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연 양윤희 Sep 24. 2023

     민음사 [요술부지깽이]의 탁월성

                            메타픽션 감정의 향연


2009년 3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1권으로 출판된 로버트 쿠버의 [요술부지깽이]는 2022년 노벨문학상 후보 8위에 오른 훌륭한 메타픽션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서사 형식이 특이하고 내용 또한 깊은 사색적 통찰이 아니고서는 이해가 힘들기에 많은 독자들에게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번역자로서,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진즉 이 책의 진가를 알리는 글을 쓰지 못한 점이 후회스럽다. 이런 메타픽션의 묘미를 소설을 창작하거나 문학을 사랑하는 지인들과 나눌 수 있다면... 그들에게 이 책의 넥타르와 같은 맛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의 서사 전략

                    

                                            요술부지깽이중심으로

                                                                                                  

            

                                                   

                                                                                     

                     

     들어가며     

    브라운 대학의 영문과 석좌교수인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는 포스트모던 작가이자 21세기 ‘하이퍼픽션(Hyper Fiction)'의 주창자이다. 그는 소설 창작과정에 다양한 문학적 기교와 특이한 기법을 도용하여 서사방식에 관한 한 혁신가(innovator)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 있다. 의미의 연결을 계속 방해하는 이해할 수 없는 문체와 복잡한 서사방식으로 전체적인 내용을 조망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단순하지 않다. 마치 암흑 속에서 길을 더듬는 심정이랄까. 하지만 그 암흑 속에 완전히 자신을 내 맡기고 한 줄기 희미한 서사적 근거를 따라가다 보면 그 노고를 보상해 줄 감흥이 분명히 존재한다. 쿠버는 글쓰기란 현실을 여러 각도로 분석하고, 비추어보고, 상상력을 투사하여 재현의 마법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의 공간에 단일한 시간관을 적용하는 단편적인 서사 구조, 인간의 의식을 독단적인 이데올로기로 정의 내리려는 시도, 고정된 시각으로 역사를 판단하는 것, 대중에 영합하는 문화, 모든 현상을 가치 관계로 파악하는 비윤리적 정서, 그는 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조롱한다. 우리가 리얼리티로 간주하는 현실을 되짚어보고 신화와 동화 속에 내재한 욕망까지도 한 켜 한 켜 벗겨나가는 그의 서술은 작가의 역량에 따라 사유의 층과 재현의 층이 얼마나 풍성하게 확장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쿠버는 참된 세계는 우리의 경험으로는 알 수가 없고, 현실에서의 경험은 그 세계로 가는 것을 오히려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이란 회의와 무의미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상상력의 창조와 자유의 분출이었다. 쿠버는 1969년 단편 소설집 『요술부지깽이』(Pricksongs & Descants)를 출판하여 당대의 문단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 책에서 떠들썩한 소설적 유희를 마음대로 펼쳐 보인다. 언어가 일관성을 가지고 객관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단순한 개념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객관 세계는 주체의 보는 시각에 따라 수많은 담론으로 재구성될 수 있으며 그 재구성된 개별적 담론조차도 판타지의 침입에 의해 언제든지 새로운 담론으로 뒤집힐 수 있었다. 이러한 서사 방식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사유와 맥락을 같이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고급화된 예술양식, 개인 감흥의 절제와 단련, 그리고 소설이 아직도 무언가 진지한 도덕을 전달하려 한다는 것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학 작품 속에는 실존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나타내기 위해 형식의 파괴라든가, 현실과 재현 사이의 불신을 드러내는 냉소적 거리가 유지된다. 사실주의 소설이 전제로 한 실증적, 경험적 세계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 잘 짜진 플롯, 권위를 가진 전지적 작가, 등장인물의 행위에 대한 합리성은 오히려 서술적으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 공격의 대표적인 장치가 메타픽션(metafiction)적 글쓰기이다. 

