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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Mar 13. 2024

리얼한 너무나 리얼한 [열네 살짜리 소녀 무용수]

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 『열네 살짜리 소녀 무용수』

파리, 오르세 미술관
파리, 오르세 미술관
파리, 오르세 미술관

드가는 뛰어난 데생화와 파스텔화 그리고 일상 생활을 뜻밖의 시점으로 포착한 혁신적인 화가다. 그뿐 아니라 조각가로도 유명하다. 그가 조각에 손댄 것은 원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였다. 갓 마흔에 이미 오른눈이 반 실명 상태가 되어서였다. 빛을 견뎌내지 못하는 그는 파리에서 푸른색 안경을 낀 사람으로 유명했다. 화가한테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 그는 조각을 "장님이 하는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예민한 손의 촉각으로 나쁜 시력을 보완하려고 했을까?

작가가 죽었을 때 아틀리에에는 밀랍이나 찰흙 모형이 150개쯤 있었다. 1881년 5차 인상주의전에 출품한 [열네 살짜리 소녀 무용수]를 제외하면 다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었다. 조각하면 으레 고정되고 딱딱한 조형물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그는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용수나 말을 모델로 순간적인 움직임을 잡아낸다.

 

1956년 160000 달러에 미국인 폴 멜런(Paul Mellon)이 사들인 [열네 살짜리 소녀 무용수]의 밀랍 원본(1878-1881)은 그가 기증하여 현재 미국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밀랍 원작을 보존하기 위해 1921-1931년 사이에 에브라르(Hébrard)가 청동으로 주조한다. 29개의 청동은 파리, 런던, 워싱턴, 뉴욕, 코펜하겐을 비롯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

판매 기록을 보면 1971년 청동 하나가 380000 달러에 팔렸다. 또 하나는 소더비 경매장에서 13백만 파운드에 매각되었다. 21세기 초 존 마데이스키(John Madejski)경이 5백만 파운드에 구입하여 5년 뒤 12백만 파운드에 되팔았다.

평생 드가는 자기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지만 대단한 수집가기도 하다. 앵그르, 드라크루아, 도미에, 피사로, 마네, 코로, 시슬리, 고갱, 반고흐... 반고흐 작품까지 수집했다니 역시 작품 보는 눈이 놀랍다. 그가 죽었을 때 5백여 점의 걸작 회화와 몇 천 점의 석판화를 남겼다. 파산을 몸소 겪은 은행가의 아들이지만 돈을 무시하였다. 그한테 작품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궁할 때 마지못해 작품을 팔기는 했어도 돈과 명예에 눈먼 동료들을 경멸하였다. 사실 그는 수집가로서 미술관 건립을 꿈꾸던 인물이다.


원작은 대리석도 청동도 나무도 석고도 아닌 밀랍이 재료였다. 밀랍은 진짜 피부에 가장 가깝게 표현할 수 있고 대리석에 비해 다루기도 쉬운 재료다. 특히 데드 마스크 제작에 널리 쓰인다. 밀랍 모형은 주로 준비 단계에서 이용하는데 드가는 완성작을 밀랍으로 출품했다! 그는 밀랍에 색을 입혀 진짜 피부처럼 보이게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밀랍 조각에다 진짜 무용 슈즈를 신기고, 모슬린 무용 치마를 입히고는 진짜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을 씌우고, 머리 타래에 비단 댕기를 둘렀다. 청동에서는 무용 치마와 비단 댕기만 실물이고 나머지는 청동이다. 그리고는 미숙아를 알콜 병에 넣은 자연사 박물관의 표본처럼 밀랍 조각을 유리 용기 안에 가두었다. 이리하여 이 작품은 조각품이라기 보다 박물학자의 박제를 방불케한다. 진실감이 극도로 돋보여서 하이퍼리얼리즘의 원조가 아닌가 싶다. 이런 저런 혁신적인 기법과 놀라운 사실감으로 이 조각은 경악에 떨 스캔달을 불러 일으킨다.


