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양 <하나 그리고 둘> (2000) 리뷰
* 2021년 작성한 글을 수정 없이 옮겼습니다.
대만 중산층 가정의 삶을 그려낸 에드워드 양의 유작 <하나 그리고 둘>에서 그의 최고작으로 꼽히곤 하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딸 팅팅의 사랑 이야기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치정극에 휘말린 <하나 그리고 둘>의 팅팅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샤오쓰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팅팅은 혼수상태에 빠진 할머니의 앞에서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죠?”라고 말한다. 샤오쓰는 그를 위로해주기 위해 찾아온 둘째 누나에게 “세상에는 재수 없는 사람과 불공평한 일이 너무 많아”라며 속내를 토로한다. 전자는 의문문, 후자는 평서문이지만 두 대사는 정확히 똑같은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하나 그리고 둘>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함에도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샤오쓰의 질문(혹은 불만)에 끈질기게 침묵한다. 다만 질문에 대한 상이한 대답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끔찍한 광경을 그려낼 뿐이다. 한편 9년이 지나 만들어진 <하나 그리고 둘>의 경우 보다 분명한 해답을 제시한다. 물론 <하나 그리고 둘>의 답은 영화를 감상한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천 개가 존재하는 종류의 것이다. 봉준호의 수상소감(으로 유명해진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을 살짝 비틀자면 에드워드 양은 <하나 그리고 둘>에서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개인적’일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른바 일상성의 미학이다.
<하나 그리고 둘>을 어느 하나의 장르 안에 귀속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굳이 그 작업을 행해야만 한다면 ‘가족 영화’라는 헐거운 틀로 가둬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 영화의 관점으로 <하나 그리고 둘>을 본다면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명실상부한 주연 셋. 아버지 Nj, 딸 팅팅, 아들 양양. 조연 둘. 중반부에 이르러 영화에서 (거의) 퇴장하는 어머니 민민과 그녀의 동생 아디. 이들은 혈연관계로 얽혀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서로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하나 그리고 둘>보다 한 해 전에 개봉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군상극 <매그놀리아>의 경우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들을 하나의 시공간에 위치하게 만듦으로써 서사를 구축했다. 음악과 정념은 심지어 다른 시공간의 인물들마저 한 데 모은다.
<매그놀리아>가 떨어져 있는 인물들을 엮어내는 이야기라면, <하나 그리고 둘>은 엮여야만 하는 인물들을 떨어뜨려 놓는 이야기다. <매그놀리아>의 인물들은 민주적으로 복잡다단한 관계를 맺는다. 반면 <하나 그리고 둘>의 인물들은 주요 인물 중 한 명의 세계에 종속되어있다. 예컨대 일본인 사업가 오타와 첫사랑 셰리는 Nj의 세계에, 전 남자친구 패티와 옆집 친구 리리는 팅팅의 세계에, 수영하는 소녀와 학교 선생님은 양양의 세계에 머무른다. <하나 그리고 둘>의 주요 인물들이 가진 고민은 가족적 맥락으로 이행하지 않고 각자의 위치를 지킨다.
그렇다면 <하나 그리고 둘>은 어떻게 동떨어진 세 인물의 세계를 이어붙이는가? 해법은 일종의 끝말잇기 놀이다. 이때 끝말잇기의 구성요소는 단어가 아닌 발화와 이미지다. 팅팅이 생물학 수업에서 키우는 식물은 태아의 이미지로 이어지고, 초음파 사진은 곧바로 (공학적 의미의) 살아있는 독립체를 언급하는 Nj의 회의 장면으로 연결된다. 양양이 던지는 물풍선은 시청각실 영상의 구름으로 전이하고, 스크린 위의 구름은 이내 팅팅의 세계에 비를 뿌린다. 치정 싸움에 이어 갓난아이를 비추는 등 생명 탄생의 이미지를 짓궂게 교직하기도 한다. 에드워드 양은 섬세하게 가계도를 재편한다.
