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복사가 아니라 창조다

by 홍종민

어머니는 정말 날 미워했을까

오랜 친구가 모임에서 불쑥 말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나한테만 차가웠어. 동생한테는 늘 다정한데, 나한테는 무관심했지. 생각해보니 단 한 번도 날 제대로 안아준 적이 없더라."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정말 그랬을까? 그 차가움, 그 무관심, 정말 어머니의 진짜 모습이었을까?

우연한 기회에 그 친구의 어머니를 만났다. 70대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전혀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다.

"큰애가 워낙 예민해서 늘 조심스러웠어요. 작은 일에도 상처받곤 해서... 오히려 더 신경 썼는데, 부담스러워하더라고요."

같은 과거, 완전히 다른 기억.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아니다. 둘 다 자신의 기억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기억 자체의 속성에 있다.


글리아 세포의 비밀

권요셉은 『변화의 반복』에서 놀라운 사실을 밝힌다. "인간의 뇌에서 외부 정보를 수용할 때, 유실 정보들이 발생한다. 외부 정보를 100% 그대로 수용해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권요셉, 2024: 88).

빠짐없이 적용된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물 없이 사막을 건너는 게 불가능하듯, 우리 뇌도 정보 유실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빈틈은 어떻게 메워질까?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는 순간, 실은 뇌 속 특별한 세포가 현재의 감정과 과거의 조각을 섞어 새로운 이야기를 짜내는 것이다. 깨진 자리를 금으로 메운 도자기처럼, 기억의 빈틈은 현재의 욕망과 상처로 채워진다.


압축, 전치, 상징 -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

상담실에 온 40대 남성이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날 단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어요. 늘 실망한 표정뿐이었죠."

나: "정말 한 번도요?"

그: "네, 절대로." (단호한 목소리)

나: "학교에서 상 받았을 때도?"

그: "아... 그때는..." (머뭇거리며) "그래도 표정이 싸늘했어요."

바로 이 지점에서 압축이 일어난다. 아버지의 수많은 표정이 '싸늘함' 하나로 압축된다. 천 장의 사진을 한 장으로 겹친 것처럼.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발견한 메커니즘이 여기 있다. 압축(condensation), 전치(displacement), 상징화(symbolization). 꿈뿐만이 아니다. 일상의 기억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압축은 수많은 정보를 하나로 뭉치는 작업이다. "엄마는 항상 바빴다"는 기억 속에 수백 번의 만남이 녹아있다. 분명 바쁘지 않았던 날도 있었을 텐데.

전치는 감정을 다른 대상으로 옮기는 것이다. 한 내담자는 "선생님이 날 싫어했다"고 기억했다. 파고들어보니 그 시기 부모 이혼의 상처가 선생님께 투사된 것이었다.

상징화는 구체적 사건을 추상적 의미로 전환하는 것이다. "나는 영원히 혼자다"라고 말하는 사람. 실제론 가족과 친구가 있었지만, 몇 번의 외로움이 '영원한 고독'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기억 너머의 진실을 찾는 일

정신분석에서 기억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더 정확히는, 기억에 덧씌워진 환상과 욕망이 핵심이다.

내담자가 "어머니가 나를 버렸다"고 말할 때, 나는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그 순간 당신이 진짜로 느낀 건 무엇이었나요?"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것처럼, 내담자의 마음에 닿으려면 기억의 구조를 봐야 한다. 어떻게 압축했는지, 어디로 옮겼는지, 무엇으로 상징화했는지.

한 20대가 찾아왔다. 대학 때 교수가 자신만 무시했다는 기억에 시달리고 있었다.

"발표할 때마다 한숨 쉬셨어요. 다른 학생들 때는 고개 끄덕이시는데, 제 차례만 되면..."

우리는 그 '한숨'을 한 시간 동안 탐색했다. 결국 그 한숨은 교수의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 중학교 담임, 그리고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한숨이 모두 포개진 것이었다.

"아버지가 성적표 볼 때마다 그런 한숨을 쉬셨거든요."

압축이었다. 10년의 한숨이 교수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각인된 것이다.


현재가 과거를 재창조한다

50대 여성이 이혼을 결심하고 왔다.

"처음부터 사랑이 없었어요. 신혼여행도, 출산도, 전부 혼자였죠."

그런데 상담이 진행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남편과의 관계가 회복되자 과거 기억이 변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신혼여행 때 제가 아파서 남편이 밤새 돌봐줬네요. 그걸 어떻게 잊었을까요?"

기억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다. 현재의 감정이 끊임없이 과거를 다시 쓴다. 행복한 사람은 과거도 밝게, 불행한 사람은 과거도 어둡게 칠한다.

권요셉이 말한 대로다. "새로 들어오는 정보들의 유실 공백을 글리아라는 세포가 과거 기억 작용을 중심으로 메꾸며 기억 단위를 구성한다. 기억은 복사가 아니라 창조라는 의미이다"(권요셉, 2024: 88).

복사가 아니라 창조. 이게 본질이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노부부가 "우리가 언제 그리 사랑했나"며 웃는 것도, 법정에서 "애초에 틀린 만남"이라 주장하는 것도.


창조와 망상의 경계

글리아 세포는 창의력, 망상, 해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기억을 '창조'하는 세포가 창의력과 이어진다니, 당연하다. 예술가가 과거를 재해석해 작품을 빚듯, 우리 모두 과거를 재창조하며 산다.

하지만 때로 이 창조가 과잉된다. 망상이 되고, 해리가 된다. 없던 일을 있었다고 믿거나, 있던 일을 완전히 뒤틀어 기억한다.

한 30대는 부모가 자신을 학대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형제들의 기억은 달랐다. 같은 집, 같은 부모, 전혀 다른 기억.

"형은 화목했다는데, 제겐 지옥이었어요."

누가 옳을까? 둘 다 옳다. 각자의 글리아가 다르게 빈자리를 채웠을 뿐.


분석가의 역할, 과녁을 맞추는 일

그렇다면 분석가는 무엇을 해야 하나?

기억의 압축 파일을 푸는 것이다. 내담자가 가져온 기억 덩어리를 풀어서, 어떤 욕망이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살핀다.

"그 장면에서 진짜 중요했던 건 무엇인가요?"

이 질문이 과녁의 정중앙을 겨냥한다. 기억의 내용이 아니라, 왜 지금 그렇게 재구성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 아니다. 정신분석은 고고학이 아니다. 과거를 파내는 게 아니라, 건축가처럼 내담자가 과거를 어떻게 설계하는지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다.


당신의 기억도 다르지 않다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과거가 있을 것이다. 상처, 버림, 혹은 행복했던 순간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당신의 글리아 세포는 지금도 부지런히 일한다. 과거의 공백을 현재의 감정으로 메우고, 새 기억을 빚어낸다.

그러니 기억을 붙들고 "이게 진실"이라 고집하지 말자. 대신 물어보자.

"왜 이렇게 기억하는가?" "이 기억이 내게 전하는 건 무엇인가?" "지금의 내가 과거를 어떻게 재편집하고 있는가?"

그 질문이 문을 연다. 기억의 환상을 걷어내고, 진짜 욕망과 대면하는 문을.

확실한 건 하나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쓰며 산다. 과거라는 소재로, 현재라는 붓으로, 미래라는 캔버스에.

그 이야기의 작가는 당신이다. 과거가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고, 그것이 현실이다.


권요셉(2025). 변화의 반복. 샘솟는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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