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늪 — 당신이 지는 이유

by 홍종민

대화가 끝난 후 이상하게 허전하다. 뭔가를 빼앗긴 느낌. 분명 내가 문제를 꺼냈는데, 끝날 무렵에는 내가 미안해하고 있다. 그를 위로하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예민해서도 아니다. 말을 잘 못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구조가 있다. 당신이 모르는 구조가. 그 구조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잘 말해도 진다. 이건 대화가 아니라 게임이다. 그리고 당신만 규칙을 모른 채 그 안에 있다.


팩트가 힘을 잃는 순간


당신이 구체적인 사실을 꺼내는 순간, 그는 즉각 방향을 튼다. 사실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당신의 말투를 문제 삼는다. 눈빛을 공격한다. 감정 상태를 들고 나온다. 약속을 어긴 사실은 사라지고, 당신의 공격성이 새로운 주제가 된다.


장면을 하나 상상해 보자.


당신: "저번 주에 같이 보기로 했잖아. 연락도 없이 그냥 안 온 거야."

그: "너 지금 나 몰아세우는 거야? 왜 말투가 그래."

당신: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야."

그: "아니, 지금 네 표정 봐. 나를 완전히 죄인 취급하고 있잖아. 나도 그날 힘든 일이 있었거든?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따지는 거야?"


이 순간 대화의 주제는 완전히 바뀐다. 약속 불이행이라는 팩트는 사라지고, 당신의 말투와 표정과 태도가 새로운 심판대에 오른다. 당신은 몰아세운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피의자가 된다. 약속을 어긴 그가 아니라, 그 사실을 지적한 당신이 심판받는 자리에 선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라며 해명하는 순간, 이미 덫에 걸린 것이다. 이건 전략이다. 팩트로는 이길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증명도 반박도 불가능한 주관적 감정의 영역으로 당신을 끌고 들어간다. 거기서는 아무도 이길 수 없다. 처음부터 빠져나갈 수 없게 설계된 판이다.


당신이 아무리 차분하게 말해도 공격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아무리 조심해도 의도를 의심받는다. 잘해도 지고, 못해도 진다. 황규진은 이 대화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그와의 대화는 소통이 아니라 미로다. 겉보기에는 평온한 대지처럼 보이지만,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발목을 잡고 문제를 해결하려 몸부림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끌려 들어간다고.(황규진, 2026: 128) 항상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과거가 소환될 때


당신이 그의 태도 공격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치자. 중심을 잡고 원래 주제로 돌아갔다. 그러면 두 번째 무기가 나온다.


과거다.


한 달 전, 1년 전의 이야기가 소환된다. 당신이 실수했던 것, 그가 서운했지만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줄줄이 나열된다. 이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다. 책임의 총량을 나누는 작전이다. 그의 잘못이 100이었다면, 당신의 과거 실수를 끄집어냄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50으로 희석한다. 나머지 50의 짐을 당신에게 떠넘긴다.


당신은 과거의 자신을 변호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린다. 현재의 문제는 사라진다. 논점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간다. 지칠 대로 지친다.


그게 목적이다. 당신을 지치게 만드는 것. 논리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체력전에서 이기는 것. 그는 진짜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당신이 지쳐서 입을 닫기를 원한다.


언어가 연막이 될 때


그래도 당신이 버텼다면. 논리도, 과거 소환도 통하지 않았다면. 세 번째가 나온다.


와해된 언어다.


말은 많다. 그런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현학적인 단어를 늘어놓고, 철학적인 주제를 끌어오고, 전혀 상관없는 제삼자의 이야기를 하며 빙빙 돌린다. 문법적으로는 말이 된다. 맥락이 없을 뿐. 조각들은 있지만 맞춰지지 않는 퍼즐처럼, 의미의 연결이 끊어져 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고 물으면, 그는 "너는 너무 단순해서 내 깊은 뜻을 이해 못 해"라고 말한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이해력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 의심이 자라면 당신은 입을 다문다. 이것이 이 전략의 완성이다. 당신을 스스로 의심하게 만드는 것.


자기 연민이라는 필살기


당신이 모든 방어막을 뚫고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제압했을 때, 마지막 카드가 나온다.


자기 연민이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알았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쓰레기지 뭐."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요즘 힘든 일이 있어서 그래. 나 같은 사람 만나서 네가 고생이 많다."


이 순간, 관계의 권력 구도가 완전히 역전된다. 그는 무책임한 가해자에서 삶의 무게에 짓눌린 가련한 소년이 된다. 당신은 힘든 연인을 다독여주지는 못할망정 사소한 일로 몰아붙이는 무자비한 사람이 된다. 당신의 정당한 분노가 설 자리를 잃는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당신은 말한다. "내가 말이 좀 심했어. 미안해."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됐다. 당신은 그의 자존감까지 어루만져야 하는 감정 노동자가 됐다. 그가 이겼다.


그의 자기 연민은 진짜일 수 있다. 그런데 진짜 고통이라는 것이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자기 처벌이 책임을 대신하는 도구가 된다. "내가 쓰레기"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모든 책임이 면제된다. 이 구조 안에서 당신은 영원히 진다.


