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윤기혁
짙은 녹색에 조금은 넉넉한 교복을 입고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고개를 돌려도 마주칠 눈이 없어서 책상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소곤소곤 떠드는 소리라도 들리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집중해서 엿들었다. 졸업 직전 이사를 간 탓에 입은 닫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는 신세였다. 새로 시작해야 하는 학교 생활에 불안을 느꼈지만 곧 친구가 생길 거라 위로하며 넘기는 게 최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숫기가 없던 나는 용기 내서 다가가기보다 책상과 의자에 묶여있기를 택했다. 무명 배우처럼 초조한 마음으로 궁금증을 갖기를 그리고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호기심 많은 친구들이 가만히 있던 나를 챙겨주었고 고마운 물음에 주저하지 않고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은 '김성연'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몇 명을 곁에 둔 나는 대부분의 무관심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과 중간에 군대 2년까지 도합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를 훑어간 사람들이 몇이 나 될까? 편했던 사람 별 관심 없던 사람 싫어했던 사람 불편했던 사람 미워했던 사람 사랑했던 사람 미련이 남는 사람 고마운 사람 미안한 사람이 있었을 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옅어졌고 최근의 기억들에 밀려났다. 그들이 내게서 멀어진 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각자의 길을 갔을 뿐이다. 누구와 발을 맞춰 걸어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서로의 걸음을 지켜봐 줄 수는 있다는 걸 삶을 통해 경험하는 중이다.
내 걸음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그는 12년 전 무관심으로 가득 찬 교실 안 대부분에 속해 있던 친구다. 신기하게도 14살 소년에게 불안함을 안겨줬던 무심함은 26살 청년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의 무던한 표정은 “나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변해가더라도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켜켜이 쌓인 시간은 속성마저 바꾸는 힘이 있나 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연금술사 같은 그를 얘기해보려 한다.
안녕하세요 첫 장에 참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간략하게 본인 소개 부탁드릴게요.
기혁 : 저는 그냥 26살 남자 윤기혁입니다. 아직 대학생이고요. 3학년입니다.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기혁 : 전공은 연극영화과인데...(연기 전공)
저희가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혹시 제 첫인상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기혁 : 그냥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애?!
기혁 : 축구 좋아했었잖아요. 그래서 그냥 다른 애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축구 좋아하는 애구나 싶었어요.
별 관심 없으셨다는 얘기네요.
기혁 : 저는 야구를 좋아하거든요. 어느 학교 어느 반에나 한 명씩 있는 축구 좋아하고 생각 없어 보이는 애인줄 알았죠.
제가 기억하는 기혁 씨의 첫인상은 지금이랑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아요. 만화에 나오는 맨 뒤 창가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면서 혼자 생각에 잠기는 그런 친구 있잖아요.
기혁 : 저 생각보다 좀 시끌시끌했어요. 근데 딱 바뀐 시기가 중2였던 것 같은데 중2병이 조용해지는 거였어요. 아버님한테 대들고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그냥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거죠. 그때 성격이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온 것 같아요.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을 알 수 있을까요?
기혁 : 제가 4년 만에 복학을 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같이 수업 듣는 친구들이 좀 어리다 보니까... 저는 26살이고 같이 듣는 애들은 이제 22살 거의 한 3~4살 차이나거든요.
그러면 어린 친구들과 수업을 들으면서 겪는 고충이라던지 아니면 이건 조금 재밌다고 생각했던 경험이 있을까요?
기혁 : 약간 불편한 게 있죠. 제가 어쨌든 학번이 높긴 하지만 학년은 같으니까 배운 건 거의 똑같잖아요. 근데 저한테 너무 격식을 차리니까.. 저는 그러면 너무 부담스럽거든요. 저도 학생이고 같이 배우는 사람인데
편하게 대하라고 얘기를 해도 그 친구들이 선뜻 못하는 거죠?
기혁 : 그렇죠 그리고 제가 존댓말을 해서 그 친구들이 더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혁 씨의 외형적인 부분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키가 크시잖아요. 후배들 입장에서 봤을 때는 조금 더 어려울 수 있지 않을까요?
기혁 : 그렇죠 그래서 저도 안 다가가고 있어요.