상술한 에드워드 양의 ‘끝말잇기 몽타주’가 가장 훌륭히 드러난 구간은 단언컨대 일본과 대만 양국을 오가는 교차편집 장면이다. 일본에서 재회한 Nj와 셰리는 첫 데이트의 기억을 반추한다. 한편 대만에서는 패티와 팅팅의 첫 데이트가 시작된다. 서로의 자녀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는 Nj-셰리의 목소리에는 패티-팅팅의 영화관 데이트가 덧씌워지고, 철길을 거닐었던 Nj-셰리의 추억은 건널목 앞에 선 패티-팅팅의 모습으로 현현한다. 30년 전 셰리의 손을 잡을 때 땀이 났었다는 Nj의 말이 끝나자마자 패티와 팅팅은 손을 잡는다. Nj는 말한다. “그때와 장소가 다를 뿐이지. 다른 시간 다른 나이에. 하지만 땀이 밴 손은 똑같아.” 30년 전의 대만과 현재의 일본을 의도했음이 자명하다. 하지만 관객은 Nj의 대사가 지금 대만에서 처음으로 손을 잡은 젊은 커플까지 아우름을 알고 있다. 음악을 즐기는 소년과 그렇지 않은 소녀, 첫 경험을 앞두고 도망가는 소년 등의 요소 역시 시공간을 초월해 두 쌍을 매개한다.
이 장면은 일견 세상의 순환성에 대한 함의를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딸(팅팅)의 첫 데이트는 사실상 30년 전 아버지(Nj)가 행한 첫사랑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커플의 미래가 결코 같을 수 없음이 제시된다. 패티가 리리와 내연 관계에 있던 영어 선생을 살해하여 체포당한 것이다. Nj와 셰리가 기차역에서 대화할 때 등장하는 철로의 이미지를 차용해 말하자면, 패티(- 팅팅)는 Nj(- 셰리)와 같은 선로에서 운행하던 중 탈선해 버린다. 패티의 선로는 더는 Nj의 것이 아니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샤오쓰의 것이다. 예상컨대 Nj-셰리의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은 패티-팅팅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차편집 장면이 내포하고 있는 삶의 순환성에 대한 아이디어를 <하나 그리고 둘>의 세상에 대한 인식으로 환원하기에는 다소 꺼림칙한 부분이 존재한다.
한편 Nj와 그의 아내 민민 역시 삶의 순환성과 불확실성 사이에서 고뇌한다. 부부의 고민은 대척점에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 부부는 각자의 고민을 토로한다. 민민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매일 똑같은 얘기뿐이야. 빈 껍데기 같은 삶을 사는 것 같아.”라며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에 빠진다. Nj는 “요즘 들어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더라고요. 거의 모든 일에 불확실한 마음으로 아침에 눈을 떠요.”라며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전전긍긍한다.
그러니 일본 교차편집 장면에서 난데없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의 순환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테마는 진작에 등장했던 것이다. 아내가 내일이 오늘과 똑같다는 사실(삶의 순환성)에 절망하는 반면 남편은 내일이 오늘과 다르다는 사실(삶의 불확실성)에 불안에 떤다. 아내는 끝없는 순환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종교에 귀의한다. 남편은 확실한 과거에 갇히고자 일본으로 향한다. 장례식에 앞서 집으로 돌아온 민민과 Nj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즉 ‘사는 게 별로 복잡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민민과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똑같을 것 같다’라고 말하는 Nj를 보고 있자면, 이들이 순환성과 불확실성, 혹은 니힐리즘과 실존적 불안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모종의 합의점을 찾아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부부의 고민이 동등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종교 시설에서의 민민의 삶은 필요 없는 부분인 양 통째로 도려내져 있다. 반면 과거를 헤매는 Nj의 여정은 팅팅의 사랑 이야기와 함께 영화 후반부의 두 축으로서 기능한다. <하나 그리고 둘>의 초점은 삶의 순환성보다는 불확실성에 맞춰져 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Nj가 일본에서 쫓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셰리(와 자신의 과거)이지만 일본인 사업가 오타이기도 하다. 오타는 감독의 자의식이 개입된 유이한 등장인물 중 하나다(후술하겠지만 나머지 한 명은 양양이다). 오타는 대만에서 Nj와 저녁 식사를 하며 처음으로 입을 연다. 그는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Nj에게 “인생의 하루하루가 다 처음인데 우리는 왜 처음을 두려워할까요?”라며 질문한다. 오타는 이후 일본에서 한 번 더 출현한다. 역시 Nj와의 저녁 식사 자리다. 오타는 카드 마술을 보여주며 말한다. “나는 그저 이 카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뿐이에요. 모든 카드가 있는 곳을 습득했거든요. 나는 마술을 부려서 당신의 회사를 구할 수는 없어요.”
