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부터 스푸트니크의 연인까지
한국에서 일본의 문화가 차지하는 위상은 꽤나 독보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음식,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도 일본은 한국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미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영향이 지속적으로 한국에게 스며들어 온 것은 아니겠죠.
한동안 단절되었던 양국의 교류는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로부터 서서히 재개되었고,
번역과 수입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 유입되던 일본 문화는 이제 한국에 완전히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 문화들을 말해보자면 너무나도 많습니다.
짱구, 드래곤볼 그리고 슬램덩크 같은 것들이 있겠죠. X-JAPAN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좋든 싫든 현재 한국의 젊은 층은 일본 문화를 보고 들으며 자라난 세대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문화가 다양한 방식으로 유입되고 다가온 것과는 다르게, 일본 문학은 조금 더뎠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나쓰메 소세키 등으로 대표되는 일문학은 조심스럽게 확장되었으니까요.
번역이라는 필터를 거친 탓에 원작자의 의도를 그대로 볼 수도 없으며, 조금 느리게 도착했습니다.
그마저도 국교의 정상화 이후 한꺼번에 도착하지도 않았고, 지금도 번역 중인 작품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문학은 속도와는 다르게, 일본의 다른 문화들처럼 대중들을 상대로 꽤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한국 문학 시장에서 번역 문학의 다양성은 다른 나라에 비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입니다.
토마스 핀천처럼 난이도가 높은 작가들의 전권을 우리가 읽어볼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예시중 하나겠죠.
꾸준히 감소하는 독서량이 원인인 것인지, 불안정한 출판업계가 원흉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해외 문학은 한국에서 비교적 소규모 독자층에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마저도 특정 작가 몇 명에 의해 대표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요.
이토록 불안정한 업계이지만, 기묘하게도 일본 문학은 많은 작품이 번역되고 있습니다.
꾸준히 읽혀왔고, 소규모의 추리소설마저 번역되어 왔단 점에서는 상당히 특이한 위치에 있겠죠.
한국에서 꾸준히 읽혀오는 일문학의 대표주자가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하필 하루키일까요. 단순히 읽히고 재미있는 글을 쓴다는 것이 원인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하루키가 전 세계에서 널리 읽히는 작가라는 그 위상이 원인일까요.
어쩌면 이 두 가지 원인이 전부 틀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루키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독자들을 유혹한 비결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무국적성에 있으니까요.
일문학이 한국에서 널리 읽힌다며 글을 시작했지만, 사실 하루키는 일본 문학계와는 거리가 멉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작은 일본 문학계의 이단아였습니다.
하루키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아쿠타가와 상의 수상 이력이 없습니다.
일본의 기성 문단은 그를 번역투라고 비하했고, 예술 - 권위적인 상의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왜일까요.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과정속에서 영어 문장의 리듬이나 특징을 고려하여 일본어를 쓴 작가였습니다.
언뜻 보았을 때 호불호가 갈릴 법한 이런 과정을 일본의 기성문단은 그에 대한 비판점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루키의 장점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초기에는 고쳐야 할 단점에 불과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특징들은 국경을 넘어 가장 널리 읽히게 한 매력이 되었습니다.
하루키만의 오리지널리티는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묘한 독서적 쾌락을 주기에 충분했고요.
그것은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닌 제3 지대의 닿을 수 없는 낙원같이 한국의 독자들을 현혹했습니다.
하루키는 문체의 독립을 이뤄냄으로써 독자들이 열망하는 세련된 고독을 세일즈 할 준비를 마쳤던 셈입니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이 서양의 음식을 자주 먹고, 클래식을 듣는 일상을 보이는 모습이 여기서 왔습니다.
그는 문체와 내용에서 완전한 무국적성을 추구한 작가 중 하나이니까요.
하루키의 이러한 문학적 총체적 특징을 우리는 '하루키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실제 사람들의 생활과는 멀리 떨어진, 그럼으로써 동경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들의 생활 루틴,
몽환적이고 어딘가 초현실적인 분위기, 지겹도록 반복되는 클래식, 고독한 남자 주인공과 성관계,
갑작스러운 유럽행, 그리고 비현실적인 사건과 수상하리만큼 등장인물들이 교양 있는 세계관까지.