여윈 소녀는 상체를 지나치게 뒤로 젖힌 자세다.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된 나머지 살아있는 무용수 같다. 콧구멍으로 새어나오는 소녀 무용수의 낮은 숨결이 들려올 듯하다. 고대 그리스 조각가가 만든 이상형 얼굴이나 몸매가 절대 아니다. 콧등은 곧지 않고 턱은 앞으로 튀어나와 보인다. 전시에서 이 조각을 맞닥트린 이들은 "이게 무슨 예술이야!", "괴물이군!", "예술이 더 이상 추락할 수 있을까?" 하고 기겁한다. 몇몇은 원숭이 같다, 머저리 아메리카 원시인이다, 조산아다, 옷 입힌 인형이다(소녀 무용수의 키는 고작 98센티다.) 하고 혹평한다. 드가 회화의 찬미자인 위스망스조차도 이 조각이 관람객한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고 쓴다. 어떤 비평가는 당시 유행한 인상학이나 골상학을 들추어 골 빈 인간처럼 튀어나온 이마며 짐승 주둥이 같은 입술이 관능적인데다 범죄인 인상이라고까지 몰아붙인다(Paul Mantz). 이런 스캔달이 일어나자 드가는 작품을 전시에서 거둬들여 자기 집으로 가져간다. 다시는 전시하지 않는다. 물론 팔지도 않는다. 한편 르누아르와 미술 비평가 에프뤼시(Charles Ephrussi)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사실주의 작품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소녀 무용수가 취하는 포즈는 수업 시간에 교사의 설명을 귀기울여 듣거나 휴식 때 취하는 동작이다. 고전 무용에서 말하는 카트리엠 포지시옹(quatrième position). 오른발을 수평으로 앞으로 내밀고 왼발에 무게 중심을 둔 채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머리는 뒤로 젖힌 채 두 손은 등 뒤로 모은다. 어린 무용수의 표정은 자못 진지해보인다.


1950년대부터 조각에 입힌 무용 망사 치마가 합섬이어서 작품과 잘 어울리지도 않고 시대 분위기도 되살리지 못했다. 1997년 오르세 측에서 파리 오페라의 문화부장 마르틴 카안(Martine Kahane)을 통해 의상 제작실에서 천연 망사 치마를 제작해달라고 의뢰하였다.


이 무용수의 모델에 큰 관심을 비친 마르틴 카안은 1년간 오페라의 음악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무용수의 신원을 캐내기에 이른다. 열네 살짜리 무용수의 모델은 마리 반구텐(Marie van Goethem(Gutten))으로 1865년파리에서 태어났다. 마리의 부모는 둘 다 벨기에 출신으로 생계를 찾아 파리로 이민온 사람이었다. 가난뱅이들이 모여사는 9구에 자리를 잡았다. 드가 역시 이 부근에 살았다. 마리의 아버지는 재단사이고 어머니는 세탁하는 여자였다. 1870년 무렵 마리의 아버지는 사라진 뒤였다. 가족을 버리고 떠났거나 아니면 사망했을 수도 있다. 빨래하는 일을 한 어머니는 가족 생계를 위해 매춘도 한 것으로 짐작된다. 마리는 언니 앙투아네트와 여동생 루이즈 사이의 둘째 딸이었다. 까막눈의 어머니는 세 자매 다 오페라 무용 학교에 보냈다.

딸을 무용 학교에 보내는 어머니 대부분은 무용수로 키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수입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딸을 거두는 어머니가 아니라 뚜쟁이에 가까웠다. 사실 무용수의 월급은 보잘것없었다. 초보 소녀 무용수의 일당은 2프랑이었다. 그래도 광부나 직공의 두 배에 해당했다. 결국 극빈층 출신의 어린 무용수는 이래저래 돈많은 후원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리와 앙투아네트는 드가의 모델로도 활약하였다. 1870년대에 이미 무용수 화가로 유명한 드가는 1885년에 가서야 예행 연습에 참관하는 자격을 얻었다. 그 전에는 직접 관찰하지 않고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고 한다. 대신 무용수를 집으로 불러 포즈를 취하게 했다. 드가는 마리의 하루(4-5시간) 모델료로 4프랑을 지불하였다. 오페라 무용수의 일당에 비해 두세 배 많은 돈이었다. 마리는 드가의 조각뿐 아니라 그림의 모델로도 등장한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된 [발레 수업](1878-1880)에서 오른편 앞쪽 머리를 풀어헤치고 등돌린 모습으로 나온다.


