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한국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을 1년이라는 시간, 정신없이 적응 중이다. 문득 프랑스 체류 경험이 있는 영어 강사분께서 내게 했던 조언이 떠오르기도 한다.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게 주된 논지였다.
그녀의 말은 진실에 가까웠다. 파리에 도착한 날부터 비가 세차게 퍼부었다. 소나기겠지, 짐짓 생각했지만 다음날도 일주일이 지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맑은 날보단 흐린 날을 더 자주 봤고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다만 잿빛 하늘이 쭉 이어지다가도 잠깐의 찰나지만, 하늘색 맑은 하늘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런 귀한 순간을 놓치기 싫어서일까. 파리에 있는 카페 대부분은 외부 테이블의 의자 방향이 인도 쪽을 향하고 있다.
직장에 갈 때면 늘 버스를 타곤 한다. 지하철도 있지만, 버스가 좀 더 쾌적한 까닭에 열에 아홉은 버스를 탄다. 이방인의 눈엔 모든 광경이 새롭다. 차창 너머로 자전거 군단이 보인다. 날이 흐리든 비가 오든 늘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다. 자전거 도로가 워낙 잘 정비돼 있어 때로는 버스보다 자전거가 더 빠르다. 자칫 빗길에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나와는 다르게 이곳 사람들은 페달을 힘 있게 밟으며 나아간다.
알마다리에서 내려서 직장까지 걸어간다. 빠른 속도로 걸으면 10분 정도의 거리. 구글 지도에서는 버스를 갈아탈 것을 추천하지만, 왜인지 나는 첫 출근날부터 걸어 다녔다. 차창 너머로 보는 풍경보다 땅에 발을 딛고 겪는 풍경이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파리 사람들의 옷차림은 각양각색이다.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차림에 운동화가 많지만, 어떤 이들은 공작새처럼 화려한 의관을 뽐낸다. 옷을 잘 차려진 사람들의 걸음 속도는 대체로 빠른 편이다. 그들이 정말로 바빠서일지, 옷차림과 걸음 속도도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잰걸음 속에서 노숙인들이 눈에 띈다. 파리에는 노숙인이 꽤 많이 있다. 그들의 모습 역시 각양각색이다. 패딩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부터 야상을 입고 반려동물을 안은 사람까지. 처음 그들을 마주쳤을 때는 경계했지만,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 않아 어느 새부터는 하나의 풍경으로 간주하게 된다.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2주 내내 같은 자리를 지키던 노숙인이 어느 새인가 사라져 있기도 하다. 사라진 그는 어디로 간 걸까. 혹시 생명이 위태로워진 건 아닐까. 그냥 단순히 자리를 옮긴 것일까. 수많은 상념에 사로잡힌다.
흐린 날들의 연속이지만, 겨울이 끝난 뒤 찾아올 봄을 상상한다. 희망을 품는다. 가만 보면 날씨도 인생을 닮았다. 희로애락이 있는 것이다. 흐린 날에도 부지런히 걷고 바지런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궂은 날씨를 뚫고 외출했다가 어쩌다 마주친 센강의 야경처럼, 꾸준히 걷다 보면 길이 보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