'기혁'하면 떠오르는 물건을 말하라고 하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슬리퍼!!'라고 외칠 것이다. 그는 한겨울 눈이 내려도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다. 시선을 내리면 발가락 끝이 빨갛게 부르튼걸 종종 볼 수 있었다. 보는 내가 다 시려 너는 왜 한겨울에 슬리퍼를 신냐고 물어보면 자기는 그냥 슬리퍼가 편해서 신는다고 대답했다. 반문할 의지가 꺾이는 분명한 답변이었다.
그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 억지로 꾸미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편한 게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다. 반면에 등교 시간만 2시간인 게으른 대학생은 아침밥 먹을 여유조차 없었지만, 그런 정신없는 순간에도 노란색 올드스쿨과 검은색 척테일러 중 뭘 신을지 몇 분을 고민했다.
“김치찌개에 밥이나 비벼 먹고 나오걸..” 뜬금없지만 슬리퍼를 보고 든 생각이다. 나는 눈에 젖은 올드스쿨을 바라보며 고여있던 침을 삼켰다.
기혁 : 저는 제가 혼자인 건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이 혼자인 거는 또 못 봐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냥 뭔가 그런 사람들을 더 챙겨주고 싶고 신경이 쓰여요.
기혁 씨가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그분도 혼자 있는 걸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기혁 : 또 그런 게 아닌 애들은 보이잖아요. 몇 마디 하다 보면 얘가 활발한 친구인데 못 어울리는 것 같으니 도와주고 싶죠. 연기 학원 다닐 때 A라는 친구도 그랬잖아요. 그 친구도 혼자 다니다 저랑 먼저 친해졌죠.
근데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섭외 기준이 있나요?
섭외 기준이요... 제 주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도 주변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글로 정리하면서 내 생각을 한 번 더 적어보는 경험이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첫 시작이 기혁 씨면 저도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부탁을 한 거죠. 경험이 없기 때문에 기혁 씨한테 많이 의지하는 부분도 있어요.
사실은 3년 전 즈음에 운 좋게 인터뷰 요청을 받았어요. 가끔 생각날 때마다 그분 블로그에 들어가서 다시 읽어보곤 하는데 당시의 저를 보는 게 재밌더라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아직 나를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고 싶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묻고 또 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제가 했던 인터뷰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들어가서 읽어보세요. 나름 재밌습니다.)
기혁 씨는 오랫동안 인연을 유지하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기혁 : 저는 너무 많은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비결이지 않나 싶은데.. 상대방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갖지 않는 것. 왜냐하면 초등학교 때부터 아는 애들이 있는데 저는 아직도 걔네들에 대해서 잘 모르거든요. 오히려 그게 또 좋은 방법이지 않나 싶은 게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리면 그 친구를 대할 때 편견이 생겨서 그 친구의 과거사라든지 아니면 가족 이야기 같은 사적인 부분이 깔리면 그때부터 편하게 대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먼저 물어보지 않으면 굳이 질문을 안 해요.
일부러 더 조심하는 거죠?
기혁 : 그렇죠 물론 저도 걔네가 어떤 일이 있는지 꿈은 뭔지 궁금한데 굳이 안 물어봐요. 왜냐하면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꿈이 없다고 해서 사실 나쁜 것도 아니고요.
어떻게 보면 질문을 안 하는 게 그 사람을 배려하는 기혁 씨만의 방식인 거네요.
좋아하는 마음은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다. 그럼에도 묻지 않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함이다.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상처를 감내했다는 뜻이다. 진실은 대개 쓰고 독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다했을 때 성장하는 이유는 그제야 비로소 진실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좋아하는 마음을 끝내야 시작할 수 있다. 사랑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기혁 씨가 최근 들어 관심을 갖고 있는 일이나 자주 하는 행동은 뭔가요?
기혁 : 그냥 자주 드는 생각은 있는데 '학교 다니기 싫다' '집 가고 싶다' '날씨가 너무 좋다' 이런 생각들을 자주 합니다. 학교가 또 산 쪽에 있어요. 하늘이 맑으면 괜히 짜증 나게.
날이 좋은데 학교를 가야 하는 게 짜증 나는 건가요?
