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돌이 하는 남자 노인

by 홍종민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이상한 질문이다. 내가 하는 말을 내가 모를 리 있나. '오늘 피곤해'라고 말했으면 피곤하다는 뜻이고, '배고파'라고 말했으면 배고프다는 뜻이다. 뭐가 어렵다는 건가.


하지만 잠깐. 당신이 어제 한 말 중에 '아,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싶은 게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말하고 나서 후회한 말. 그 자리에서 바로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라고 해명해야 했던 말. 분명 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 내가 하려던 말이 아닌 것 같은 그런 말.


정신분석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당신이 '말하려고 했던 것'과 당신이 '실제로 말한 것'은 다르다. 그리고 정신분석이 주목하는 건 후자다. 브루스 핑크라는 정신분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 '실제로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도한 바란 그저 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핑크, 2021: 54)


무슨 말인가. 당신이 '나는 이런 말을 하려고 했어'라고 할 때, 그건 당신이 의식적으로 계획한 말이다.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맞는 말이다. 착한 사람, 합리적인 사람, 배려 깊은 사람. 그 이미지에 어울리는 말. 문제는, 당신 안에는 그 이미지에 맞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거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망, 숨기고 싶은 분노, 의식하지 못하는 두려움. 이런 것들은 당신의 '의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어디로 가는가. 말실수로, 엉뚱한 단어 선택으로, 이상한 꿈의 장면으로 튀어나온다. 그래서 핑크는 이렇게 덧붙인다.


“당신이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당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이미지, 즉 자기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어떤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핑크, 2021: 54)


다시 말해, 당신의 '의도'는 당신의 자기-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은 그 이미지에 별 관심이 없다. 무의식은 당신이 공들여 쌓아올린 자기-이미지의 틈새로 불쑥 튀어나온다.


곰이 참치가 되는 꿈


일본의 한 정신분석가가 여성 환자의 꿈을 분석한 사례가 있다. 꿈 내용은 이렇다.


바다 같은 곳에 커다란 검은 곰이 있었다. 무서워서 칼을 휘둘렀더니 곰의 눈가에 칼이 꽂혔다. 그러자 곰이 물에 빠지면서 참치로 변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찹쌀떡을 구웠는데, 너무 타서 먹을 수 없었다.(아카사카, 2025: 107).


이상한 꿈이다. 곰이 참치로 변하다니. 그리고 그게 타버린 떡과 무슨 상관인가. 보통은 이런 꿈을 꾸면 '곰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칼은 뭘 의미하는 걸까?'라고 묻는다. 꿈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의미가 아니라 '소리'에 주목한다.


일본어로 곰은 '쿠마(クマ)'다. 이 글자를 뒤집으면 '마쿠(マク)'가 된다. 여기에 검정을 뜻하는 '쿠로(クロ)'를 합치면? '마구로(マグロ)'. 참치다. 그리고 참치의 진한 검정 이미지가 타버린 떡으로 남아 있다.(아카사카, 2025: 108).


이게 말이 되는가. 논리적으로는 전혀 안 된다. 하지만 무의식은 논리적이지 않다. 무의식은 소리로 작동한다. 비슷한 발음, 글자의 재배열, 말장난 같은 것들. 무의식은 이런 언어적 연결고리를 타고 움직인다.


이걸 이해하면, 꿈이 달리 보인다. 꿈에서 곰이 참치로 변한 건 '의미'의 연결이 아니라 '소리'의 연결이다. 쿠마 → 마쿠 → 마구로. 그리고 마구로(참치)의 '검정' 이미지가 '타버린 떡'으로 이어진다. 무의식은 의미가 아니라 소리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곰이나 참치가 '무엇을 상징하는가'가 아니다. 중요한 건 무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다. 당신이 어떤 단어를 선택했을 때, 그 선택에는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종종 의미가 아니라 소리에 있다.


모서리가 무서운 아이


더 놀라운 사례가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돌토(Dolto)가 다룬 여덟 살짜리 남자아이 질(Gilles)의 이야기다.


질에게는 두 가지 증상이 있었다. 하나는 오줌을 지리는 것. 또 하나는 벽이나 가구의 모서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 얼핏 보면 이 두 증상은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인다. 오줌과 모서리가 무슨 상관인가.