하루키는 본인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소설에 털어놓고, 그것을 반복하며 재구축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오리지널리티가 가장 잘 발휘된 작품은 역시 <노르웨이의 숲> 일듯 합니다.
청춘의 사랑 이야기, 등장인물 3명으로 좁혀진 각 챕터의 이야기, 고립되어 있지만 매력적인 주인공들까지.
독창성에 대한 반발을 이겨낸 하루키는 결국 전 세계에 닿을 수 있는 자신만의 매력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앞서 말해온 모든 것들이 한국에서 널리 읽히는 일본의 소설가로 그를 만든 셈입니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숲>의 성공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어떤 언론사의 비평가는 그가 단 하나의 작품을 썼고, 그 뒤의 작품은 개작에 불과하다는 평을 남겼으니까요.
하루키즘이라는 단어를 창조해 낼 만큼 개성적이었던 하루키는 그 하루키즘 안에 갇혀버린 셈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버리는 것은 대단하건, 평범하건 피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하루키의 자기 복제와 문학적 특징들은 한국에서 구분짓는 그의 연애 3부작에서 선명히 나타납니다.
정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연애 3부작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노르웨이의 숲>으로 대표되는 시리즈입니다.
그리고 <스푸트니크의 연인>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루키가 집필한 이 세편의 소설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상에 대해 다룬 작품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누군가에게 감정을 묶어 던질 때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상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이별, 감정과 반작용, 그리고 하루키즘과 자기 복제라는 도구들로 말입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도 하루키의 이런 모습은 아주 선명히 드러납니다.
스푸트니크와 연인, 얼핏 들으면 연관성 없는 단어로 느껴지기에 제목부터 낯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목에서 느껴지는 이런 감정들은 하루키의 오리지널리티가 만든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선 스푸트니크가 뭐였는지부터 알아봐야겠죠. 한나 아렌트 글에서도 다루긴 했지만, 인공위성입니다.
조금 세부적으로 다뤄보자면 동반자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이러한 뜻으로 사용되지는 않았고요.
스푸트니크는 소련이 쏘아 올린 단순한 인공위성입니다. 지구를 뱅뱅 도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죠.
이런 스푸트니크가 역사적 사실을 초월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시간을 거슬러 가봐야 합니다.
스푸트니크는 소련이, 그리고 인류가 쏘아 올린 첫 인공위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지구를 탈출한 최초의 시도로 읽히기도 하면서, 자유진영 세계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과학기술의 진보가 새로운 역사가 됨으로써, 스푸트니크는 인문학적인 상징이 된 셈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과는 다르게 스푸트니크는 단순히 궤도를 빙빙 도는 물체에 불과했습니다.
지구를 떠돌지만, 영원히 우리와 만날 수 없는 그런 상징적인 철 덩어리.
본디 하루키는 정 반대적 사실을 글에 가져와 묘사의 일부분으로 삼는 사람이기에 이런 상징을 썼습니다.
남자 하나와 여자 둘이 나오는 고립된 사랑과 서사 이야기에 스푸트니크라는 상징을 가져왔고,
삼각관계처럼 얽혀버린 사랑 이야기에서 서로는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인공위성이 된다는 말을 한 거겠죠.
이런 측면만 놓고 보면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라는 제목은 <노르웨이의 숲>에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작품의 공통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반복되는 일상과, 사랑에 닿지 못하는 주인공들입니다.
이걸 자기 복제라고 한다면 복제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서 비판을 할 수도 있는 부분이겠지만,
조금만 시야를 돌려본다면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는 복합적인 요소이기도 하고요.
많은 사람들은 하루키가 자기 복제를 하며 똑같은 곳을 빙빙 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스푸트니크처럼.
하지만 그가 길을 잃은 것인지, 어떠한 반복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잠시 여기서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영화인 <화양연화>에 대해서 조금 말을 해보겠습니다.
