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루, [메소포타미아]
젊은 시절 별로 관심 없던 역사에 대해 새로 관심이 생겼다. 젊을 때는 시를 좋아하고 나이 들면 역사를 좋아한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 듯. 수구초심이라고 해야 하나. 나이 들수록 원류를 찾아가는 성향이 강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고대 문명, 더 거슬러 올라가 선사 시대까지 관심이 뻗히기 시작했다. 특히 몇 해 전부터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푹 빠져 꾸준히 탐구 중이다. 그 관련 자료 가운데 조르주 루의 [메소포타미아]를 읽으면서 역사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처음 알았다.
저자는 사담 후세인 시절 이라크 석유회사의 의사로 일한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방대한 자료를 끌어모았는지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을 주름잡았던 여러 종족이며 지도자와 아주 길어야 3백 50년을 넘기기 힘든 수많은 왕조를 따라가면서 그 주변 지역(아나톨리아라고 부른 터키쪽과 엘람이라고 한 이란쪽)과 얽키고설킨 흥망성쇠의 역사를 아주 다각적으로 때로는 만화경적으로 어떤 때는 현미경적으로 생생하게 서술한다. 더구나 역사책이 술술 잘 읽힌다. 그 만큼 서술이 유려하다.
여러 중심지가 있지만 이들은 공통의 전통을 나누고 지키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는 큰 틀을 만들었다. 수메르, 아카드, 구티, 아모리트, 후리트, 히타이트, 엘람, 카시트, 칼데아, 아람...
기원전 3400년 무렵 수메르인이 만들어낸 문자는 분명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매혹적인 발명이었다. 못모양 글자(설형문자 또는 쐐기문자)를 바탕으로 시대가 바뀌고 종족과 말이 바뀌어도 각 도시별로 제각기 수호신을 숭배하며 잘 조직된 행정체계와 발달된 무역 그리고 놀라운 과학 지식을 공유하였다.
기원전 609년 메디아(이란)와 바빌로니아한테 거대한 니네베, 니므루드와 아수르를 수도로 한 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한다. 그러고 나서 바빌로니아로 축소되어 6백여 년을 더 이어간다. 기원후 74-75년 점토판에 새긴 설형문자를 마지막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 화려한 막을 내린다. 3천 년 이상 이어온 인류 최초의 문명은 그들이 발명해낸 문자와 그들이 쓰던 말과 함께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다. 수메르 문자와 아카드 문자는 아람어나 그리스어한테 그 자리를 물려준다. 자신들의 고유한 건축술(벽돌)로 끊임없이 새로 짓고 막대한 제물을 바쳐 관리하던 자신들만의 신전도 새로 들어온 건축 양식(석조)의 신전과 경쟁하다가 하나둘씩 폐허로 바뀌어간다.
뭐니 뭐니 해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 도시는 바빌론이다. 모든 나라가 다 수도로 삼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곳임에는 틀림없다. 우리한테는 불가사이한 환락의 거대 도시, 바벨탑(지구라트 : 신전 또는 천문관측소) 그리고 공중 정원으로 우리 기억에 지울 수 없게 인각되어 있다. 나부코도노소르(네부카드네자르) 2세(Nabuchodonosor II)로 대표되는 신바빌로니아(기원전 612-539)로 기껏해야 70년 정도 지속된 왕조다. 신바빌로니아는 키루스(Cyrus)와 다리우스(Darius)로 대표되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기원전 539-331)한테 자리를 내준다. 아시리아에 이어 이집트까지 정복했던 그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도 오래 가지 않아 알렉산더 대왕한테 무릎을 꿇는다. 그렇지만 서른둘에 아마도 전염병(말라리아나 장티푸스)으로 죽은 알렉산더 대왕의 기간도 기껏해야 십 년 정도다. 그 제국도 둘로 나뉘어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이집트에 또 하나는 지금의 시리아를 중심으로 자리잡은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31-126)로 이어진다. 다시 이란 북쪽에서 내려온 파르티아(Parthia : 기원전 126-기원후 227)가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되돌이킬 수 없이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로마제국이 이 지역을 한두 차례 휩쓸고 지나가는 사산조 페르시아(기원후 224-651)가 들어서면 메소포타미아의 화려했던 고대 도시들은 폐허로 바뀌거나 보잘것 없는 촌락으로 쇠락하고 만다.