   이 에세이는 로버트 쿠버의 소설집 『요술부지깽이』에 수록된 단편을 페트리샤 워(Patricia Waugh)의 메타픽션의 관점으로 분석한 것이다. 쿠버 소설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창조적 서술자가 서사현실(narrative reality)의 틀 밖에 존재하면서 재현의 끝없는 확장을 보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패러디(perody)의 형태로 동화와 신화를 다시 창작하여 그 속에 내재된 인간 본연의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것이며, 셋째는 아이러니(irony)를 통해 삶을 지배하는 윤리적 관념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모두 대표적인 메타픽션의 서술기법이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 서사인 메타픽션으로 들어가 보자.




     서사론으로 바라본 메타픽션     

    서사론(naratology)은 소설이 제시하는 삶의 종류나 그 의미보다는 작가가 제시하는 서사방법에 중점을 두는 문학 논의이다. 로마의 비평가 호레이스(Horace)는『시학의 기교』(The Art of Poetry)에서 시는 읽는 이에게 교훈을 주되 이 교훈은 반드시 즐거움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학이 교훈을 주는 이유는 독자에게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하기 때문이고, 기쁨을 주는 이유는 생생한 표현에 자신을 동화시켜 마음껏 체험의 세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어떤 서술방식을 사용하여 작품을 다루었는가에 따라 독자의 감흥이 결정된다는 시각으로 소설을 바라본 문학 이론가는 러보크(Percy Lubbock)이다. 그는 『소설의 기법』(The Craft of Fiction)에서 서술 방식을 ‘관점(point of view)’의 변용으로 규정지어 서술자(narrator)와 이야기(story)의 관계에 치중한다. 한 편의 작품은 읽자마자 기억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아무리 힘을 들여 한 편의 소설을 읽어도 책장을 덮은 후에는 가느다란 한 줌의 인상으로 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소설의 형태란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드러나는 것이며 드러나자마자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듯 작품이 주는 심상이나 느낌은 고정시킬 수 없기에 책장을 덮고 어떤 작품을 분석하려 할 때 무엇을 비평의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지 난감해진다. 이러한 점을 이유로 러보크는 소설을 하나의 형식을 갖춘 예술품으로 간주하고 작가를 그것을 만든 도공에 비유하여 그 형식을 샅샅이 살펴봄으로써 작가의 의도나 주제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학 작품의 생생함은 작가가 스토리를 독자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을 보게 하여 스토리 제 스스로가 말하게 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는 것이다.      


I speak of his "telling" the story, but of course he has no idea of doing that and no more; the art of fiction does not begin until the novelist thinks of his story as a matter to be shown, to be so exhibited that will tell itself.

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 즉 ‘말하기’를 일컫는 것인데 물론, 소설의 기교란 소설가가 그의 이야기를 이야기 자체가 저 스스로 말하게 하는 ‘보여주기’ 방법으로 시작하지 않는 한 그것을 기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스토리가 제 스스로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저자의 사라짐과 독자의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서사 양상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 양상은 메타픽션(metafiction)이다. 메타픽션은 소설이 환상임을 드러내거나 그러한 환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원리에 근거한다. 세상을 책에다 비유하는 전통적인 은유를 끌어들여 형식상의 자기 탐색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삶의 경험들을 반영하고, 구성하고, 조종하는지를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메타픽션의 일반적인 공통점은 하나의 픽션을 창작함과 동시에 그 픽션의 창작 과정에 대한 진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창작과 비평 사이의 차이가 없어지고 ‘해석’과 ‘해체’의 개념이 하나로 묶이는 형식상의 긴장을 가지게 된다. 