<화양연화>는 본디 플롯이 없다, 설명이 적다, 행동이 반복된다라는 평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러닝타임동안 특정 행동을 반복하지만, 그 행동들이 모두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반복되는 장면과 행동들은 아주 미세한 감정의 차이를 가지고 있고, 결국엔 다층적인 레이어를 만듭니다.
그 끝에서 영화의 관람객들은 반복되는 행동들에서 모두 각기 다른 결론과 감정을 얻고 나가고요.
존재하지 않는 듯, 아주 미세하게 보이는 플롯과 지겨운 반복성이라는 의미만 놓고 봅시다.
그러한 측면에서 하루키의 지겨운 자기 복제는 화양연화와 미세하게 닮아있기도 합니다.
왕가위는 치파오의 펄럭거림과 국수를 사러 나가는 행동의 반복으로 감정의 변동을 묘사했고,
하루키는 자신의 오리지널리티인 하루키즘의 요소들을 다른 질감으로 연주해 내 감정을 묘사했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의 상실이 젊은 대학생이 마주한 죽음이라는 과거와 현재의 리얼리즘이었다면,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의 상실은 그보다 훨씬 추상적이면서도 허무함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같은 상실과 이별이라고 비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감정의 레이어는 결코 다른 셈입니다.
청춘의 비릿한 방황부터 현대인의 무의미한 고독까지. 그는 반복이라는 무기로 다른 감정을 묘사해 냈습니다.
결국 하루키즘은 자기 복제라는 태만함으로도 읽히지만, 타인에게 닿기 위한 궤도의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하루키는 지구의 궤도를 도는 스푸트니크를 가져와, 사랑은 서로의 궤도를 돌뿐이라고 말하는 듯 보입니다.
<화양연화>의 주인공들이 끝내 선을 넘지 못하고 자신만의 비밀과 고통을 앙코르와트에 모조리 토해내듯,
하루키의 인물들이 보여지는 무국적성의 어떤 행동들은, 결국 부작용을 토해내기 위한 것들에 불과합니다.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부터 스푸트니크의 주인공들이 술과 클래식을 탐하는 게 그런 이유입니다.
사람마다 감정을 이겨내는 행동들은 모두 다르듯,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무국적성 행동으로 상실을 버팁니다.
그리고 무국적성이라는 단어는 결국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한다는 기묘한 매력을 가진 단어이기도 하니까요.
하루키가 자기 복제라는 오명을 견뎌내고, 반복적인 행동들로 그려낸 작품들은 이러한 매력을 가졌습니다.
그가 일문학의 이단아로 시작해서, 번역 문학이 적은 편인 한국에서도 사랑을 받은 것은 이러한 이유겠죠.
일본의 문법에서 벗어나, 과거를 복제하며, 무국적성과 고유함에 집착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비틀즈의 노래인 노르웨이의 숲을 가져오고, 소련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가져온 이유는 결국,
감정의 거센 부작용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수단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 기성 문단과 많은 비평가들의 다양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복이라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문학적인 길을 걸어오는 동안 결국 반복이라는 길에서 자신의 오리지널리티와 의미를 만들었고요.
반복.
단순히 오명과 비판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보면 우리는 뭔갈 찾아낼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파리드 자카리아의 책인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를 인용하면서 마칠까 합니다.
라틴어 Revolvere에서 유래한 단어 Revolution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혁명'이라는 의미고, 다른 하나는 '회전' '되돌림'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모든 급진적인 변화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반작용을 수반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품 활동을 시작한 초반에 일본 기성 문학계에서 큰 저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루키즘'으로 대표되는 그의 독창성은 결국 국제 문학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모든 독창성은 거센 반작용을 수반합니다.
행위의 반복은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멍청한 자기복제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독립, 독창성, 반복같은 단어들을 우리 곁에 두었을 때, 우리는 뭔갈 찾아낼 수도 있겠습니다.
모든 행동에는 한가지 뜻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떤 행동들은 겹겹이 쌓인 레이어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