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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telJuliet Apr 20. 2024

퍼펙트 데이(즈)

2024년 04월의 잡문 #1

극장이 아닌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다. 레터박스 로그를 뒤져 (인생의 고삐를 확 당긴) 22년 하반기 이래 집에서 본 영화가 코엔 형제의 <블러드 심플>과 홍상수의 <오! 수정> 두 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충격을 금할 길이 없었다. 삼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두 편은 예삿일이었는데.


소위 라이프스타일이 급변하며 더 이상은 집에서 영화 보기를 취미라 말하기 어려워졌지만 극장의 맥락을 가져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전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 특히 그것이 하루 두 편을 보는 일이라면 대단히 즐겁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취미인데, 두 편의 영화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훌륭하다면 그것만큼 기쁜 하루도 없을 것이다. <퍼펙트 데이즈>와 <패스트 라이브즈>를 명동 씨네라이브러리에서 본 날도 꼭 그러했다. 



물론 <패스트 라이브즈>도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끈한 작품이었고, 특히 엔딩이 가져다주는 짙은 여운이야 시간이 지나도 쉬이 빛바라지 않을 테다. 글로 요약하자면 심심한 이야기로 심심하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영화 감독이 갖춰야 할 제일의 자질이다. 그러나 이 방면에서라면 아무래도 <퍼펙트 데이즈>에 비할 바는 아니다. 생각건대 어떤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 그 작품과 감독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단순히 '걸작이다' 내지는 '재미있다'는 투의 칭찬도 아니고, '이 감독의 다음 영화를 어서 보고 싶다'는 진위가 확실치 않은 기대감의 표현도 아니며, 다만 묵묵히 감독의 과거 작품을 찾아보는 행위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빔 벤더스의 영화를 워치리스트에 저장만 해놓고 아직 한 편도 보지 않았으니 최고의 칭찬을 하지 못한 상태이고 이 글은 그를 벌충한다. 빔 프로젝터가 도착한 만큼 제목부터 흥미로운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부터 보고 말리라.


<퍼펙트 데이즈>를 감히 걸작이라 칭하고 싶은 이유는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영화의 태도에 놓여 있다. 야쿠쇼 코지가 분한 본작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불현듯 일상에 찾아온 조카딸 '니코'와의 새로운 하루를 즐기던 중 니코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 전체가 히라야마의 명대사와 기가 막히게 조응하는 순간 영화는 반짝반짝 빛난다. 빔 벤더스와 야쿠쇼 코지는 결코 인생의 지난함을 시지프스의 돌 굴리기와 동치에 놓지 않는다. 모든 지금은 다음과, 모든 다음은 지금과 결코 중첩되지 않는다. 이것은 똑같은 자판기에 똑같은 돈을 넣고 똑같은 음료수를 사 마시는 행위를 수 차례 반복해 보여주면서도 매번 다른 각도와 거리에서 피사체를 조명하는 부단한 기술적 노력이 만들어낸 산물일 테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화의 태도이자 감독 빔 벤더스의 태도인 동시에 무엇보다 카메라의 태도다. 그러니 이 태도야말로 <퍼펙트 데이즈>가 지닌 최대의 매력이자 도달한 가장 뛰어난 성취일 터이다. 


<퍼펙트 데이즈>는 내게 대단히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올해가 지나기 전 <퍼펙트 데이즈>를 뛰어넘을 영화가 내게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하는 한편, 2024년의 1분기가 겨우 끝난 시점에서 <퍼펙트 데이즈>를 2024년의 영화라고 단언하고 싶은 야릇한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니 이토록 짙은 잔상을 남긴 <퍼펙트 데이즈>를 본 후로 꼭 3주가 흘러 찾아온 '퍼펙트 데이'가 <퍼펙트 데이즈>와의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글감으로 이어진 것은 퍽 자연스러운 일이었겠다. 