그로부터 19세기 중반(1843)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보타(Emile Botta)가 발굴할 때까지 그야말로 텔(Tell)이라고 부르는 사막의 모래 언덕 아래 긴긴 깊은 잠에 빠져든다.
흔히 말하듯 경제 중심지가 아시리아 제국의 주요 도시에서 새 왕조의 신도시로 옮겨가고 유프라테스 강 줄기가 동쪽으로 흐름을 바꾸고 운하 시설은 모래로 메워져서 일까?
다른 쪽으로 접근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이 문명이 사라졌을까?
먼저 끊임없이 외부에서 들어온 이민족이 이쪽을 차지하면서 오랫동안 이 지역의 통치할 자신들만의 통치권이 사라졌다. 아시리아 제국이 멸망하고 바빌로니아 왕조로 축소되었다가 페르시아 제국에 흡수되고 이어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과 아람족의 시리아(셀레우코스 왕조) 그리고 다시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마지막에 아랍인들이 밀려들었다. 물론 대부분 피를 흘리지 않은 평화적인 정권 교체였다. 그렇지만 종족, 언어, 문화, 종교가 서로 뒤섞이면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전에 이미 구티(Guti), 아모리트(Amorrites), 후리트(Hurrites), 히타히트(Hittites), 카시트(Kassites), 아람(Araméens)이 들어왔고 그 뒤 칼데아(Chaldéens)가 밀려왔을 때만 하더라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아직 젊고 활기가 넘치던 때라 틈입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문화를 지녔기에 그들을 동화, 흡수시켰다. 그렇지만 이미 발전된 과학과 화려한 문화를 지녔던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오히려 영향을 받는 관계로 바뀌면서 읽고 쓰기에 까다롭고 복잡한 설형문자는 자신들마저 버리게 된다. 틈입자한테 바빌로니아는 몇몇 사제와 식사층만이 전통에 파묻혀 점토판에 과학 지식이나 연대기를 기록하는 화석화된 사회에 지나지 않았다. 파괴하거나 깨어지지 않으면 영원히 보관되는 점토판은 파피루스나 양피지([데카메론]의 친필 원고는 양피지다!)에 밀려났다. 기록하기에 힘든 설형문자는 쓰기에 편한 알파벳(페니키아 문자)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요컨대 이들은 창조성과 자발성이 메마른 상태에 이르렀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세 대륙간의 인적이고 물적인 교역이 활발해지고 사회 변화가 빨라지며, 이성적인 철학과 과학, 회의성이 깃든 종교가 판치는 새 세상이 되었다. 전통에 발이 묶여 정체된 사회는 더 이상 활기를 잃고 죽음의 길로 내닫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문명이 흔적없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수메르인과 아카드인한테 빚지고 있는 것들이 참 많다. 60진법, 1년 365일, 한 달 30일, 하루 24시간, 1시간 60분, 1분 60초, 원 360도... 또 그들이 신봉한 놀라운 점성술(아브라함의 종족인 칼데아인)은 아직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효율적인 행정 체계며 왕위 즉위식 같은 제도, 도시의 자치 관리, 아직 종교의 상징으로 쓰는 십자가며 초승달... 그리스어나 터키어, 아랍어를 통해 아직 우리한테 쓰이는 그들의 몇몇 단어들, 알콜, 사프란(염료), 깁스(석고), 나프타(원유), 미르라(몰약)... 특히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 어쩌면 이런 것들은 우리가 그들한테 빚지고 있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이들은 기원전 7천 년 전 곡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부락을 이루어 공동거주를 하였다. 그 다음 도자기와 벽돌을 만들고 청동 제련술을 발견해내었다. 기원전 5500년대가 되면 '관개시설'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목축을 시작한다(신석기 시대의 혁명). 이런 혁신적인 농업 기술은 금방 남쪽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퍼져나간다. 이 지역에서 바퀴와 돛, 쟁기를 만들어낸다. 이어 신전(지구라트)과 통치자의 저택을 중심으로 도시가 생겨난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기원전 3400년 무렵 수메르인들이 만들어낸 설형문자다. 사물을 그림 형태로 적고 동그라미로 숫자를 표시(pictogramme)하다가 차차 단순화, 추상화시키면서 생각(idéogramme)과 말(phonétisme)이 함께 표현되는 쪽으로 진화한다.