    19세기 소설에서는 개인이 가족 관계, 결혼, 사랑 또는 죽음이라는 최종 결말을 통해 항상 사회 구조로 통합되었다. 그 결과 소설의 종결은 ‘...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혹은 ‘... 그는 떠났다.’ 등과 같은 평이한 결론으로 귀결된 것이다. 이런 귀향서사는 모더니즘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제도나 관습에 권태를 느낀 개인들이 제도에 반대하여 투쟁을 하다가 소외나 정신적 파탄을 겪지만 그런 반항도 결과적으로는 자기 독립성의 확립, 또는 신앙이나 예술로의 회귀로 종결되기에 갈등이라는 우회는 있어도 사회로의 복귀는 리얼리즘 소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서는 흩어졌던 의식의 돼 모음이나 작가가 권장하는 도덕적 이슈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가 작품 속을 들락거리는가 하면 내용 또한 신비화되어 환상과 실제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고향이 없었음을 드러내는 서사인 것이다. 페트리샤 워는 메타픽션이 현실의 객관성을 거부하기보다는 그러한 현실관을 지지하는 사유의 허구성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 설명한다(11). 이러한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작가들은 도박적 글쓰기를 하게 된다. 도박적 글쓰기는 현대문화의 표층을 형성하고 있는 복수적(plural)이고 다변화된 현실을 설명하기에 잘 들어맞는다. 독자들을 자신들이 동화되어 있는 익숙한 의사소통 구조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독서에 참여하면서 의미를 도출해 낸다. 작가는 이제 텍스트의 ‘완전한 해석’에 이르는 어떠한 수단도 허락지 않는다. 서사론의 목적인 어떻게 쓰였나, 무엇이 더 생생함을 주는가 하는 문제는 작가의 서사기법 심층에 내재된 의도를 탐색하는 것으로 바뀐다. 독자는 이제 소설을 읽음과 동시에 그 의미가 와해되는 경험까지 갖게 된다. 그럼 로버트 쿠버가 어떤 방식으로 도박적 글쓰기를 통해 의미의 와해를 표현했는지 살펴보자.      



                       요술부지깽이분석       

   로버트 쿠버(Robert Coover)의 『프릭쏭 앤 데스컨츠』(Pricksongs and Descants)는 그 제목부터가 모호하고 암시적이다. 우선 프릭크(prick)라는 뜻은 ‘찌르다’ 혹은 ‘꼬챙이’라는 의미와 함께 음악 용어로는 ‘악보’ 혹은 ‘음표’를 뜻한다. 그리고 데스컨트(descant)는 대위법의 초기 형식에서 다성 악곡의 수창부 즉 최고 음부를 일컫는 말이다. 대위법이 다성 음악의 작곡 기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음표들 간의 방법론을 일컫는 말이라면 이 제목의 의미는 음표와 선율의 관계라는 뜻이다. 왜 쿠버는 문학 작품에 이렇듯 얼토당토 한 제목을 부쳤을까. 그는 아마도 우리의 삶을 수많은 음표가 그려진 오선지에 비유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동음악인 호모포니(homophony)의 작곡법을 화성법이라 하고 다성 음악인 헤테로포니(heterophony)의 작곡법을 대위법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쿠버는 음표들이 각기 다른 여러 성부로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이 되어 전체적인 하모니를 이루며 아름다운 화음으로 태어나는 것을 인간의 삶과 서사로 연결시켜 문학적인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각 각의 음표는 저 혼자만으로는 절대 천상의 아름다움을 재현할 수 없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음들이 오선지에서 조화를 이룰 때 고운 선율로 새롭게 구성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각도로 보자면 이 소설의 제목은 상당히 알레고릭하다. ‘프릭크’에는 ‘찌르다’ 혹은 ‘남성의 음경’을 지칭하는 비어적 의미가 있고 ‘데스컨트’ 또한 ‘응하다’ 혹은 컨트(cunt)라는 ‘여성의 외음부’를 뜻하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릭쏭 앤 데스컨츠』는 결합의 신비, 즉 상상력과 리얼리티의 얽힘 관계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설집에는 서술 방식이 모두 다른 스물한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과 열아홉 개의 단편 그리고 세르반테스에게 바치는 헌정사(Dedicatoria y prologo a don 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이다. 일곱 개의 실험 소설(Seven Exemplary Fiction)이라는 부제와 함께 시작되는 이 헌정사에서 쿠버는 세르반테스에게 다음과 같은 예술적 소견을 밝힌다..      



존경하는 대가시어! 제가 어쭙잖은 습작으로 당신에게 누가 될까 두렵긴 하지만 1580년에서 1612년 사이에 쓰인 당신의 소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재현하는 ‘실험소설’인 것처럼 저도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런 새로운 실험소설을 써서 당신이 가신 길을 따라가 볼까 하는 것입니다. 훌륭하신 돈 미겔! 우리 둘의 친구 돈 로베르토는 “소설은 우리에게 상상적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상상적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라고 말했지요. 우리에게는 우리가 소유한 모든 상상력이 필요하고 그것을 단련시켜 보다 나은 상황에 이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관점에서 제가 여기에 일곱 가지 실험소설을 엮어내기 위한 신비를 은밀하게 품어 왔음을 밝힙니다.    



