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간월암의 비밀:무학대사의 달빛 깨달음을 해석하다!
낙조는 하루의 끝자락을 알리는 동시에, 마음속 소란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바다에 비친 석양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태양이 지면서 만들어내는 붉은 빛은 인간의 분노와 욕망을 서서히 식혀주니, 이보다 더 좋은 명약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낙조와 수중월(水中月)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곧 신비체험(神秘體驗)” 이라고
조용헌 선생은 『영지순례』간월암편에서 말했다
나는 이를 검증하기 위해 간월암(看月庵)에 세 번이나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마다 퇴직 후 내 안에 남아 있던 분노가 사그라드는 묘한 경험을 했다. **"낙조가 분노를 삭이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 셈이다.
낙조가 그렇다면 수중월은 또 어떤가? 조용헌 선생은 『영지순례: 간월암』에서 **"일몰관과 짝을 이루는 것이 수중월"**이라 했다(조용헌, 2020: 150). 그리고 수중월을 감상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간월암이라는 것이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의 고승(高僧)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간월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깨달음은 하늘의 달을 보며 얻는 것이 아니라, 그 달빛이 바다에 반사된 월인천강(月印千江)—즉, 수천 갈래의 물결 위에서 반짝이는 달빛을 통해 얻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조건이 있다. 보름달이 떠야 하고, 날씨가 맑아야 하며, 간월암 앞바다의 물때가 맞아야 한다. 즉, 인연(因緣)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장면이라는 뜻이다.
작년에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모든 조건이 맞았지만, 새벽에 나설 타이밍에 졸려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정월 대보름, 드디어 간월암을 찾았다.
새벽 6시, 간월암 앞바다. 나는 수중월의 변화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바다에 비친 달빛이 춤을 추듯 출렁이며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인공 등대 불빛과는 차원이 다른 빛이었다. 태양이 반사된 달빛은 압도적인 자연광(自然光)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시간대별로 달빛의 춤은 다르게 보였다. 어떤 순간에는 3D 입체 영상을 보는 듯했고, 어떤 순간에는 마치 달빛이 물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아, 이것이 바로 **조용헌 선생이 말한 ‘신비체험’**이구나! 그리고 무학대사의 깨달음이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구나!
(그날 찍은 이 사진을 < 용 > 이라 명명했다.)
간월암에서 기(氣)가 가장 강한 곳은 **산신각(山神閣)**이라고 한다. 이는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산신각은 본래 산신을 모시는 곳으로, 인간의 기도와 자연의 정기가 만나는 지점이다. 유난히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흐름이 있다.
특히 산신각에서 바라본 수중월(水中月)—즉, 물 위에 비친 달의 형상—이 용(龍)을 연상케 하는 모양이었다면, 이는 단순한 착시가 아니라 기(氣)의 흐름이 그곳에서 응축되어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용은 동양에서 물과 구름을 다스리는 신령한 존재이며, 기운이 강한 곳에서 그 형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실, 한국의 명찰(名刹)이나 기도처를 가보면 산신각은 늘 터의 정기가 집중된 곳에 자리한다. 기(氣)의 흐름을 잘 아는 이들은 기도를 할 때도 산신각을 찾는다. 이는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검증된 것이다.
간월암은 본디 바닷속 암자인 만큼, 물과 달, 그리고 기운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산신각에서 바라본 수중월이 용의 형상을 이루었다는 것은, 간월암이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기운이 모이는 장소’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기가 응축된 곳에서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제 다시 생각해보자. 그날 밤, 물 위에 비친 달이 용의 형상으로 나타난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어쩌면 간월암의 산신각이 가진 특별한 기운이 그 순간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필자는 이것이 단순한 착시가 아닌, 공간이 지닌 기운의 발현이라고 믿고 싶다.
(그날 찍은 이 사진을 < 수월관음도 > 라 명명했다.)
불가(佛家)의 대표적 그림 중 하나인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조용헌 선생은 **"이 그림이 간월암 앞바다의 풍광을 묘사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조용헌, 2020: 150). 나 역시 그 의견에 공감한다.