기혁 : 그건 아니에요. 저는 너무 좋은 날씨를 별로 안 좋아해요. 이런 애매한 날씨를 좋아해요.
애매한 날씨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요?
기혁 : 길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요. 우중충하고 비 내리는 날에는 사람들이 밖으로 잘 안 나오니까 저는 우글우글거리는 거리를 별로 안 좋아해요. 사람이 없는 거리를 선호하죠. 사람이 많으면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고 '사람 진짜 왜 이렇게 많냐..' 이러면서 기운이 빠져요.
저는 얼마 전에 지인 중 한 분이 '성연아 너는 더듬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탐지기 같은 걸 달고 있는 거예요. 더듬이로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거죠.
우중충한 날씨를 좋아하시면 혹시 '레이니데이 인 뉴욕'이라는 영화 아세요? 비 내리는 날에 정말 잘 어울리는 영화거든요. 재즈 노래가 흘러나오고 회색 구름 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멜로 영화인데 감성에 젖어서 보기 너무 좋아요.
사랑이 항상 뜨겁고 설렘으로만 가득하다면 과연 좋을까? 태양 같은 사랑이 있으면 먹구름 잔뜩 낀 사랑도 있는 거지. 누군가는 열기를 식혀줄 비 같은 사랑을 더 원할 수도 있다.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인 사랑이 아닌 천천히 다가와 서서히 적시는 사랑을 담았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주로 느낌을 따라간다. 이 사람의 어떤 점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무언가에 끌리는 것 같다. 이런 성향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이나 예술에도 적용된다. 생각하지 않고 온전히 느낌에 집중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의 느낌을 굳이 생각으로 정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그 느낌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로 표현하려는 이유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확신과 그 느낌을 나누고 싶다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술을 좋아하는 이유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실체로 구현하고 작품을 통해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눠도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럼 대체 우리가 나눈 말들은 뭐지? 허공에 떠도는 글자들이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미처 해결하지 못한 감정들을 쌓아둔 채 서로 껴안고 누워있으면 그제야 느껴지는 따뜻하고 뭉클한 무언가가 있다. 이해하지 못해 답답했던 시간이 무색해진다. 따뜻하고 뭉클한 무언가는 대체 뭘까? 각자 그 느낌을 갖고 있다면 묻고 싶다. 그들에게 따뜻하고 뭉클한 것은 무엇인지.
평소에 성선설 성악설에 대해 얘기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시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기혁 : 뭐 그냥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거죠. 저는 제가 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악인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저는 기혁 씨가 악인 같지는 않은데요.
기혁 :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겠지만 그건 사실 제 진짜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꾸며낸 모습이지. 제가 청량리에서 공익 근무 요원을 했는데요. 그때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랑 노숙자분들, 밤에 술 먹고 지하철 안에서 자는 사람들을 많이 접했는데 그들 중에 선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술 먹으면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는 말이 있잖아요.
왜 선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기혁 : 술 먹고 나면 속이 안 좋아서 토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저는 무조건 참고 웬만하면 변기에 하려고 하는데 정말 그냥 토하고 싶다고 바닥에 토해버리는 사람들도 있고 술 먹고 막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보통 아저씨, 할아버지들이 많이 그러시는데 그런 걸 보면 사람은 타인한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상황을 겪다 보니 인간이 딱히 선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본능이 선악의 기준이 될 수 있나? 기준이 뭐라고 생각해요?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 있나요? 생각하기 나름이죠. 선악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 만든 거니까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관념이고 개인의 가치관인 것 같아요.
기혁 : 그렇게 생각하면 본능이 선악의 프레임에 들어가는 건 아닌 것 같네요.
오히려 어렸을 때는 쉽게 답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뭘 모르니까. '인간은 당연히 나쁜 거 아니야?' '아니지 인간은 착하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답이 나왔는데 돌이켜보면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몰랐으니까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 문양이 있잖아요. 그런 것 같아요. 선한 면도 있고 악한 면도 있다. 정도의 차이와 드러나는 부분이 각자 다를 뿐이지 결국 욕망은 누구나 품고 살잖아요.