수메르어는 한국어와 같은 교착어이다. 반면 아카드어, 바빌로니아어, 아시리아어는 인도-유럽어족과 같은 셈어에 속한다. 수메르와 아카드 문자는 사물을 직접 묘사한다는 측면에서 구체적이며 이것을 일반화하면서 추상성을 동시에 띤다. 갈대끝을 수평으로 날카롭게 잘라 만든 도구(칼람)로 점토판에 찍고 그어 기록하는 문자다. 이들은 설형문자로 3천 년 넘게 자신들의 생각과 지식을 경험이나 역사에 바탕을 두고 사실적이고 일관성 있게 전달하였다.
이 지역에 풍부한 찰흙으로 만든 점토판(태블릿이라고 부른다)에 새겨진 자료는 물에는 결딴나지만 불에 구워지면 영원히 살아남는다. 그 뒤 나온 양피지나 파피루스와 달리 점토판은 오늘날 엄청난 양(50만 점)이 남아 있다.
문자는 처음 상거래를 위해 발명되었다. 그다음 행정 문서, 나아가 외교 문서나 역사 기록(전승비)에 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 개념을 조직화하여 일관성있게 바꾸고 구체적이며 체계적인 법전을 만들어낸다. 나아가 과학적, 철학적 지식(의학, 수학, 천문학, 점성술)이나 문학작품(창조 신화, 서사시)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어떤 고대문명도 메소포타미아 문명 만큼 모든 분야에 걸쳐 이렇게 풍부한 자료를 남긴 사례가 없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변지역, 예를 들어 근동지방, 이란, 터키, 나아가 더 멀리 그리스와 이집트며 인더스강 유역까지 영향을 끼친다.
루브르의 메소포타미아 전시실을 들어설 때마다 "아 옛날이여, 그 화려한 과거의 부귀영화는 다 어디로 가버렸나!" 하고 곱씹는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문명을 꽃 피웠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지역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 돌고 도는 게 역사인가. 그래서 공평한가?
사막에서 세라믹 제조술(기원전 7000), 관개시설을 통해 과학적인 농업기술(기원전 6500)을 개발하고, 신들(50명의 아누나키)을 섬기기 위한 노예로 만들어낸 인류 기원설([최고 현자의 시], [창조 서사시])을 만들고 놀라운 점성술을 가졌으며, 기원전 3400년 무렵 설형 문자를 만들어 쓰고, 지구라트(신전)를 중심으로 도시(대표적으로 문자가 탄생한 우루크 Uruk)를 건설하고, 그리스 신화의 원형을 만들고 성경의 노아의 방주의 원천인 인류 최초의 문학작품 [길가메시 서사시]를 남긴 메소포타미아의 대단한 유물을 보면서 씁쓸함을 떨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화려한 과거의 추억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일. 부자는 삼 대 못 가고 권력은 십 년을 못 넘긴다! 역사를 뒤집어 살펴보는 것은 과거의 거울에 비춰 현재를 바라볼 수 있어서이다.
페르시아만 가까운 쪽에서 수메르와 아카드 제국, 오늘날 바그다드 쪽에서 바빌로니아 제국, 이라크 북쪽과 시리아에 걸쳐 아시리아 제국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큰 족적을 남긴다. 그런데 3천 년을 지속한 화려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들이 만들어낸 설형문자와 함께 기원 전후로 감쪽 같이 사라진다.
지정학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된 이민족의 침입으로 기원 전 4세기 이후 그들만의 종교와 행정 체계가 무너진다. 사회 문화적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고 헬레니즘화되어 그 무게 중심이 그리스 쪽으로 넘어간다.
과학적인 근거로는 기후 변화다. 기온이 상승하면서 특히 남쪽에서 두 강의 연안 지역은 사막화가 진행되어 운하가 말라서 농사짓기가 힘들어진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비롯한 하천이나 육로를 통한 무역이 쇠퇴하면서 교역의 중심지가 지중해로 옮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 무엇보다 아시리아학의 대가 조르주 루의 결론처럼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들의 문자 체계, 다신교적 종교며 행정체계가 변화된 새 시대에 낡게 되어 새로운 젊은 피를 수혈할 수 없어 결국 늙어서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