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전공한 내가 ‘역사 속 감정 연구’의 본질을 찾아가는 정교한 인문학 연구서를 번역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경희대학교 비폭력연구소 소장님이신 허우성 교수님의 몇 번의 권유를 고사하다가 다른 감정이론서와의 비교를 통해 이 책을 번역하는 것이 그동안 나를 기쁘게 해 준 수많은 역서에 대한 보답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책은 현대 신경과학과 감정 연구의 관계, 생명과 인간 그리고 역사적 사건에서의 감정연구에 관한 가장 정확하고 편견 없는 광대한 정보이다. 얀 플럼퍼 Jan Plamper 교수는 세기를 망라하는 감정에 관한 최고의 역사 담론을 이 책에 소개하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편도체는 정말 공포를 담당하는가? 우트쿠족은 분노를 억압하는 데 반해 타이티족은 왜 분노를 마음껏 펼치려 드는가? 인간은 정말 신에 의해 감정이 유형화된 존재인가? 그렇다면 세계의 민족지형에 속한 각기 다른 감정의 표현 방식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왜 동족의 머리를 자르며 환호할까? 9.11 테러범들은 감정이 교란된 자들인가? 왜 조지 부시의 눈물은 호소력이 있는 데 반해 에드먼드 머스키의 눈물은 조소의 대상인가 등등.
독일 학자인 얀 플럼퍼는 이 책에서 역사에 담긴 감정 사건들의 보따리를 풀어내며 역사 속에서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경험되고 이해되는지에 대한 예시와 이를 연구한 감정 연구자들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제공한다. 플럼퍼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부터 중세와 르네상스, 계몽 시대에서 현대까지 다양한 역사 시기를 이루는 감정이론을 중심으로 감정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타고난 성향(보편주의)인지 사회적 삶을 토대로 구성되는 것(사회구성주의)인지 예리한 양날의 검을 휘두른다. 플럼퍼의 작업은 역사, 심리학, 인류학, 생명과학, 신경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와 중첩을 이루는 약 오십 가지의 메타 담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감정은 플라톤의 정념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지적 관념을 도구로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뇌 속의 편도체, 해마 등이나 죽은 연어의 감정이 찍힌 스캐너의 그래프뿐 아니라 돌, 점토, 파피루스 같은 물자체, 그리고 때 이른 시체 매장, 분라쿠 인형 같은 문화적 환경으로도 방향을 돌린다. 그 속에서 그는 감정의 커다란 두 가지 맥락인 특수성과 보편성, 생명과학과 신경과학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 플럼퍼는 여기에 답을 주지 않는다. 자신의 의견은 최대한 자제한 채 독자에게 답을 맡긴다.
플럼퍼의 작업에서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윌리엄 레디의 감정 체제 emotional regimes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어떤 체제이기에 그런 감정이 나왔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체제의 문제가 메타 감정의 자리이다. 레디는 감정이 개인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더 넓은 문화적, 사회적 규범과 서로 교호 한다고 설명한다. 각 시대는 독특한 감정 체제를 형성하여 개인이 무슨 감정을 어떻게 느끼고 표현하며 관리해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레디는 감정 체제를 연구함으로써 감정 경험 내에서 작용하는 권력 구조, 사회적 및 역사적 정책이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플럼퍼의 『감정의 재탄생』을 번역하며 다윈의 진화론이 왜 위대한 책인지도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 즉 환경과 주체가 교호 하는 우주적 삶과 역시 환경과 주체가 교호 하는 감정적 삶은 모두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존도 자연이 선택하고 감정도 자연이 선택한다. 그러니 인간이 자연환경을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다는 것은 그저 환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감정, 자신만의 세계, 우리는 이것을 특수성 singularity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개성을 중시하고 자유를 즐기는 인간에게는 염원이겠지만 우리는 다른 감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결국은 기존의 감정을 도구로 삼을 수밖에 없는 메타적 존재이다.
사실 포스트구조주의와 해체론의 시기를 거쳐 온 우리는 감정이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아난케(운명)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감정은 해석 불가의 오브제 아 a(욕망의 미끼)라는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얀 플럼퍼 교수는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감정의 감정’ 즉 메타감정과 감정 ‘역사의 역사’ 즉 메타역사를 이
야기한다. 어쩌면 감정은 존 로크의 ‘빈 서판’처럼 민족마다, 혹은 역사마다 그들만의 담론을 가지고 있는 빈 공지와 다름없기에 감정 자체를 연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플럼퍼는 존 레비의 과인지 된 감정과 저 인지 된 감정 사이의 구별을 예로 들어 느낌은 비슷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상이함을 말했다.
느낌과 표현 방식이란 무엇인가? 왜 어떤 민족들은 극도의 슬픔을 웃음으로 표현하고. 어떤 민족들은 극도의 우울함을 살해로 해소하는가? 감정은 단순한 정의로 말하기엔 너무나 신비한 기제이다. 감정은 외부 세계가 정신에 영향을 입혀 거기서 휘발한 잉여의 자극이 다시 몸을 통해 밖으로 체화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발현되지 않은 정서는 감정이라 말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것은 알 수가 없다. 그건 각자 개인의 마음 상태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표정이든 행동이든 어떤 식으로라도 외부 세계에 민낯을 내밀 때이다. 즉 감정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원인이 되어 우리 안에서 촉발되고, 반드시 밖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역동적인 파급 기제이다. 즉 나와 세계와의 관계적 상호 의사소통의 장인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감정을 ‘마음의 혀’라고 했을지 모른다. 감정은 직설적이면서도 우회적이고 때로는 베일에 가려 있다. 그 우회의 경로, 가식의 틈, 감춤의 전략이 바로 메타감정이다. 그러니 메타감정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 문화, 환경, 정치, 윤리적 성향이라는 진면목의 연구 과정이 된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런 감정을 일으키는가? 이런 느낌의 진정한 저의는 무엇인가? 이런 표현으로 우리는 무엇을 예측할 수 있는가? 이 책은 우리에게 이런 감정의 감정에 대한 역사 담론을 들려준다.
“한마디로 이 책은 감정에 관한 별자리이며 마음의 점성술이다. 거기에 곰
을 그릴 것인지, 칼리스토를 그릴 것인지는 각자의 메타감정에 달려 있다.”
2023년 여름 초록에 물든 연화정에서 양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