타인에게서 유독 거슬리는 모습을 발견했다면 그건 사실 내가 갖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타인의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나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말 한 명 한 명이 다 다르면서도 결국엔 크게 다르지 않다. 굉장히 모순적인 말이지만 인간 자체가 원래 모순적이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다.
어디선가 우연히 듣고 크게 영향을 받은 말이 있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생각보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고 당신이 나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생각보다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묘한 문장이지만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움이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 혹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판단한다. 상대방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치부 또는 결핍 아니면 치졸하고 비겁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구석에 웅크려있는 마음을 인지하고 똑바로 마주하는 순간은 꼭 필요하다. 내가 이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면 상대방의 결점을 단순히 악으로 치부하며 비난할 수 없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 기혁 씨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구체적인 이상형이 있을까요?
기혁 : 주변인한테 도움이 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재산적으로든 아니면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어요. 내가 이 사람한테 도움이 되면 그래도 그렇게 막살지는 않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나한테 굉장히 의지할 수 있고 의지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나쁘게 살지 않았구나라는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게 기혁 씨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가치가 될 수도 있겠네요.
기혁 : 자기만족인 거죠. 도와주면서 나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게 어떤 형태이든 어떤 행동이든
기혁 씨는 굉장히 이타적인 사람이네요.
기혁 : 반대로 자기중심 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어쨌든 나를 위한 행동인 거니까.
성연 씨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저는 적당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궁금하시면 위에 있는 링크에 들어가서 제 인터뷰를 읽어주세요.^^)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가 볼게요. 기혁 씨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가요?
기혁 : 저한테 사랑은 가족애.. 가족같이 생각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가족같이 생각하는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인가요?
기혁 : 걱정하는 마음이요. 사랑하면 저는 좀 걱정이 돼요. 그 사람이 상처받지 않을지 아니면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지 그런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되게 좋은 말인 것 같아요. 기혁 씨를 알고 지낸 지 오래됐지만 오늘 나눈 시간은 유독 새롭고 특별하네요.
기혁 : 저도 얘기하면서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되게 좋네요.
그럼 끝내기 전에 오늘처럼 봄비 내리는 날에 듣기 좋은 노래를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기혁 : 제가 신나고 싶을 때 듣는 노래가 있거든요. 김지수의 '프라이데이'요. 되게 리듬이 좋아요. 저는 오히려 흐린 날에 기분이 더 좋아서 신나는 노래를 듣는 것 같아요.
김지수 씨의 '프라이데이'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라이트를 켜고 굽이진 골목길을 따라 들어갔다. 벌써 새벽 1시인걸 보니 사람이 없는 것도 이해 됐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더 걷고 싶다는 생각은 분명했다. 멈출 수 있는 곳이 나오기를 바라며 액셀을 밟은 엄지발가락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방지턱에 차가 덜컹거리며 좁고 경사진 길로 접어들었다. 주위에 보이는 건 회색 빌라와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는 가로수뿐이었다. 다시 되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면서 몇 분을 더 올라가니 구립중구노인요양센터가 나왔다. 뜬금없었지만 그 옆 노상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어서 반가움이 뒤따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원한 새벽 공기와 화한 솔나무 향이 얼굴 전체로 밀려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탈진 언덕 위로 자연스레 뻗은 나무를 따라 시선을 올리니 남산 타워가 눈앞에 있었다. 그 옆에는 둘레길로 이어지는 측로가 나있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혁이를 쳐다봤다. 생각 없이 친 공이 홀인원 된 기분이었다. 무작정 걷고 싶어 달린 종착지가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호들갑은 없었다. 우리는 바로 걷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진 가로등을 따라 분홍 빛을 머금은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이상기후 때문인지 봄이 너무나 희미하게 느껴졌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앞만 보며 걷느라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동시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쉼 없는 걸음과 달리 대화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한동안 이어졌던 침묵을 깬 건 나였다.
"멀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것 같아. 우리도 언젠가 멀어지겠지?"
"그런가?"
" 결국 가는 길이 갈릴 테니까 자연스럽게 멀어지지 않을까?"
" 나는 계속 만날 것 같은데."
어딘가 무기력하고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미지근한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선선한 새벽바람이 꽤 마음에 들었다. 타고 갈 차가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