날씨가 급작스레 따뜻해져 계절의 변화를 처음으로 체감케 하는 삼월의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이라면 느지막이 일어나 크로스핏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닭가슴살을 먹는 것이 일종의 루틴으로 자리잡았는데, 특별한 날씨가 살갗에 스치니 그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특별한 날이라 함은 당연하게도 특별히 행복한 날이기에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자 했고 자전거 타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사를 간 후 여의도 한강공원이 집과 가까워져 언제 한번 놀러가야겠거니 마음 먹던 차에 반갑게도 찾아온 생각이었다.


따릉이를 타고 한강 변을 따라 여의도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른 후에 동에서 서로 다시 걸어오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면 저녁 때가 될 터이니 더현대나 IFC몰의 식당 혹은 여의도의 로컬 맛집(영등포 거주자가 여의도의 식당을 두고 '로컬 맛집'이라 칭하는 행위가 과연 적절한가의 문제는 차치하자)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참으로 완벽한 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 산 프렌치 워크 자켓에 스트라이프 셔츠, 치노 팬츠와 뉴발란스 신발을 매치하니 코디 또한 근래의 착장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계획은 외출의 시작부터 보기 좋게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지도에서 자전거길의 위치를 잘못 보아 한강이 아닌 국회의사당의 곁에서 여의도를 횡단했고, 같은 연유로 따릉이를 잘못 반납하고 족히 오 분은 걸어 다시 따릉이를 대여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여의도의 동쪽 끝이라 할 수 있는 63빌딩 앞에 당도해 따릉이를 반납했는데, 여기서도 일이 꼬였다. 점심에 운동을 한 탓에 나른한 기분이 들어 커피를 마시며 한강 변을 산책하면 기분이 좋겠다는 생각에 주변의 카페 세 곳을 돌았건만 장사를 하는 곳이 한 곳도 없었다. 그 중 한 카페 사장의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태도는 상처였다. 그렇다고 프랜차이즈 카페의 커피를 마시자니 왜인지 모르게 행복의 농도를 옅게 만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커피를 마시지도 못한 상황에 억울하게 화장실은 왜 이리 가고 싶은지. 하는 수 없이 음료도 사고 화장실도 들를 겸 63빌딩에 들어갔다. 



갈증을 해소하고 나니 왜인지 모르게 1층에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던 <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 포스터에 눈이 갔다. (웨스 앤더슨에게 빚진) 홍보를 워낙 많이 했던 전시회라 알고는 있었지만 가볼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관심이 갔다는 말이다. 오히려 이전까지는 홍보 사진이 단순히 웨스 앤더슨 영화의 모방 내지는 위악적으로 말하자면 열화판 같다는 인상을 받아 차라리 반감이라고 말해야 좋을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뭐에 씌인 것인지 이왕 계획이 틀어진 김에 충동적으로 전시를 관람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말하자면 P에의 도취.

 

전시회는 말하자면 내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기억하기로는 최근의 전시회 방문이 아마 삼 년 전이었을 게다. 성수 그라운드시소에서 열렸던 무민 전시회. 미술과 사진 등에는 조예가 깊지 않아 전시회를 혼자 갈 생각일랑 해본 적 없었다. 그렇다면 왜 둘 혹은 그 이상으로서 전시회에 가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할 말이 많은데, 그 경우 여러 명이 '함께' 전시회를 관람한다는 행위 자체에 미심쩍은 지점이 있었던 탓이다. 그러니까 전시회를 여럿이 보는 것은 내게 책을 여럿이 보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맥락에서 기이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영화와 책(그리고 전시회) 사이의 결정적 차이에서 기인하는데 바로 영화는 향유의 템포가 예술가에 의해 정해지는 반면 책은 독자에 의해 정해진다는 점이다.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와 한창 썸을 타던 시절 전시회에 갔을때 꼭 그러한 감정이 들었는데, 상대의 템포를 모르는 상황에서 전시회를 관람하는 내내 눈치를 보는 상황이 싫었다. 커플끼리 책을 함께 보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상대가 이 페이지를 다 읽었는지, 책을 혹시 지루해 하는 것은 아닌지, 지금 페이지를 넘겨도 될지. 내게 이러한 눈치 보기의 행위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라기보다 차라리 방해에 가깝다. 내 생각에는 상대의 템포를 자신의 템포와 동등한 수준으로 이해하는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가정 하에서만 '여럿이 전시회 보기'가 열등해지지 않을 수 있다.