질의 배경은 이렇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에서 사고를 당했고, 수영을 배우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도 있었다. 두 번 다 아버지와 함께였다. 이후 질은 어머니에게 늘 달라붙어 있게 된다.(아카사카, 2025: 108).


그런데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세 살 때, 큰외삼촌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외삼촌은 런던에서 드골 장군에 합류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위험한 결정이었다. 어머니는 불안해했고, 아들이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아카사카, 2025: 108).


여기서 마법이 일어난다.


프랑스어로 영국은 'Angleterre(앙글테르)'다. 이 단어를 쪼개면?


angle(모서리) + taire(말하지 않다) = Angleterre(영국)


돌토의 분석은 이렇다. 어머니가 '말하지 말라(taire)'고 원했던 '영국(Angleterre)'이라는 단어가, 질에게는 '모서리(angle)'라는 형태로 되돌아온 것이다. 억압된 것이 증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아카사카, 2025: 109).


다시 정리하면, Angleterre(잉글랜드) = angle(모서리) + taire(말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불안, 비밀, 금지된 말이 아이에게 '모서리에 대한 공포'라는 형태로 새겨진 것이다.


이게 시니피앙의 논리다. 시니피앙이란 뭔가. 쉽게 말하면, 언어의 '소리와 글자' 그 자체다. 의미가 아니라 소리. 질은 '영국'이라는 단어의 의미 때문에 고통받은 게 아니다. 그 단어의 소리, 그 단어를 둘러싼 감정적 분위기, 어머니의 불안이 '모서리'라는 소리로 그의 몸에 새겨진 것이다.


왜 우리는 자신의 말을 모르는가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우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가. 왜 무의식은 말실수나 꿈을 통해 '몰래' 튀어나와야 하는가.


핑크는 이것을 '에고'의 문제로 설명한다. 에고란 뭔가. 쉽게 말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미지다. 좋은 사람, 합리적인 사람, 성실한 사람. 이런 자기-이미지.


문제는 이 에고가 자기 이미지에 맞지 않는 것들을 전부 배척한다는 것이다. 핑크는 이렇게 말한다.


“에고는 우리가 이질적이라고 판단하는 모든 것을, 즉 실수 행위를 통해 새어나오는 모든 사고나 욕망을 배제해 버리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 (핑크, 2021: 55)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스스로를 '효도하는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당신의 에고는 즉시 이 생각을 배척한다.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건 내 생각이 아니야.'


하지만 그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말실수로 튀어나온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묶여 있어야 하나...'라는 말에서 '묶여 있다'라는 표현을 선택하는 식으로.


바로 여기서 이유섭 교수의 통찰이 날카롭게 들어온다. 말실수, 건망증, 여러 실수행위 등 무의식의 표출물을 통해서만 분석가는 내담자가 말하는 목적과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포착하지 못하면, 억압은 다른 것들로 대체될 뿐이다. 말이 부족하면 글로서, 글이 부족하면 말로서 그 간극과 결여를 채우려 할 뿐이다. (이유섭, 2025: 113)


그래서 라캉은 '의미는 상상적'이라고 말했다.(핑크, 2021: 54) 이 말이 뜻하는 건, 우리가 의식적으로 파악하는

의미는 자기-이미지에 맞춰진 것일 뿐이라는 거다. 진짜 의미, 무의식의 의미는 그 틈새로 새어나온다.


과거는 지금 결정된다 — 사후작용의 논리


무의식이 소리로 말하고, 에고가 그것을 숨긴다면 — 그 억압된 것들은 언제 어떻게 증상이 되는가.


맹정현은 이렇게 말한다.


“트라우마라고 명명될 수 있는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는 것은 소급적인 효과에 의해서다. 하나의 사건이 사후적으로, 나중에 그 의미가 결정된다.” (맹정현, 2015: 42)


과거의 사건이 처음부터 상처였던 게 아니다. 나중의 사건이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비로소 상처가 된다. 현재가 과거를 만든다. 이것이 사후작용(Nachträglichkeit)이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엠마의 사례. 어린 시절 상점에서 주인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상점에 다시 가기도 했다. 그런데 십 대가 되어 점원에게 성적인 조롱을 당했을 때, 과거 장면이 되살아오며 공포로 변했다. 상점에 혼자 들어가지 못하게 됐다. 장면 2가 장면 1을 성추행 장면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이 비로소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맹정현, 2015: 43-45)


이게 왜 중요한가. 과거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 지금 어떤 사건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과거의 의미가 달라진다. 과거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그 말은 이런 뜻이기도 하다. 오늘 당신이 선택한 단어가 당신의 어제를 다시 쓴다. 말실수 하나가 과거를 재배치한다. 현재의 말이 역사를 바꾼다.