쿠버는 돈키호테가 이발사의 면도대야를 보자마자 그것이 전설 속에 나오는 진정한 용사에게만 주어지는 맘부리노의 황금투구라고 외치며 대야를 쓰고 돌진하는 것에 착안해 그런 돈키호테를 창조한 세르반테스의 실험적인 능력을 칭송한다. 작가란 모름지기 돈키호테처럼 이발사의 면도대야를 맘부리노의 황금투구로 변신시킬 줄 아는 안목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쿠버의 설명은 작가가 실재(reality)를 재현한다기보다 오히려 가상을 실재에 영입하는 능력이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이야기들을 전달할 때 그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소설적 형식이 절실히 필요함을 강조하며 자신이 미약하지만 이 형식을 실험해 보겠노라고 밝힌다.

   소설은 처음에 ‘The Door’라는 서문으로 시작된다. 마치 작가가 문을 열고 자신의 상상력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메타포를 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섯 페이지 정도밖에 되는 않는 짧은 서문을 읽은 후 독자들은 난감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세 편의 동화가 서사의 연결 고리 없이 자의식적으로 툭 툭 튀어나오며 한데 얽히어 있기 때문이다. 

 

      첫 부분에 나오는『제크와 콩나무』(Jack and Beanstalk)에서 서술자는 흥미롭게도 제크를 잡아 죽이려던 거인이 바로 제크 자신이라는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제크는 콩나무를 타고 거인 오게르(ogre)를 죽이러 하늘로 올라가지만 공교롭게도 그 자신이 거인이 되고, 타고 올라간 콩줄기조차 그의 몸통이었다. 그 장면에 연이어 『빨간 모자』(Little Red Riding Hood)와 『미녀와 야수』(Beauty and Beast)를 한데 얽어 할머니의 시점과 빨간 모자의 시점으로 자동 독백(internal monologue)이 흘러나온다. 쿠버는 빨간 모자를 늑대의 유혹에서 구해준 사냥꾼이 콩나무에 도끼질을 했던 제크라고 묘사하면서 그가 아버지의 부성으로 늑대에게 유혹당하는 딸을 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브루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은 『옛이야기의 매력』(The Uses of Enchantment)에서 쿠버의 이런 직관을 프로이트식으로 해석한다.『빨간 모자』는 성장기에 있는 소녀가 무의식 속에서 오이디푸스적 집착에 빠져있을 때 풀어야 할 결정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168). 만약 소녀가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는 무의식 속에 남아 유혹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하도록 충동질할 수 있다. 성적으로 유혹하는 늑대는 아버지가 되고 제크의 어머니는 빨간 모자의 할머니가 된다. 이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동화를 압축시켜 전혀 다른 서사로 바꾼 것이다. 쿠버는 『제크와 콩나무』까지 이런 방식으로 다시 쓴다. 제크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콩줄기를 타고 구름 속 거인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가 하늘로 올라가 만난 것들은 동화에 나오는 노래하는 하프나 황금을 낳는 신비스러운 닭이 아니었다. 그곳은 공포스럽고 황량했으며 어떤 미덕도 보상받을 수 없는 불모와 괴물들의 소굴이었다. 제크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나무에 도끼질을 해댄다. 쿠버는 이 장면을 부단한 노동의 고뇌를 참아내며 어머니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귀 기울여 보라. 그는 어머니가 즐거워하기를 원했고, 어찌 되었건, 세상 모든 이들은 아니라도, 그들 두 사람 만이라도 즐겁기를 원했다. 그는 콩나무 위에서의 일들을 어머니에게 말했고, 그녀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들으면서 삶을 사랑하고 그것의 일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웃음소리와 자신의 이야기에 푹 빠진 호기심 어린 미소가 좋았기에 그곳의 공포는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피 냄새를 맡았고 그것이 본질이었다.  