전시회 관람에 대한 소수 의견이야 이 쯤에서 접어두고 본론으로 돌아가자. 만오천 원을 주고 표를 끊기까지 긴 고민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남자의 이상형이 처음 보는 여자라는 말이 있듯 전시회를 혼자 본다는 '처음 하는 행위'에 이미 완전히 매료되었음을 느꼈다. 전시 장소가 63빌딩 전망대였는데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공간 중 하나가 주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계획에서 벗어나 선택한 '혼자 전시회 보기'가 좋았느냐 묻는다면 그날을 감히 '퍼펙트 데이'라 칭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짧게 썼듯 관람 이전 맥스 달튼 전시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홍보를 위해 내건 이른바 대표작이 단순히 영화예술의 모방으로 보인 탓이었다. 맥스 달튼 전시회를 인지하나 전시를 보러 가지 않은 사람들 중 절대다수의 머릿속에서 전시회와 일대일로 대응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모티브 작품의 영향이겠다. 물론 실제로 작품에서는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외에도 몇몇 작품들은 다른 예술가들의 영화에 너무 많은 빚을 지고도 오리지널리티를 추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존재의 의의를 의심케 하며 부정적인 선입견지워내지 못했다. 


그러나 인상적인 작품 또한 적잖이 존재했던 덕분에 전시회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이 꽤나 좋게 남을 수 있었다. 공통적으로 모방으로서의 작품활동이 도대체 원작에 어떠한 가치를 더할 수 있냐는 근원적인 의문에 각기 다른 방식이겠으나 결국 대답을 해낸 작품들이었다. 이를테면 헐리우드 영화의 유명한 커플을 한 데 모은 일러스트에 <그녀> 속 '테오도르'와 '사만다'를 포함시켜 웃음을 자아내는 등 예술가의 고유한 센스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영화예술의 특성이자 한계라 할 수 있는 '시간'의 차원을 '공간'의 차원으로 환원하여 관점을 달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즐거웠다. 


다시 말해 영화예술의 시조새라 할 수 있는 에드워드 머이브리지로부터 영화는 빠르게 움직이는 사진이었다. 아카데미 작품상이 왜 'Academy Award for Best Movie'도 'Academy Award for Best Film'도 아닌 'Academy Award for Best Motion Picture'겠는가? 물론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고 편집 기술이 진일보함에 따라 영화가 빠르게 움직이는 사진, 1초에 24장의 사진이 전시되는 예술이라는 명제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단일한 시간 차원에 복수의 still frame이 공존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맥스 달튼의 작업은 시간을 공간화하여 시간의 축을 없앰으로써 단일한 시(공)간에 복수의 still frame을 존재케 만든다. 특히 그가 상기한 고유의 센스를 발휘하여 작품의 특성과 '시간의 공간화' 방식이 합일하게 만들 때에는 자연히 경탄하게 된다. <설국열차>의 열차를 길게 늘어뜨려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정리한 작품이라든지, <이터널 선샤인>을 하나의 대저택으로 구성한 작품이 그러했다. <사랑의 블랙홀>의 반복되는 시간을 무한히 이어지는 보드게임으로 표현한 작품 또한 감탄스러웠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하나만 뽑자면 단연 <프렌치 디스패치>의 앞표지와 뒤표지였다. 하나만 뽑겠다고 하고 둘을 뽑는 실수를 범했는데 그렇다고 뒤표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하자니 둘은 병존해야지만 성립하는 작품들이기에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두 개 뽑는 쪽으로 정정하는 편이 낫겠다. 다만 위 문단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이 영화예술의 특성의 일면을 건드림으로써 특별한 감흥을 주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작품의 제작 의도가 웨스 앤더슨의 예술관을 완벽히 투영한다는 인상을 받았기에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특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 웨스 앤더슨이 만든 영화들은 소위 '인스타그래머블한' 프레임 내부의 심미성으로 이름났지만 기실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한 세계를 그려낸다. 당장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만 봐도 그렇다. 영화 전체가 살인에 대한 미스터리를 동력 삼아 움직이며 초장부터 전시되는 매춘과 범죄, 탈옥의 광경은 또 어떠한가? 이러한 '아름답지 않은 세계를 아름답게 보여주기'의 방법론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것은 물론 <프렌치 디스패치>다. 영화의 제목과 동명의 영화 속 언론사인 '프렌치 디스패치'는 역시 쥐와 범죄 매춘의 소굴인 도시의 아름다운 일면을 소개하려 애쓴다. 웨스 앤더슨은 바로 그것이 (적어도 <프렌치 디스패치>만 놓고 보자면) 언론의, 영화의, 예술의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그의 최고작이라 말할 수 있는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었다.