어느 도공(陶工)이 간월암의 수중월을 보고, 그것을 요즘식으로 부처의 추상화로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부처의 여타 탱화와 달리, 수월관음도의 느낌은 전혀 다른 맥을 타고 있다. 그 아름다움은 서양 미술계에서도 극찬할 정도다. 아마도 도공이 본 것은 부처가 아니라 수중월 이었고, 그 경이로운 풍경을 부처로 환유(換喩)한 것이 아닐까.
깨달음이란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낙조와 수중월을 보며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하나 되는 그 순간 그것이 바로 깨달음 아니겠는가.
1) 왜 신비 체험이 필요한가?
그것은 바로 무의식의 자원을 끌어다 쓰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영감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영감이 깃들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힐링이 찾아온다.
각자 가슴에 품고 있는 소망이든, 해결되지 않은 근심이든, 수중월(水中月)이 춤추는 빛을 바라보노라면
그 모든 것이 스며들 듯 흡수되고, 새롭게 리메이크된 형태로 몸과 마음이 재정렬된다. 기가 흐트러진 사람은 기를 바로잡고,길을 잃은 사람은 방향을 찾으며,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은 다시 깨닫는다.
그것이 바로 신비 체험의 힘이요, 무의식의 자원을 다시 끌어오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2) 신비체험은 스포츠,문화예술 관람해도 일어난다
신비체험이라는 것은 무의식의 자원을 끌어오는 일이다. 그런데 그 자원을 꺼내려면 일종의 출입키가 필요하다. 이 출입키가 바로 몽상(夢想) 상태다. 쉽게 말해 최면 상태다. 최면학에서는 이를 '트랜스(Trance)'라고 부른다.
트랜스는 어떤 특정한 기법을 써야만 들어가는 게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트랜스 상태에 놓여 있다. 현대 최면학에서도 이를 강조한다. 우리가 깊이 몰입한 순간, 그 순간 자체가 트랜스인 것이다. 정식 최면 세션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는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깨어있는 순간조차 끊임없이 트랜스 상태를 오간다. 정신분석학에서 윌프레드 비온(Wilfred Bion)이 말한 꿈 사고(Dream Thinking) 이론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이 트랜스를 경험하는가?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 클래식을 즐기는 사람, 미술 전시를 찾아다니는 사람. 저마다의 취향이 다르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동일시(同一視, Identification)라고 부른다.
야구장을 찾은 사람이 꼭 야구 기술을 배우려는 것은 아니다. 공을 주고받고, 뛰고, 환호하는 장면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연결된 기억들이 튀어오른다. 내면의 무의식 창이 열리는 순간이다. 이때 튀어나오는 자원은 사람마다 다르다. 성격과 기질, 자라온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발현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스포츠 선수의 ‘기(氣)’를 현장에서 내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동일시의 힘이다.
이것은 스포츠뿐만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고 해서 단순히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공연장에서 지휘자를 보며 동일시할 수도 있고, 바이올린 연주자와 동일시할 수도 있다. 공연장에서의 경험이 단순한 청각적 향유를 넘어선다는 말이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보면, 음악 자체는 조연이고, 연주자와 동일시하는 것이 주연이다. 연주자를 통해 무의식이 열린다.
조용헌 선생은 영지론(靈地論)을 주장하며 우리를 산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도시에서 사는 현대인에게 산은 그리 쉽게 오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기(氣)를 충전할 것인가? 답은 스포츠와 문화예술 속에 있다. 이러한 활동이 바로 현대적 형태장의 역할을 한다.
물론 TV를 통해서도 스포츠나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기의 품질은 떨어진다. 방구석에서 접하는 기는 현장에서 직접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진짜 기를 충전하려면 직접 몸을 움직여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공원에서 산책을 하든, 경기장을 찾든, 공연장을 가든. 중요한 것은 무의식이 열리는 순간을 경험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