이 서문은 독자와 작가를 패러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의 진리를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독자에게 그 끔찍한 본질을 보여 줄 수가 없다. 부단히 도 견뎌야 하는 삶에 격분하며 제크처럼 작가는 도끼질을 해댄다. 그 도끼질은 글쓰기이며, 틀을 깨는 파괴이며, 본질을 가리면서 다시 본질을 드러내는 은유이다. 틀(frame)은 ‘구성, 구축, 건축, 수립된 질서, 체계...’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하부구조 또는 기초를 이루는 토대로 정의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와 예술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구조 또는 ‘틀’을 통해 조직되고 인식된다는 견해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면 ‘틀로 짜인 것(framed)’과 ‘틀로 짜여지지 않은 것(unframed)’ 사이에 어떠한 구분도 결국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 메타픽션의 본질적인 문제인 ‘틀’의 정의로 관심이 옮겨진다. 현실을 허구와 분리시키는 그 ‘틀’의 문제가 바로 메타픽션의 문제인 것이다(Patricia Waugh 47). 쿠버는 자신의 소설에 이런 틀 깨기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부각한다. 소설집의 첫 번째 단편인 『요술 부지깽이』(Magic Poker)의 서사구조를 보자. 서술자는 자신이 섬을 창조내고 그곳에 아름다운 두 명의 자매를 초대했노라고 밝힌다.      



나는 섬을 하나 창조해 내며 그곳을 거닐고 있다. 태양을 만들고 소나무, 전나무, 자작나무, 산딸기나무까지 들여놓았다. 한적한 호숫가에 찰랑거리는 물이 조약돌을 넘나 든다. 나는 그늘과 습지, 거미줄, 그리고 허물어져가는 폐허도 만들었다. 그렇다. 폐허. 폐허에는 집 한 채와 손님용 오두막, 보트 창고들과 선착장이 있다. 테라스도 갖추어져 있고... 나는 그곳에 한낮의 뜨거운 침묵과 심오함, 무거운 정적마저 감돌게 했다.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      



‘I'는 소설의 서술자 겸 창조적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재현 과정을 설명한다. 쉰네 개의 단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황금바지를 입은 언니와 여동생, 언니의 판타지가 그려내는 섬지기(care taker's son), 터틀넥을 입은 키 큰 신사(tall man), 창조적 서술자(creative narrator) I(나)의 의식이 교차 반복되며 진행된다. 그러나 다섯 명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존재를 인식하거나 의사소통을 하는 동일한 공간의 인물이 아니다.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 한 공간에 우발적으로 나타나서 서로를 지켜보고 각자의 생각을 진술한다. 이들은 서로 알아보기도 하고 전혀 관심이 없기도 하다. 독자는 플롯의 진행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자기가 읽은 서사가 상상이나 거짓임을 알게 되고, 잠깐 읽었던 서술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혼동스럽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주요 테마인 요술 부지깽이의 변신은 황금 바지를 입은 언니가 홀로 있을 때만 일어난다. 그녀가 부지깽이에 입을 맞출 때 멋진 남성으로 변신하여 구애를 하는데 이 사건이 상상인지 실제인지 독자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황금 바지를 입은 소녀의 서술이 단락을 달리하며 부지깽이에 마법이 일어난 경우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나란히 병치되어 전개되기 때문이다. 같은 소설의 틀 안에 있는 동생 카렌의 입장에서 보면 요술 부지깽이는 그저 녹슨 연장에 불과하다. 카렌에게는 바로 옆에 있는 서술자나 키 큰 남자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유령 같다. 바로 이런 서사가 쿠버의 독특한 틀 깨기이다. 쿠버가 제시하는 틀 깨기는 존 파울즈(John Fowles)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The French Lieutenant's Woman)처럼 서술자가 구분해 주는 영역을 독자가 방문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은 서로 리얼리티가 다른 각자의 틀을 따로 가지고 있다. 서술자는 자기가 창조한 것들을 걱정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시킬지 고민을 한다. 그는 자신이 황금 바지를 입은 소녀와 성교를 하고 싶은 키 큰 남자(tall man)라고 하기도 하고, 괴물 같이 흉측하게 그녀들을 지켜보는 섬지기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서술자의 횡설수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소설의 초두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섬을 어떤 부자가 구입해서 고쳐 놓았으며 그 섬이 지도에 나오는 오리건 주의 강꼬치 물고기 섬이라고 말한다.      