말은 기록이 아니다. 말은 사건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시니피앙: 탑돌이 하는 노인


계룡산 갑사에서 흥미로운 남자 노인을 만났다. 일주일에 한 번, 석 달을 다니는 동안 그 노인은 늘 같은 곳에 있었다. 여름 한낮, 대웅전 앞에서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왜 흥미로운가 지금까지 사찰에서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대웅전 벤치에서 30분 정도 있는 동안 계속이었다. 어느 날은 용문폭포 전망대에서 봤다. 그 비좁은 공간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석 달 내내, 갈 때마다, 그 노인은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독실한 불자려니 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탑돌이를 하는 표정이 평화롭지 않았다. 기도하는 사람의 고요함이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혹은 무언가를 쫓는 사람처럼, 그 노인은 멈추지 못했다. 여름 땡볕 아래서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그는 돌고 또 돌았다.


왜 그랬을까. 시니피앙의 논리로 들여다보자.


갑사(甲寺) — 갑갑함의 소리


먼저 장소를 보자. '갑사(甲寺)'. 이 이름에는 '갑(甲)'이 들어 있다. 갑은 천간의 첫째다. 시작, 으뜸, 첫 번째. 그리고 '갑'은 '갑갑하다'의 '갑'과도 소리가 같다. 숨이 막히는 느낌, 답답한 느낌, 빠져나갈 수 없는 느낌.


노인은 왜 하필 '갑사'를 선택했을까. 계룡산에는 절이 많다. 동학사도 있고, 신원사도 있다. 그런데 왜 갑사인가. 무의식은 우연을 가장한다. 노인의 발걸음을 '갑사'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언가 '첫 번째'인 것, '으뜸'인 것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첫째 아들, 첫 번째 사랑, 첫 번째 실패. 아니면 '갑갑한' 무언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가슴을 짓누르는 무언가, 숨을 쉴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


탑(塔) — 돌다, 돌아가다, 죽음


다음으로 행위를 보자. '탑돌이'. 탑을 도는 행위다. 불교에서는 공덕을 쌓는 수행이다. 하지만 시니피앙의 관점에서 '돌다'라는 말을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돌다'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원을 그리며 움직이다. 제자리를 맴돌다. 하지만 '돌다'는 '미치다'라는 뜻도 있다. '저 사람 돌았어.'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났다는 뜻. 그리고 '돌다'는 '돌아가다'와도 연결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 돌아가다. 어디로? 왔던 곳으로. 태어나기 전의 상태로.


노인은 탑을 '돌면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무의식은 이 소리의 연결을 알고 있다.


돌다 → 돌아가다 → 죽음


어쩌면 노인은 누군가의 죽음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떠나보낸 사람, 잊지 못하는 사람, 보내줄 수 없는 사람. 그 사람 주위를 빙빙 돌면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탑돌이는 보통 시계 방향으로 돈다. 오른쪽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 하지만 노인의 탑돌이가 진정한 전진이었을까. 아니면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이었을까. 앞으로 가는 것 같지만 실은 제자리인 것. 시간은 흐르지만 마음은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 노인은 탑을 돌면서 시간을 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돌아가신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탑'이라는 글자를 뒤집어보라. '팥'이 된다. 팥. 팥죽. 동지팥죽.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가장 어두운 날. 동지팥죽은 귀신을 쫓고 죽은 자의 혼을 달래는 음식이다. 노인은 탑을 돌면서 팥죽을 끓이듯 죽은 자를 달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용문폭포(龍門瀑布) — 통과하지 못하는 문


용문폭포에서의 행동은 더 흥미롭다. '용문(龍門)'. 용이 오르는 문이다. 등용문의 그 용문. 잉어가 용문을 뛰어 넘으면 용이 된다는 전설. 좁은 곳을 통과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 출세, 성공, 변화, 도약.