여하튼 그러한 관점에서 맥스 달튼이 그린 <프렌치 디스패치>의 앞표지와 뒤표지는 그야말로 <프렌치 디스패치>가, 아니 웨스 앤더슨이 표방하는 예술관의 정수를 담았다고 말하더라도 과언이 아니겠다. 더러운 뒷골목을 가리는 예술로서의 표지. 본작을 본 후로 전시회를 충동적으로 선택하기 아무래도 잘했다는 생각밖에는 남지 않았다. 



전시회 관람이 끝나고 나서는 유명한 부대찌개 맛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과연 맛집으로 이름난 이유를 알 수 있을 만큼의 내공 있는 맛. 식당 이름이 전 여자친구 이름과 똑같아 싱숭생숭했다. SNL에 나오는 연예인 김민교 씨를 밥을 먹던 중 봤는데, 나보다 옆 테이블 일본인 관광객들이 그를 먼저 알아본 것이 신기했다. 그러고 한강 바람을 좀 쐐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버번 위스키와 얼음을 사 니트로 한 잔, 갓파더로 한 잔 마시며 참으로 길게 느껴졌던 하루를 느긋이 마무리했다.


그날로부터 한 달이 꼬박 지나 글을 씀에도 이처럼 꽤나 생생한 감흥을 적을 수 있는 것은 제법 깊은 인상을 남겨준 날이었다는 방증이다. 아마 올해 중 가장 짙고 뚜렷하게 행복했던 날일 게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상했다. 하루의 시작부터 계획이 제대로 틀어진 날이었는데 가장 행복했다니. 그 외에도 이전까지의 인식 체계에 따르면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져야 마땅한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강을 보며 마신 버드와이저 무알콜 맥주는 영 맛이 없었고, 저녁에 들어서니 날씨가 갑작스레 추워져 밤바람의 낭만은 거세되었으며, 벚꽃 시즌인 탓인지 집 가는 지하철을 십 분 넘게 기다리는 드문 광경을 볼 수 있었고, 갓파더는 작은 각얼음과 분홍색 어피치 머그컵에 서브되어 낭만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날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행복했다. 그동안 느낀 적 없는 유의 것이었는데, 이는 이전까지 행복을 무심코 '모든 가능세계 중 가장 우월한 가능세계로의 선택'의 곱으로서 인식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좋은 일이 많이 생긴들 단 하나의 나쁜 일로 기분이 상하면 착실하게도 쌓아왔던 행복감이 사르르 무너진 적이 참 많았다. 그런데 단편적으로는 열등한 가능세계로의 이행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음에도 깔끔하게 달콤한 뒷맛으로 마무리되는 하루를 겪고 난 후 이같은 곱연산으로서의 행복관이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아니 틀린 대답에 가까움을 깨달았다. 열등한 가능세계로의 이행이 반드시 자발적인 선택에 의함이 아님을, 다시 말해 명확한 원인이 없을 수도 있음을, 그리고 단편적으로 열등한 가능세계로의 이행처럼 보이는 것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늦게도 깨달았다.


퍼펙트 데이 별 거 없었다. 히라야마 아저씨처럼 '오늘은 오늘, 내일은 내일'이라는 태도로 그날 그날의 우연과 새로움에서 행복을 발견하면 되는 일. 그게 전였다. 언젠가는 히라야마 아저씨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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