


혼자 있는 시간을 지키는 사람들


도서관에서 본 그 40대 남성이 계속 궁금했다. 며칠 뒤 그 도서관에 다시 갔을 때, 그와 우연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요즘 자주 오시네요" 하고 말을 걸자 "네, 집에서는 집중이 안 돼서요. 여기가 좋더라고요" 하며 웃었다. 그런데 그때도 누군가 전화가 왔는데, 진동을 확인하더니 "죄송해요, 나중에 받아야겠어요" 하고 다시 책장으로 향했다.

"예전엔 전화 오면 무조건 받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달라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이상한 건, 이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당당했다. "사람들이 서운해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그랬는데, 정작 중요한 일 할 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제 시간을 지키기로 했어요" 하더라.

바로 그런 거다. 중년에 이르면 이런 변화가 생긴다.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보호하려는 욕구가 강해진다. 더 이상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이를 '생성감'이라고 불렀다. 중년기에 나타나는 특별한 심리 상태로,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지혜를 통해 진짜 가치 있는 것만 선별하게 되는 충동이다.

동네 마트에서 일하는 한 30대 여성 직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손님들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더니, 몇 달 뒤엔 "안녕하세요", 계산, "감사합니다"로 끝. 왜 그렇게 됐는지 물어봤더니 "제가 웃으며 이야기하느라 정작 아이 픽업 시간에 늦더라고요. 손님들은 집에 가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데, 저는 왜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싶었어요" 하더라. 그게 정답이다.


외로움을 선택했더니 생긴 일


유준상은 '짠한형'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너무 외로워. 근데, 신기하게 외로우니까 또 연기가 더 잘 되더라. 가족에게도 다정해지고 글도 쓰게 됐어. 그래서 어느 순간 다짐한 거지. 더 외로워지자. 그게 내가 성장하는 방법이니까." 그런데 이상한 건, 외로워졌다고 하는데 그의 표정은 외롭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충만해 보였다.

그런 이유일까.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다는 건.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면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해진다. 그때부터는 남들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다. 마트 직원이 한 말이 바로 그거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생각이 많아졌어요. 예전엔 그냥 살았는데, 이제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뭐지?' 하고 자꾸 물어보게 돼요."

자신의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그것에 집중하는 모습. 심리학자 매슬로가 말한 '자아실현'이 바로 이런 것이다. "처음엔 손님들이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했어요. 그런데 집에 가서 아이와 시간을 보낼 때, '아, 이게 맞구나' 싶더라고요. 진짜 중요한 건 여기 있구나."



40대가 알게 되는 것


도서관 남성이 마지막에 한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좋아졌어요. 예전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애썼는데, 지금은 정말 중요한 사람들에게만 집중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훨씬 깊어지더라고요." 바로 그런 거다.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통합하는 사람은 평화로워진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인정을 구하지 않는다. 에릭 에릭슨은 인생의 이 단계를 '자아통합'이라고 했다. 마트 직원도 같은 경험을 했다. "아이가 '엄마가 요즘 더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엔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은 걸 집에서 풀었는데, 지금은 직장에서 에너지를 아껴서 집에 와요. 그러니까 아이한테 더 집중할 수 있어요."

유준상이 '짠한형'에서 한 마지막 말이 모든 걸 설명한다. "더 외로워지자. 그게 내가 성장하는 방법이니까." 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혼자가 될 줄 안다는 것과 같다. 의미 없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띄우느라 가족에게 써야 할 에너지까지 낭비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애정 없는 사람들의 한마디는 그저 웃으며 넘긴다.

초가을 저녁 도서관에 다시 갔을 때, 그 40대 남성이 또 있었다.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고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표정에서 뭔가 다른 걸 발견했다. 외로움이 아니라 충만함이었다. 더 외로워질수록 더 풍성해지는 내면의 힘. 그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이전 03화동생만 사주고 나는 안 사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