그런데 노인은 그 '문' 앞에서 왔다 갔다만 하고 있었다. 통과하지 못하고. 뛰어넘지 못하고.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고. 그 '비좁은 공간'에 갇혀서. 전망대라는 공간도 의미심장하다. 전망대는 '바라보는' 곳이다.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밖을 내다보는 곳. 노인은 무언가를 바라보고만 있었던 건 아닐까. 들어갈 수 없는 곳을. 닿을 수 없는 곳을. 돌아갈 수 없는 곳을.


'폭포'도 들여다보자. 폭포는 물이 떨어지는 곳이다. 위에서 아래로. 거꾸로 올라갈 수 없는 곳. '떨어지다'는 실패를 뜻하기도 한다. '시험에 떨어졌다.' '기대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폭포 소리는 모든 것을 삼킨다. 그 앞에 서면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조차 들리지 않는다.


노인은 어쩌면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폭포 앞에 서 있었던 건 아닐까.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는 목소리, 떠나간 사람의 목소리, 혹은 자신을 탓하는 목소리. 그 소리를 폭포 소리로 덮으려 했던 건 아닐까.


더 깊이 내려가보자


여기서 멈출 수도 있다. 하지만 시니피앙 해석에는 깊이가 있다. 문장 수준, 단어 수준, 문자 수준, 음소 수준. 사다리를 한 칸씩 내려갈수록 무의식의 더 깊은 층이 드러난다. 갑사 노인에게 그 사다리를 적용해보자.


더 내려가보자. '탑돌이'를 음소 단위로 쪼개면 '타'와 'ㅂ'이 나온다. '타다'. 불에 타다. 화장. '밟다'. 발로 밟다. 짓밟다. 무언가를 태우면서 밟고 있는 것. 떠나보내야 하는데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 노인은 자신만의 화장 의식을 치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대웅전도 들여다보자. 대웅(大雄). 큰 웅. 위대한 영웅. 그런데 '웅'은 '곰 웅(熊)'이기도 하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봄에 깨어나는 동물. '웅'의 소리를 따라가면 '움'이 나온다. 움직이다. 웅크리다. 대웅전 앞에서 도는 것. 떠나간 '큰 남자' 주위를 서성이는 것. 곰처럼 겨울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 하지만 죽은 자는 깨어나지 않는다.


계룡산은 어떤가. 계룡. 닭과 용. 닭은 새벽을 알리고, 용은 승천한다. 그런데 노인은 날아오르지 못했다. 용문 앞에서 왔다 갔다만 했다. '계'의 소리를 따라가면 '계속'이 나온다. '룡'의 소리를 따라가면 '용서'가 나온다. 계룡산.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는 산. 노인은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나.


종합: 노인이 쓴 문장


종합해보면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노인은 무언가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용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듯이. 누군가의 죽음을 '돌아가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주위를 계속 '돌고' 있다. '갑갑한' 무언가에 갇혀서. 그 갑갑함을 풀기 위해 '갑사'를 찾지만, 정작 풀리는 건 없다. 폭포 앞에 서서 내면의 소리를 지우려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또 돈다. 또 왔다 갔다 한다. 석 달 동안. 아마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갑사(甲寺)에서 갑갑함을 풀려 하고, 대웅전(大雄殿)에서 큰 남자를 기다리며, 탑(塔)을 돌면서 죽은 자를 태우고(타) 달래고(팥), 계룡산(鷄龍山)에서 계속 용서를 구하고, 용문폭포(龍門瀑布) 전망대에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하나의 장소가 아니다. 하나의 문장이다. 노인의 무의식이 쓴 문장. 노인 자신도 읽지 못하는 문장.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그 문장을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나는 왜 거기 있었는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보자. 나는 왜 그 노인을 '봤'을까.


석 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여름 땡볕에 계룡산 갑사를 다녔다. 그것도 강박적 반복 아닌가. 노인만 돌고 있었던 게 아니다. 나도 돌고 있었다. 노인은 탑을 돌았고, 나는 갑사를 돌았다. 노인은 용문폭포 전망대를 왔다 갔다 했고, 나는 청주에서 계룡산을 왔다 갔다 했다.