오타의 조언들은 사업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삶에 대한 교훈으로도 읽힌다. 첫 번째 식사에서 오타는 Nj에게 삶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니 내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설파한다. 그런데도 Nj가 삶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신음하며 셰리와의 과거에서 허우적거리자 오타는 Nj의 앞에 트럼프 카드를 들고 나타난다. 그는 카드 마술의 비밀을 알려주며 삶에는 마법이 없다는 결론으로 Nj를 인도한다. 레드 썬. 두 차례의 저녁 식사가 끝나고서야 Nj는 과거의 속박에서 풀려난다. “처음에는 이제부터 모든 게 달라지겠구나 싶었지. 그런데 결국 똑같더군. 내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똑같을 것 같아.”
오타와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양양이다. <하나 그리고 둘>을 본 관객이라면 누구든지 양양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대부분 장면에서 영락없는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때로 양양은 영화 속 모든 어른을 합친 것보다 어른스럽다. 특히 아버지 Nj에게 ‘반쪽짜리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그의 성숙함이 두드러진다. 양양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온종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의 뒷모습을 촬영한다.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찍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양양이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무심히 털어놓았듯 그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에드워드 양은 과거 인터뷰에서 생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현실을 담아내는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뒷모습을 찍는 양양의 카메라는 동일시된다. 두 이름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유치한 도식으로 빠져 양양을 에드워드 양의 분신이라 칭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술했듯 양양의 행동에 에드워드 양의 사유가 반영되어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에드워드 양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영화 속 양양의 행동을 모방한다(엄밀히 말하자면 그 반대다). 감정의 격랑이 최고조에 달할 때면 인물들은 어김없이 표정이 아닌 뒷모습으로서 등장한다. 셰리가 떠나고 오타와의 계약이 불발되었음을 전화로 통보받은 Nj, 혼절한 어머니의 앞에서 오열하는 민민, 패티에게 일갈을 듣고 실의에 빠진 팅팅, 선생님에게 붙잡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앞에서 혼나는 양양. 모두가 상심의 순간에서 앞모습이 아닌 (민민의 경우 거울에 비친) 뒷모습을 보인다. 틀림없이 <하나 그리고 둘> 속 가장 진실한 쇼트들이다.
한편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는 단순히 양양의 행위를 닮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에 대응하는 장면을 촬영한다. 이것을 ‘창문 쇼트’라 부르고 싶다. <하나 그리고 둘>에는 창문(유리벽, 유리문)의 안쪽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창문의 밖에서 촬영하는 쇼트가 빈번히 등장한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아디와 그의 전 여자친구 윤윤이 카페에서 대화하는 장면, Nj의 회사 장면, 민민의 회사 장면, Nj와 셰리가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 여로에 지친 Nj를 팅팅이 간호하는 장면, 패티와 팅팅이 카페에서 대화하는 장면 정도인데, 아마 끝이 아닐 것이다.
창문 쇼트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구태여 이렇게 찍을 필요가 없는 쇼트다. 창문 쇼트에서 항상 카메라는 창문의 외부에, 인물은 창문의 내부에 존재한다. 창문의 내부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카메라를 창문의 내부에 두면 된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의 창문 쇼트에서 카메라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창문의 외부에 존재한다. 관객은 창문 안쪽에 투과된 인물도, 창문 바깥쪽에 반사된 정경도 온전히 볼 수 없다.