나는 지도를 들여다본다. 있다. 레이니 호수도 있고, 강꼬치물고기 섬도 존재한다. 누가 이 지도를 발명했을까? 글쎄, 내가 발명했음에 틀림없다. 달버그도 역시, 물론,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내게 얘기해 준 사람들조차 그렇다. 맞다, 아마 내일은 시카고나 지저스 크라이스트 그리고 달의 역사를 발명할 것이다.      



위와 같은 서술은 틀을 깨는 것을 넘어서 마치 우리의 삶이 어떤 창조적 서술자의 의도에 의해 구성된 허구적 등가물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쿠버의 이런 의도는 『모자 마술』(The hat act)에서 더욱 선명해진다.『모자 마술』에서는 재현과 실재 그리고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한 편의 소설에 창작에 대한 쿠버의 모든 견해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 마술사가 모자를 가지고 관객들을 계속 놀래 키는 마술연기를 선보인다. 모자에서는 토끼와 비둘기가 무더기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관객들을 열광시키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관객들의 반응은 시들해진다. 마술사는 관객들을 자극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고 고투하다가 자신을 도와주는 아름다운 조수 아가씨를 모자 속에 집어넣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토끼나 비둘기와는 달리 아가씨의 몸통은 모자 밖으로 쉽게 빠져나오지 않는다. 당황한 마술사는 모자를 내 동댕이치고 발로 쾅쾅 밟아대는 데 그저 마술적 기교로 여겼던 이런 행위로 인해 참혹한 살인이 일어난다. 아가씨가 모자 속에서 으깨져 죽은 것이다. 관객들은 구토를 하고 마술사는 끌려 나간다. 쿠버가 이 단편을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픈 이야기는 뭘까? 그것은 작가는 이제 더 이상 리얼리티를 통제하는 관조적 입장이 아니라 자신이 구축한 서사물에 함몰당하는 등장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술이 무엇인가, 그것은 마술사가 모든 트릭을 사용하여 관객을 속이는 것이다. 마술사와 관객 사이엔 거리가 있어야 하며 마술의 리얼리티는 거짓 판타지의 실현이다. 그런데 지나칠 정도로 독자를 즐겁게 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마술사가 창조자로서의 자리를 잃고 꼭두각시가 되어 자신의 마술에 진짜 걸려들고 말았다. 리얼리티를 재현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 리얼리티를 깨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쿠버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작가가 구현하는 리얼리티는 결코 충만한 완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와 재현의 세계는 늘 허술하고 틈새가 가득하여 창조하는 서술자조차도 그 틈새로 사라지고 마는 마술 같은 공간이다. 작가는 서사 상황의 외부가 아니라 그 안에서 그저 공학도처럼 문학을 조율하고 분석하는 기술자에 불과한 것이지 모든 서사를 통제하며 정확하게 현실을 그려낼 수는 없다. 쿠버는 이런 자신의 견해를 신화에 까지 적용시킨다.