왜 하필 '갑사'였을까. 나도 '갑갑한'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 숨이 막히는 무언가, 빠져나갈 수 없는 무언가. 그것을 풀기 위해 '갑사'를 찾았던 건 아닐까.


왜 하필 '여름'이었을까. 여름은 가장 뜨거운 계절이다. 모든 것이 극에 달하는 시간.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식히고 싶은 무언가, 태워버리고 싶은 무언가.


그리고 왜 나는 그 노인이 '보였'을까. 갑사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스님들, 관광객들, 등산객들. 그런데 왜 하필 그 노인만 눈에 들어왔을까. 석 달 동안, 갈 때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밖에서 본다. 내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 노인이 내 눈에 들어왔다는 건, 그 노인 안에서 나 자신의 무언가를 봤다는 뜻이다.


나에게도 사다리를 내려보자


노인에게 적용한 시니피앙의 사다리를 나에게도 적용해보자. 공평하게.


'청주(清州)'를 쪼개보자. 청(清). 맑을 청. 깨끗하다. 씻어내다. 주(州). 고을. 머무는 곳. 청주에서 갑사로 간다는 건, '맑은 곳'에서 '갑갑한 곳'으로 간다는 뜻인가. 아니면 '맑아지기 위해' '갑갑한 곳'을 찾는다는 뜻인가.


'청'의 소리를 따라가보자. 청소. 씻어내는 것. 청산. 끝내는 것, 정리하는 것. 청춘. 푸른 봄, 젊음, 지나간 시간. 나는 무언가를 청소하려 했던 건가. 청산하려 했던 건가. 청춘을 찾으려 했던 건가.


'계룡산'도 다시 보자. 앞서 노인에게는 '계속 용서를 구하는 산'이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계'의 다른 소리들. 계획. 앞으로의 일. 계시. 신이 알려주는 것. 계단. 한 칸씩 올라가는 것.


나는 계룡산에서 '계시'를 받으려 했던 건가. 어떤 '계획'을 세우려 했던 건가. 아니면 어떤 '계단'을 오르려 했던 건가.


'여름'을 쪼개보자. 여름. 뜨거운 계절. '열'과 소리가 닿아 있다. 열기. 뜨거움. 열정. 타오르는 것. 열리다. 문이 열리다. 닫혔던 것이 열리다.


나는 여름에 무언가를 '열'려고 했던 건가. 닫혀 있던 문을. 아니면 '열'에 타들어가고 있었던 건가.


'여름'의 다른 소리. 여. 나, 자신. 름. 흐름, 리듬. 여-름. 나의 흐름. 나의 리듬. 나는 내 흐름을 찾으려 했던 건가. 잃어버린 리듬을.


벤치에 앉아 새소리를 듣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쉬고 있었다. 그런데 벤치에 앉는다는 건 무엇인가. 걷지 않고 멈추는 것이다. 가지 않는 것이다.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새소리를 들었다. 새는 날아다니는 존재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 그런데 나는 갈 수 없었던 건가. 어딘가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벤치에 묶여 있었던 건가.


바람 소리를 들었다. 바람은 방향이 없다. 아니, 방향이 있지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바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 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방향을 잃은 건가. 아니면 방향을 찾고 있었던 건가.


쉰다는 것. 쉬다의 소리를 따라가보자. 쉽다. 어렵지 않다. 쉬어가다. 멈추었다가 다시 가다. 숨을 쉬다. 살아있다. 나는 그 벤치에서 숨을 쉬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숨을 고르고 있었던 건가. 다시 가기 위해서.


여름(夏)


열과 소리가 닿아 있다. 열기. 뜨거움. 열정. 타오르는 것. 그리고 열리다. 문이 열리다. 닫혔던 것이 열리다. 나는 여름에 무언가를 열려고 했던 건가. 닫혀 있던 문을.


여름의 다른 소리. 여. 나, 자신. 름. 흐름, 리듬. 여름. 나의 흐름. 나의 리듬. 잃어버린 리듬을 찾으러 갔던 건가.


종합: 나의 문장


노인의 무의식이 쓴 문장이 있었다면, 나의 무의식도 문장을 쓰고 있었다.


청주(清州)에서 맑아지려 하고, 계룡산(鷄龍山)에서 계시를 구하고, 갑사(甲寺)에서 갑갑함을 풀려 하고, 여름의 열(熱)로 무언가를 열(開)려 하고, 벤치에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날아가지 못하면서, 바람 소리로 방향을 찾고 있었다.