생각건대 ‘온전히 볼 수 없음’은 양양의 카메라와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를 연결하는 가교일 것이다. 두 카메라는 모두 온전히 볼 수 없는 것을 찍어 보여주려 하지만, 카메라로는 현재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다. 카메라로 촬영된 뒷모습의 사진(혹은 영상)을 본다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가 아닌 과거의 뒷모습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양양의 노력에는 얼마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양양의 한계라기보다는 카메라의 한계다. 에드워드 양은 창문 쇼트로 카메라의 한계를 시각화한다.
<하나 그리고 둘> 속에 '온전히 알 수 없는' 요소들이 산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령 관객은 아래와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아디는 정말 자살을 기도했던 것인가? 패티와 팅팅은 어쩌다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인가? 할머니는 사고를 당한 것인가, 아니면 몸이 허약해 기절한 것인가? 셰리는 왜 떠났는가? 에드워드 양이 영화의 곳곳에 배치한 창문 쇼트와 미해결 서사는 양양이 찍는 뒷모습 사진의 영화적 변형인 동시에 영화(카메라)의 한계를 인지한 노감독의 겸허함인 셈이다. 나아가 이것이 삶과 세상에 대한 <하나 그리고 둘>의 총체적인 태도와 똑 닮아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부녀(Nj와 팅팅)의 상이한 고민(“거의 모든 일에 불확실한 마음으로 아침에 눈을 떠요.”,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거죠?”)은 서로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두 개의 고민과 하나의 대답. 세상과 삶에 대해 인간이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구동 원리를 전부 이해한다면 미래에 대한 불안도, 부조리에 대한 불만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삶은 불가해하며 (양양의 깨달음에 따르면) 시간에 따라 ‘보이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변화하기에 인간은 삶의 단계에 따라 서로 다른 일부만을 보는 것이다. 단지 과거에서 배우고 미래를 예비하는 동시에 현재를 사랑하며 살아갈 따름이다.
이처럼 인간이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기에, 또한 단 한 번 태어나 청년기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유아기에서 벗어나고, 결혼을 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결혼을 하는 ‘비체험’의 존재(밀란 쿤데라의 말이다)이기에 우리에게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하나 그리고 둘>은 말한다. 에드워드 양은 본원적 비체험의 삶 속에서 소중한 체험을 공유하고자 했다. 베이글 가게에서 패티가 팅팅에게 ‘영화를 통해 2배의 삶을 더 경험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할 때 이는 패티의 말이기도 하지만 에드워드 양의 지론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양은 여러 삶의 단계에 있는 주인공들의 다양한 경험을 기교 없이 전달하는 동시에 때로 마법을 부려 관객의 마음을 동하게 만든다. 오타의 말처럼 삶에 마술이 없듯 영화에도 마술이 없는 법이지만, 전술한 교차편집 장면과 팅팅이 할머니와 화해하며 죄책감을 덜어내는 환상 장면 등을 칭하기에 마법이라는 말보다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다.
영화를 보는 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힘이 영화에 존재하기에 우리는 영화에 끌리는 것이 아닐까?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혹자가 그랬듯 <하나 그리고 둘>은 ‘인간에게 영화가 필요한 이유’를 여실히 증명한다. 나는 <하나 그리고 둘>이 말하는 세상과 삶의 특질에 믿음이 간다. 그리고 이토록 완전한 영화일지라도 알 수 없는 지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겸허한 자세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나 그리고 둘>과 같은 탁월한 작품을 보고 덧붙일 말은 많지 않다. 무슨 말을 하든 그것보다 거대한 영화인 탓이다. 다만 ‘인생의 영화’로 삼은 뒤 두고두고 관람할 뿐이다. 거듭해서 보다 보면 언젠가는 팅팅의 사랑보다 아디의 거짓말에, 또한 Nj의 불안과 민민의 허무에 더욱 감화하는 날이 올 것이다. 반면 지금 볼 수 있는 것을 그때는 보지 못하겠지. 그 날이 오면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양양이 그러했듯 조용히 읊조리면 되는 것이다. “나도 이제 다 컸구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