침묵이 독이 되는 방식


이 패턴이 반복되면 당신은 무력감을 학습한다. 말해봤자 소용없다. 말을 꺼내면 나만 나쁜 사람이 된다.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게 낫다.


당신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이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니다. 이것은 포기다. 억울함이 해소되지 않고 내면에 쌓인다. 독이 된다.


그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것. 자신이 아무런 변화도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에게만 편안한 현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는 것. 당신의 침묵은 그에게 승리다.


그는 처음부터 당신과 소통할 의지가 없었다. 황규진은 이것을 이렇게 짚는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책임을 회피하고 당신을 죄책감의 늪에 빠뜨려 입을 막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평온을 지키는 것이었다고.(황규진, 2026: 134) 당신의 논리가 부족한 게 아니었다. 게임의 판이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초자아가 당신을 묶는 방식


그런데 왜 당신은 이 관계에 계속 있는가.


당신 안의 초자아가 당신을 붙든다. 맹정현은 초자아의 작동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초자아는 내가 잘해도 나를 비난하고, 내가 못해도 나를 비난한다. 잘해도 빰이 석 대다.(맹정현, 2022: 281) 그 구조가 당신 안에 있다면, 이 관계에서 나오지 못한다. 내가 더 잘 말했어야 했다고 자책한다. 내가 예민한 거라고 스스로를 비난한다. 내가 더 참아야 한다고 억누른다.


그리고 이 자책이 관계를 유지하게 만든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더 노력해야 한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면 이 관계도 좋아질 것이다. 그 믿음이 당신을 계속 이 자리에 묶어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이 더 잘 말하는 법을 배워도 이 게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게임의 규칙이 처음부터 당신에게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당신의 노력이 늘수록 그의 게임은 더 정교해진다.


왜 이 사람을 반복해서 만나는가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이 있다. 왜 당신은 이 패턴의 관계에 있는가. 한 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있다면,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반복강박을 말한다. 해결되지 않은 것이 행동으로 재현된다. 우리가 만나게 될 모든 대상들은 잃어버린 대상의 재발견이다. 맹정현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상이 장면을 규정한다. 나에게는 고유한 대상이 있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 원형적 대상과의 관계가 반복된다.(맹정현, 2022: 151)


이 사람의 이 패턴이 당신에게 왜 익숙한가. 처음 보는 것인데 왜 낯설지 않은가. 당신의 원가족 안에서, 어린 시절의 관계 안에서 이와 비슷한 구조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사실을 지적하면 태도를 공격받았는가. 감정을 표현하면 과거가 소환됐는가. 그래서 입을 다무는 것이 생존 전략이 됐는가.


그 오래된 자리가 지금 이 관계 안에 재현되고 있다. 그때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인정받으려 한다. 그런데 이 사람으로부터는 그것을 받을 수 없다. 그는 당신을 보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구조는 설득으로 바뀌지 않는다.


늪에서 나오는 법


그 늪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그 늪 안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는 것이다.


더 잘 허우적거리는 방법을 찾으려 하면 안 된다. 더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을 찾으려 하면 안 된다. 그 모든 노력이 발버둥이다. 발버둥칠수록 깊이 빠진다.


그의 게임에 응하지 않는다. 태도를 공격할 때 해명하지 않는다. 과거를 소환할 때 따라가지 않는다. 자기 연민을 꺼낼 때 위로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일어난 사실 하나만을 반복한다. 기계처럼. 감정 없이.


대화를 끊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지금 이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자리를 뜰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회피가 아니다. 자신을 지키는 판단이다.


그리고 이 관계를 계속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이 패턴이 반복된다면, 이것이 이 사람의 구조라면, 이 관계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해야 한다.


소통은 들을 준비가 된 사람과 하는 것이다. 그 준비가 된 사람인지 아닌지는, 대화 후에 당신이 얼마나 탈진하는지로 알 수 있다. 에너지가 소비됐지만 무언가를 함께 만들었다는 느낌이 있는가. 아니면 그냥 빼앗기기만 한 느낌인가. 그 느낌을 믿어라.


기억할 때 반복이 멈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겠다.


반복강박은 기억하지 못한 것이 행동으로 되풀이되는 것이다. 기억할 때 비로소 반복이 멈춘다. 이 관계가 왜 익숙한지를 아는 것. 이 패턴이 어디서 처음 시작됐는지를 아는 것. 그게 늪에서 나오는 진짜 길이다.


당신이 이 관계에서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를 이기고 싶은 것인가.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인가. 그 욕망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때, 비로소 선택이 생긴다. 이 사람에게서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은 말을 못해서 진 것이 아니다. 논리가 부족해서 진 것도 아니다. 소통할 의지가 없는 사람과의 게임에 참여했기 때문에 진 것이다.


이제는 알 것이다. 그 게임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당신에게는 그 선택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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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맹정현(2022). 『프로이트 패러다임』. 위고.

황규진(2026). 『나는 왜 함께 있어도 외로울까』. 북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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