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증막의 열기보다 따뜻했던 사람의 온기, 그 속에서 문득 발견한 행복의 얼굴들에 대하여.
연말이면 사람들은 저마다 수첩에 소중히 적어둔 이름들을 찾아 길을 나선다. 여기저기서 송년의 모임이 열리고 그 자리에 가기 위해 시간을 내고 마음을 쓴다. 그것은 얼굴을 보기 위함만은 아니다. 올 한 해를 무사히 건너왔다는 안부를 눈빛으로 나누고 싶은 약속이다.
나 역시 여러 곳에서 초대장을 받았다. 발길이 닿고 마음이 머무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용문산 자락의 ‘첨성대불한증막’이었다. 양평여성포럼 동행들과 함께하는 송년의 자리다.
찜질방에 발을 들인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한때는 휴식의 대명사처럼 붐비던 곳이었다. 이제는 그 열기가 조금은 잦아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문을 열고 들어서니 풍경은 새롭기보다 정겨웠다.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낡은 앨범을 다시 꺼내 보는 기분이었다.
이곳의 불한증막은 조금 특별하다. 소나무 장작을 태우는 전통 방식을 고집한다. 황토와 화강암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공간이다. 안쪽은 자연의 재료와 사람의 숨결로만 버텨온 시간의 집이다. 둥근 돔 안에 들어서자 뜨거움보다 묵직한 온기가 먼저 몸을 감싼다. 인공적인 열기가 아니다. 오래 참고 기다린 불의 성품이 전해주는 위로였다.
훈훈한 공기 속에서 회원들을 하나둘 마주했다. 길 위에서 수선스럽게 스쳐 지나가던 얼굴들이다. 오늘만큼은 표정이 느긋하다. 반가움에 말보다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구운 계란과 식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이 놓인 소박한 식탁 위로 회원들이 가져온 콩찰떡과 노란 밀감이 정겹게 더해졌다. 밀감을 까는 손끝에 상큼한 향기가 배어들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는 사이 어느덧 말수는 줄어들었다. 옛글에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겨울 석 달을 따뜻하게 한다(良言一句 三冬暖)’고 했던가. 그날 오간 덕담들은 불한증막의 열기보다 오래 남았다.
우리는 저온방과 고온방을 오갔다. 각자의 속도로 땀을 씻어냈다. 몸속의 노폐물만 빠져나간 것은 아닐 것이다. 한 해 동안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고단함도 그 열기 속에 함께 풀어졌다. 몸이 가벼워지자 팽팽했던 마음의 줄도 슬그머니 느슨해졌다.
이날의 백미는 마니토 선물 교환이었다. 작은 선물 꾸러미를 나누는 순간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가 되었다. 사회적 지위도 나이도 잠시 잊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고른 작은 상자를 열어보는 일은 오래 잊고 있던 마음 하나를 꺼내는 일과 닮아 있었다. 리본을 풀며 터뜨리는 웃음소리에는 어떤 계산도 꾸며낸 역할도 없었다. 생텍쥐페리는 ‘인간관계라는 사치야말로 유일한 진정한 사치’라고 했다. 그날 우리가 나눈 것은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인연의 시간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봉사를 삶의 중심에 둔 이들이다. 밥 봉사를 하고 김치를 나눈다. 어르신들의 마지막 고운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 일에도 앞장선다. 나는 늘 마음만 앞서 충분히 동참하지 못한 날들이 많았다. 미안한 마음이 앞설 때마다 그들은 서운한 기색 없이 내 몫을 존중해 주었다. 봉사는 말보다 실천이라는 것을 나는 이들의 묵묵한 뒷모습에서 배운다. 존경은 거창한 구호에서 생기지 않는다. 이처럼 순수한 얼굴 앞에서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서로의 수고를 알아주고 진심 어린 덕담을 나누는 시간은 늘 짧다. 그러나 그 여운은 길다. 겨울밤의 긴 그림자처럼 오래도록 남는다.
이 따뜻한 여운은 이제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 나는 다가오는 새해 ‘행복 인문학회’의 창립 멤버로서 뜻깊은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감사-존중-나눔'이라는 가치를 실천하고자 모인 33인의 행복선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용히 이름을 얹게 되었다.
오늘 찜질방 돔 안에서 느꼈던 그 따뜻한 온기는 어쩌면 내가 학회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행복’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행복은 화려한 장미꽃처럼 꺾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핀 민들레를 발견하듯 문득 알아보는 것임을 그날 나는 배웠다. 지혜를 모아 대한민국에 행복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차갑고 어두운 곳에 작은 불빛 하나를 켜는 일과 닮아 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결이 달라진다는 말은 옳다. 헌신적인 봉사자들과 함께했던 찜질방의 오후와 이제 지혜를 모아 행복을 이야기하게 될 학회의 아침이 가만히 겹쳐진다.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늙어가고 또 함께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인생에서 만나는 큰 축복일 것이다.
찜질방을 나서며 느낀 그 개운함과 따스함. 몸의 온기는 가시겠지만 마음속에 담아 온 인연의 온도는 꽤 오래도록 식지 않을 것 같다. 그 온기가 어디까지 닿을지는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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