    『형』(The Brother)과 『요셉의 결혼』(J's Marriage)은 성경을 패러디한 단편이다. 린다 허천(Linda Hutcheon)은 패러디의 어원을 희랍어인 ‘paradia’로 보고 'para'를 「반(反)하여」의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여 패러디를 텍스트 간의 대비나 대조로 설명한다(Hutcheon 192). 그러나 para 에는 「이외에」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결국 패러디의 정의는 ‘어원의 두 의미 사이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하면서 차이를 가진 반복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차이는 비평적 거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단편은 ‘노아의 방주’와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을 재현하여 평범한 인간이 겪는 신의 의도로부터의 소외를 다룬다. 노아의 동생은 혼신을 다해 형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지만 정작 홍수 자체를 의심한 대가로 방주에 올라타는 것을 거절당한다. 독자는 신에게 구원을 당하는 노아의 관점으로만 보아온 이제까지의 사유를 한 번 점검해 보게 된다. 아이를 가진 제수가 비속에서 죽게 되었는데도 노아는 그들을 외면한다. 쿠버가 묘사한 노아의 무정함과 엄청난 홍수 속을 헤매고 다니는 동생의 비애 때문에 읽는 이의 마음은 저릿하다. 이런 느낌은 『요셉의 결혼』에서도 느껴진다. 요셉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아기를 잉태한 것이 부조리하기만 하다. 아무리 신의 의지가 개입된 성스러운 일이라도 마리아의 남편으로써의 삶은 그늘지고, 외롭고,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사랑 행위를 원하는 그의 욕망이 끝없이 좌절당하고 연기되면서 결국 꿈속에서 밖에 아내를 안을 수 없어 결국엔 폐인이 되어 죽는 요셉의 비련은 독자들에게 그저 당연하기만 했던 그늘 속의 가려진 인물을 재고해보는 휴머니즘을 갖게 해 준다. 쿠버는 성경을 패러디한 이 두 편의 이야기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신화를 채택하여 인간을 소외시키는 서사를 나란히 병치시켰다. 기존의 성경이 인간을 구원하는 서사였다면 그것을 패러디한 쿠버의 서사는 인간을 비참하게 하는 서사이다. 그 둘의 거리는 작가의 부정적 판단의 거리이며 재창조와 비평을 모두 담고 있는 공간적 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 속에서 독자는 재현은 선택이며 결코 리얼리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로버트 스콜즈(Rovert Scholes)는 쿠버를 플라톤적 관점을 가진 예술가라고 비난한다. 물론 그의 작품에서 인간에 대한 관념은 그의 서술적 기교와는 달리 그리 혁신적이지 않다. 그는 한마디로 휴머니스트이다. 쿠버의 소설에서 인간은 늘 그의 진정한 욕망과 사회적 관계, 혹은 운명 속에서 갈등한다. 『마른 여자와 살찐 남자의 로맨스』(Romance of The Thin man and Fat Lady)는 서커스를 배경으로 문학적 은유와 기교를 통해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와해되는지를 다룬다. 서술자는 이 소설이 제목부터 코믹하고 어설프며 무엇인가 빗나간 것을 표현한다고 설명해 준다. 우리 모두는 항상 멋진 사랑을 꿈꾸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운 로맨스 밖에 할 수 없는 비극적 존재라는 것이다. 아이러니다. 웨인 부스(Wayne C. Booth)는 『아이러니의 수사학』(A Rhetoric of Irony)에서 아이러니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러니(irony)는 풍자(satire)와는 달리 무엇인가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러니는 변하지 않는 확고부동함을 기괴한 것으로 보고 그러한 것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아이러니주의자는 우주의 그런 신비를 치유코자 하지 않는다. 해결을 원하는 자들은 풍자가 들이다. 예를 들어 풍자가들은 허영(vanity)을 풍자할 때 결국 끝에 가서 그것이 폭로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효과를 거두지만, 아이러니는 결코 상쇄될 수 없는 허영의 허영(the vanity of vanities)을 보여줌으로써 이미지를 그려낸다.


