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농장에서 보낸 하루
보통 오전에는 집에서 일을 한다. 이메일도 확인하고, 밀렸던 일도 처리하고. 대청마루가 있으면 완벽하겠지만, 대청마루를 실내화 시킨 공간에서 (큰맘먹고) 방충망을 열고 방바닥에 앉아서 일을 하니 일이 더 잘되는 기분이다. 여름 날 그늘 아래, 살랑이는 바람이 콧등을 스친다. 급한 일은 대충 마무리를 하고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낼까 고민을 한다.
지난번에 마을 주변 다른 마을을 차를 타고 둘러보았다. 어떤 동네에는 어떤 농사를 짓고, 어떤 분위기와 지형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후에 영월에 정착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우리 부부로써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마을을 돌아보던 중 옆 마을에 있는 사과농장을 지났었다. 아직 가을이 오려면 먼 것 같은데, 이미 사과를 따기 시작한 풍체 좋은신 농부아저씨를 잘 기억해놓았다가, 이번에 방문해야지 생각한다.
크고 작은 옥수수, 고추 밭들을 지나고, 작은 개울물 따라 생긴 길을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사과농장이 보인다. 아직 8월 말, 사과를 수확하기에는 이른 시기이지만, 이 농장 부부는 영글은 사과를 조금 일찍 수확한다. 사과로 술을 만들어 볼까 하여 조금 사려고 한다. 조금씩 상처가 있지만 작고 단단하고 달콤한 사과들. 농장 부부는 바로 나가 사과를 따신다.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어깨 한 쪽에는 캔버스백을 메고. 아마 상품성이 있는 예쁜 사과들은 소중히 다루기 위하여 그 캔버스백에 들어가는 것 같다.
사과를 다 따고, 땀을 훔칠 겸 간이 마루에 둘러 앉는다. 농장 안주인 되시는 아내 분이 남편분이 양봉해서 재배한 꿀로 얼음을 둥둥 띄운 아이스 꿀물을 내오셨다. 그리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원래는 무슨 일을 하셨고, 자녀분들은 지금 어디 계시고, 손주들은 어쩌고저쩌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나는 영월에 와서 이렇게 나보다 연배가 높으신 분들이 거리낌없이 자식이야기하며 얼굴에 행복감을 마구마구 드러내실 때, 비로소 안심이 된다. 나를, 우리 부부를, 이방인이 아닌 그래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존재들로 인정받는 기분이랄까? 우리가 시리얼 킬러로 보이지는 않는구나. 안심이 되며 참 기쁘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호랑나비 한마리가 날아왔다. 그리고는 농장 아저씨 팔에 앉아 노란색 혀를 내밀고 아저씨가 흘린 시큰한 땀을 핥아먹는다. 염분이 필요했던게로구나. 한참을 팔에 앉았다가 목에 앉았다가 아저씨 주변을 도통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제 가라고 훠이훠이 팔을 휘저어도 노란혀를 길게 늘어뜨린 나비는 이 아저씨 곁이 좋은가보다. 농부 부부는 이미 몸이 사과농장과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두 분은 초겨울 사과나무 전지 작업을 끝내면 서울로 올라가셔서 서울에서 지내신다고 한다. 그리고 봄이 되면 다시 영월로 와 사과나무를 돌본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농사할 때가 가장 좋다고 하셨다. 아내 분은 진절머리가 난다고, 서울에서 계속 있고 싶다고 하신다. 그래도 이렇게 같이 영월에 와서 생활하시는 걸 보면 말처럼 싫어하시는 것 같지는 않다. 아니면 아저씨를 너무 사랑하셔서 한 시도 떨어질 수 없는 걸까.
사실은 우리 부부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굉장히 다르다. 나는 자연과 함께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싶고, 남편은 도시가 주는 문화적인 것들을 누리고 살고 싶어 한다. 남편은 함께 영월에 와서 생활하고, 일하고,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는 모든 과정을 함께 해주고, 또 본인도 즐거워하고는 있지만, 막상 진짜로 이전할 생각을 하면 덜컥 겁을 내고, 예민해진다. 우리의 삶의 방식의 밸런스를 어떻게 잡아갈지는 계속 풀어내야할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