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샬은 불운한 작가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은 18세기 초에 발표되지만 시대를 앞질러 우연이나 자유 의지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같은 사건을 두고 여러 화자를 통해 다초점 시점을 동원하는 현대소설적인 기법을 선보인다. 어쨌거나 아주 드문 경우지만 이 책은 한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그만 둘 수가 없다. 또 이렇게 뛰어난 작품이 널리 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샬은 몽테뉴나 세르반테스, 호메로스도 참조하지만 그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작가는 단연 루이 14세 때 걸출한 배우이면서 희극작가인 몰리에르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후대 작가의 명단을 살펴보자. 프레보(Prévost), 마리보(Marivaux), 라클로(Laclos), 볼테르, 디드로, 루소, 사드, 스탕달…
볼테르가 한 모든 철학적 비평은 샬이 이미 20년 또는 50년 전에 다 진술해놓았다고들 한다. 반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진 샬이 1710-1712년 무렵에 저술했지만 1970년까지 수고본으로 남은 [말브랑쉬 신부한테 제시한 종교에 관한 난제들 Difficultés sur la religion proposées au père Malbrache]은 "볼테르 젊은 시절의 작품"으로 여겨질 정도다. 무신론적인 이 작품은 암암리에 유포되다가 디드로의 비서인 네종(Jacques-André Naijeon)이 완전히 개작하여 1767년 [투사 철학자 Militaire philosophe]라는 제목으로 내용이 줄고 왜곡된 채 출판되어 계몽주의 철학자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고문, 근친상간, 강간, 변태 성행위 같은 폭력적이고 잔인한 포르노적 작품 세계로 말미암아 20세기 중반까지 금서 조치되었던 사드(Marquis de Sade)는 27년을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보낸 인물인데 감옥에서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가학적인 동시에 자학적인 데프랑은 분명 사도마조적인 인물이다.)을 읽곤 하였다.
아버지가 재산을 유지하려고 지참금을 주어 시집보내는 대신 딸(클레망스)을 강제로 수녀로 수도 서원하는 날, 극적으로 수녀원을 습격하여 수녀 후보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납치하여 떠나는 영웅적인 테르니는 스탕달의 소설들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의 모델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네르발은 [불의 딸들 Les Filles du feu]에서 샬의 여주인공의 이름 가운데 실비와 안젤리크(콩타민 부인의 처녀 적 이름)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적게는 서너 권 많게는 열 권 이상을 번갈아가며 책을 읽는 내가 다른 모든 책을 뒤로 미루고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만 읽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1702년 샬은 "변호사 샬"이라는 이름으로 [돈키호테 속편]의 출판 허가를 신청한 바 있다. 출판사가 끼지 않은 개인적인 신청이어서인지 긍정적인 답변을 얻지 못한다. 1705년 샬은 세 편의 단편소설을 완성하고 출판 허가를 신청했으나 이번에도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다. 소설 장르가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였을 가능성이 많다. 사실 18세기 중반까지도 소설은 도덕과 풍습을 해치는 위험한 장르로 무시받고 비난받는 상태였다. 루소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소설 [누벨 엘로이즈 Nouvelle Héloïse] 서문에서 "대도시 사람들은 연극이 필요하고, 타락한 평민들은 소설이 필요하다."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샬은 왕립 문고 책임자인 사법부 수장 퐁샤르트 랭(Pontchartrain)[1] 백작을 비롯한 적들의 미움을 샀다고 여긴다. 그런 이유에서 일까.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먼저 출판되고 나중에 파리에서도 출판된다. 작가가 죽고 몇 달 뒤 나온 [동인도 여행 일기]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출판된다. 굳이 살은 [유명한 프랑스 여인들]의 머리말에서 자신의 정체를 감추려고 "작가 사후 서재에서 원고로 발견되었다."하고 밝힌다.
샬은 1717년 6월 7일 체포되어 풍속사범을 비롯 민사재판의 죄인들이 주로 갇히는 샤틀레 감옥에 갇힌다. 정확한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풍자적인 시나 샹송이 담긴 금서를 보유하고, 외국인과 잦게 서신을 교환하며, 징세 문제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며, 서슴없는 반종교적인 발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8월 12일에 풀려나는데 조건이 따른다.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파리와 파리 주변지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조건이다. 이 사안을 처리한 책임자가 바로 저승사자처럼 무시무시한 다르장송(D’Argenson) 후작이다. 그는 무려 21년간(1797-1718) 경찰국장을 재임한 인물로 특히 형사부를 창설하여 감시체제를 강화시키면서 공권력을 막강하게 만든 인물이다.
샬은 즐겨 찾던 파리의 도서관이며 카페와 등지고 샤르트르(Chartres)로 귀양 가서 물질적으로 몹시 곤궁한 상태로 생을 마감한다. 샬 자신의 말대로 "나름 적잖은 재능도 있고 알만한 사람들한테 평가도 받고 어느 누구한테도 반감을 산 적이 없는데" 이렇게 나처럼 "끊임없이 불운만 따라다니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파리의 부르주아 출신 샬은 루이 14세 시절 16세에 중등학교(그 당시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그다음은 대학이다.)를 마친다.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18세가 될 때까지 법학을 공부했을 가능성이 있다. 1677년 18세에 자원병으로 플랑드르 지방의 전투에 참가한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엄청난 재난이지만 한편으로 일자리를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1678년 평화조약이 체결되자 "내 젊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었다."라고 쓴다. 그는 1682-1688년에 걸쳐 누벨 프랑스[2] 개척지에 대구잡이 사업에 동업자로 뛰어들었다. 결국 샬은 막판에 1688년 8월 영국 편 해적한테 체포되어 보스턴과 런던의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 한 푼 없는 빈털터리로 파리로 되돌아온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상태에 놓인다. 다행 외삼촌의 주선으로 1689년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의 항해일지(1690.2.24-1691.8.10)를 기록하는 서기일을 맡는다. 샬 자신에 따르면 이 « 세 편의 항해일지 »[3]를 바탕으로 30년간에 걸쳐 소설처럼 재구성한 [동인도 여행 일기]는 객관적인 여행기이면서 동시에 내면 일기다. 샬은 늘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지만 어느 일에도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 또 작가로서 샬은 검열에 걸리는 것은 물론 징역형에 유배까지 당한다.
그럼에도 당대에 이름 없던 유명 작가는 20세 중엽에서야 이름을 되찾고, 극소수 프랑스 문학 전공자들한테만 읽히고 연구되는 작가의 명예도 뒤늦게 회복하는 행운을 누렸다. 과연 이런 것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1] Louis 1er Phélypeaux de Pontchartrain(1643-1727) : 재무부 장관, 왕가 관리부 장관, 해군부 장관, 동인도회사 회장, 대법관을 두루 거친 인물. 1692년 5월 29일 라우그(La Hougue) 해전 당시 해군부 장관으로서 투르빌(Tourville) 부제독한테 무리한 전투 명령을 내려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한테 대패한 책임자로 거론된다.
[2] Nouvelle-France (Acadie) : 17세기 초 프랑스가 식민지 개척하기 시작한 지역으로 오늘날까지 프랑스어권이 일부 남아 있는 대서양 연안 캐나다의 북동부 지역.
[3] 하나는 세늘레(Seignelay) 장관을 위해, 또 하나는 익명으로(Monsieur *** : 자신의 외삼촌 피에르 레몽(Pierre Raymond), 마지막은 자신을 위한 원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