서커스를 하는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악덕 서커스 단장은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다. 생존의 현실은 꿈과 이상을 가만두지 않는다. 사랑을 따르면 생존을 위협받고, 삶을 유지하려면 자신의 진실은 외면해야 한다. 인간은 마음에서 우러난 자신의 열정을 추구할  자유가 없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다른 희생이 따른다. 서커스 단원들은 이 두 남녀의 사랑을 응원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을 위해 악덕 서커스 단장을 살해하고 혁명을 일으킨다. 잠깐 동안 그들에게 환희와 행복이 넘쳐나지만 마른 남자가 살찐 여자를 위하여 근육을 만들고, 살찐 여자가 살을 빼어 미모를 갖추자 금세 구경꾼들은 다른 서커스 장으로 눈을 돌린다.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성공까지 거두는 환락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단원들은  스스로 딜레마에 빠져 악덕 서커스 단장이 자신들에게 감행했던 악랄한 수법을 반복해야 하는 기로에 처하게 된다. 아니 그 보다 더 악랄해져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서술자의 독백이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인간다워야 하잖아...’ 그런데 그런 인간다움을 추구하면 파국에 이른다. 삶의 아이러니이다. 쿠버는 이 소설에서 그저 유흥거리를 찾는데 연연한 외설스럽고 상스러운 서커스 구경꾼들과 그들의 욕구를 자극하지 않으면 생존을 위협받기에 감정을 속이고 비겁한 술책을 쓸 수밖에 없는 서커스 단원들의 고뇌를 관찰자의 입장으로 냉정하게 묘사한다. 쿠버는 이 둘 중 어느 한편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둘 다를 타락했다고 본다. 그의 이런 식견은 이 소설의 밑바닥에 흐르는 예술가와 독자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불일치도 보여준다. 그는 소설 말미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메타포에 자신을 가두고 진정한 감정은 억압해야 하는 위선적 행위라고 말한다. 이 메타포에 관한 쿠버의 생각은 다른 단편 소설 속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쿠버가 보여주는 삶의 아이러니는 메타포 때문에 생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해 주는 메타포를 뒤집어쓰지 않고서는 삶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메타포의 메타포는 무엇인가. 그건 절대로 자유로울 수도, 완벽한 일치를 이룰 수도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희생하거나 무언가가 덧대어져야 메타포가 된다. 그것이 소설의 서문에서 제크가 하늘나라에서 본 피의 본질이며 쿠버가 보여주려고 하는 삶의 아이러니이다.      

                        

                         

       결 론     

      이 에세이는『요술부지깽이』에 수록된 단편들로 쿠버의 서사 전략을 분석한 것이다. 『요술부지깽이』는 재현의 틀 안 밖을 들락거리며 다층의 서사 상황을 제시하는 서술자로, 『요셉의 결혼』과 『형』은 신화를 다시 써서 인간 내면의 휴머니즘을 끄집어낸 패러디로,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의 로맨스』는 사랑이라는 메타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아이러니로 재해석하였다. 쿠버가 소설 속에 재현하는 리얼리티는 다층적이고 치밀하며 자유롭다. 그의 소설은 기법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 가진 패러디, 틀 깨기, 아이러니라는 특징이 그대로 함축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이론만으로는 아우를 수 없는 끝없이 확장되는 의미의 다산성까지 내포되어 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ragedy and The Case of Wagner)에서 인간이나 만물을 가끔 단순한 환영이나 몽상처럼 생각하는 것이 철학적 능력의 지표라고 말한다. 철학적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우리가 살고 존재하는 일상의 현실을 가상으로 의심해 보는 직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쿠버는 니체의 철학을 소설에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는 동화와 신화를 다시 쓰고, 창조적 서술자와 등장인물을 똑같은 위치에 배열시키며, 독자에게 우리 주변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병치되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메시지를 준다. 그에게 마법은 현실이고 마법이 없는 평면적인 세계가 오히려 더 기괴하다. 쿠버의 서사 전략은 낯설게 하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재현 과정의 노출이다. 그러나 그 노출은 존 파울즈(John Fowls) 식의 단순한 노출이 아니다. 그는 재현과 실재 사이의 틈을 벌려놓고 그 속에 독자들을 가둔다. 빠져나오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고 길만 무수하게 열려 있다. 거기서 독자가 느끼는 희열은 자유(freedom)이다. 그의 글은 서정성으로 읽을 수도 있고, 외설, 혹은 새로운 동화나 신화, 아니면 진리를 전하는 경구로 읽을 수도 있다. 그는 독자에게 자유로운 사유의 공간과, 문학을 놀이로 즐길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로버트 쿠버의 서술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창조적 서술자가 서사 현실(narrative reality)의 틀을 넘나들며 재현의 끝없는 확장을 여는 것이고, 둘째는 패러디의 형태로 동화와 신화를 다시 써서 그 속에 내재된 인간 본연의 휴머니즘을 더욱 진하게 묘사하는 것이며, 셋째는 아이러니를 통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윤리의 허위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쿠버가 서문에서 보여준 것도 바로 이 세 가지의 패러디였다. 제크가 허구와 현실을 연결하는 콩나무 줄기에 도끼질을 하듯, 서사의 틀을 깨고 재현하는 작가의 고투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쿠버의 전략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