나는 노인을 관찰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은 노인을 통해 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 노인의 강박적 반복이 이상하게 보였던 건, 내 안에도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증상이 눈에 거슬릴 때, 그건 종종 내 안에 같은 증상이 있다는 신호다.


라캉은 말했다. 우리는 타자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본다. 내가 그 노인을 '본' 것은, 내가 나 자신을 본 것이다. 갑사에서 탑을 도는 노인은 내 무의식의 거울이었다.


그래서 질문이 바뀐다. 그 노인은 왜 돌고 있었을까, 가 아니라 — 나는 왜 돌고 있었을까. 나는 무엇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벤치에 앉아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채워 넣고 있었는가.


시니피앙 연쇄는 노인에게만 작동하는 게 아니다. 그 노인을 '보는' 나에게도 작동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관찰할 때, 우리는 동시에 관찰당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무의식에 의해.


그러니 누군가의 말을 듣고 분석하려 할 때, 먼저 물어야 한다. 왜 나는 이 사람의 말이 '들리는' 걸까. 왜 이 사람의 행동이 '보이는' 걸까. 거기에 내 무의식이 반응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상대방을 분석하는 순간, 나도 분석당하고 있다. 시니피앙의 사다리는 양방향으로 작동한다.


듣기의 새로운 차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시니피앙에 주목하는 건 '다르게 듣는' 것이다. 상대방이 '전달하려는 의미'만 듣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선택한 단어'에 주목하는 것.


핑크는 이런 듣기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의미는 결코 투명한 것이 아니다. 분석가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가정해서라도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핑크, 2021: 51)


라캉의 제자 미셸 실베스트르는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


“환자가 더 상세히 말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분석가는 무식해 보이는 척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핑크, 2021: 51)


이건 일상 대화에도 적용된다. 상대방의 말을 너무 빨리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게 무슨 뜻이야?'라고 물어라. '왜 그 단어를 썼어?'라고 물어라. 어리석어 보일까 봐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그 '어리석음'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 많은 말을 하게 만든다.


물론 매번 이렇게 들을 수는 없다. 일상의 모든 대화에서 시니피앙을 분석하며 들으면 지친다. 하지만 중요한 대화, 깊은 대화를 나눌 때만큼은 이런 자세가 도움이 된다. 상대방이 정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왜 그 단어를 선택했는지에 주목하는 것.

그리고 그때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환자가 진정으로 분석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그가 자신의 말에 대해 의문을 던질 때다. 이제 그는 무의식에 주목하게 되고, 자신을 통해 말하고 있는 또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핑크, 2021: 55)


말실수는 예언이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점을 하나 더 짚어보자. 시니피앙은 '연쇄'하고 '응집'한다. 하나의 말실수는 고립된 실수가 아니라, 무의식이 향하고 있는 방향의 징후다. 그리고 이후의 사건이 그 징후를 예언으로 완성한다. 사후작용의 논리가 여기서도 작동한다. 말실수나 엉뚱한 단어 선택은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의식되지 않은 욕망이 언어의 틈새로 삐져나온 것이다. 변화의 씨앗이다. 예언이다.


그러니 말실수를 무시하지 마라. 당신의 말실수에 주목하라. 당신이 왜 그 단어를 선택했는지, 왜 그 순간 말을 더듬었는지 물어보라. 거기에 당신이 알지 못하는 당신 자신의 욕망이 있다. 당신의 무의식은 이미 당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고 있다. 다만 아직 의식이 따라잡지 못했을 뿐이다. 말실수는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신호다. 그 신호를 알아차리면, 변화가 시작된다.


말은 당신을 배신하고, 그것이 당신을 구한다


해담 사주 명리 상담 : 네이버 엑스퍼트


참고문헌

이유섭(2025). 『프로이트.라깡.돌토의 정신심리분석 사랑하기 2』. 박영스토리.

가즈야 아카사카 / 김상복 역(2025). 『라캉 정신분석 치료 이론』. 한국코칭수퍼비전아카데미.

맹정현(2015). 『트라우마 이후의 삶』. 책담.

브루스 핑크 / 맹정현 역(2021).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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