[발레 수업](1878-1880), 필라델피아 미술관


여성 혐오자로 알려진 드가는 마리와 육체 관계를 갖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모델과 화가는 내밀한 관계로 발전되는 수가 많다. 쿠르베는 모델 비르지니 비네(Virginie Binet)와의 사이에 사생아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상처입은 남자](파리, 오르세 미술관)라는 자화상을 엑스선 촬영한 결과 애인과 나란히 누워 있는 그림에서 여자를 지운 흔적이 발견되었다. 바로 비르지니 비네로 딴 남자와 결혼해서 쿠르베가 상처입은 자화상으로 연출한 것이다. 10년 사귄 다음 결혼한 르누아르의 부인(Aline Charigot)도 모델과 화가의 관계였다. 르누아르의 [시골 사람의 춤](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알린 샤리고이다. 모네의 첫 번째 부인 카미유도 화가의 모델이었다. 세잔 부인(Hortense Fiquet)도 마찬가지다. [풀밭 위의 식사]와 [올랭피아] 등에서 나체 여인으로 등장하는 마네의 모델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도 단순한 모델 역할만 한 게 아니었다. 마네가 열두 번 그린 인상주의 여류 화가 베르트 모리조도 모델과 화가의 관계 이상이었기 쉽다. 묘하게도 모리조는 마네 친 남동생과 결혼하여 제수가 되었다. [풀밭 위의 식사]에서 오른편에 모자쓰고 지팡이 쥔 남자가 바로 모리조의 남편이 된 외젠 마네다. 반고흐가 헤이그에서 일 년 반(1882-1883) 동거한 매춘부 출신 시엔도 모델과 화가로 출발한 경우였다. 시엔은 바로 멋진 데생 [슬픔 Sorrow]의 모델이다.


매춘의 길로 들어선 마리의 언니 앙투아네트는 강절도범으로 감옥까지 간다. 1879년 열세 살 때 마리는 다섯 살 어린 여동생 루이즈와 함께 오페라 무용 학교에 입학한다. 그런데 수업을 너무 많이 빼먹어서 1882년 5월 퇴학당한다. 이 시기가 마리가 화가들의 모델을 서는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 무용 학교에서 좇겨나더라도 이미 받은 급여를 환불하게 되어 있었다. 마리의 퇴학으로 수입이 줄어들어 집안 경제에 큰 타격을 가져왔을 터이다. 그해 7월 생존을 위해 언니 앙투아네트가 700프랑을 훔졌다. 마리는 열일곱 살 때 화가들의 모델을 서고 매춘을 하였다. 막내 루이즈만 착실하게 무용수의 길을 걸었다. 1890년대에 루이즈는 무용수로서 제법 명성을 얻었으며 그다음에 파리 오페라단의 무용 교사가 되었다.


당시 무용수라면 극빈 계층 출신으로 입을 하나 덜 양으로 무용수로 보내던 시절이다. 1주에 3회 공연 가입한 오페라의 정기 가입자들에게 몸을 파는 창녀나 다름없었다. 오페라의 단골 손님들은 1930년 금지되기 전까지 무용수의 대기실이며 예행 연습실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들은 어린 무용수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다.

"꼬마쥐"(petit rat)라고 부르던 소녀 무용수는 다른 한편 별명이 창녀(marcheuse)일 정도로 나쁜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그렇다고 오페라 무용수가 늘 창녀의 이미지로 남는 것은 아니다. 나중 가면 이미지가 바뀐다. 예를 들어 쿠르베가 그린 [세상의 기원]의 모델 콩스탕스 케니오도 마리와 비슷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문맹의 하층 노동자 어머니를 둔 그녀가 27세에 오페라 무용수를 그만둔 다음 사교계 여성으로 생활하지만 말년 들어 가난한 예술가를 돕고 자선 사업을 하여 나쁜 이미지를 벗는다.


드가의 [열네 살짜리 소녀 무용수]에 사로잡혀 있던 여류 소설가 카미유 로랑스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의 집은 거대한 매음굴로 변했는데 모두가 눈감아주었다." 30년간 [열네 살짜리 소녀 무용수]의 사진이 들어간 엽서를 책상에 두고 작업한 로랑스 역시 무용수가 되려고 했다가 어쩔 수 없이 무용을 그만둔 이력이 있다. 디종에서 여덟 살의 그녀와 함께 무용 수업을 받던 열 살의 언니가 무용 선생으로부터 폭력을 당한 다음 가족의 결정으로 그만두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자매였다는데... 그녀의 집안 내력 역시 드가의 무용수 모델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1890년생인 그녀의 증조 할머니는 프랑스 북부의 탄광촌에서 본의 아니게 임신을 하자 익명성이 보장되는 파리로 도피하게 되었다. 아이의 아비가 없는 편모로 1907년에 할머니를 낳았다. 로랑스는 평생 할머니가 재단 보조사로 일한 줄 알았다. 그런데 2016년 호적을 캐본 결과 재단사가 아니라 하녀 출신이었다. 그 이후 디종에서 할머니는 미용실 원장이 되었는데 자신의 전력을 숨겼던 것이다.


마리의 언니 앙투아네트는 후원자를 만나 웬만한 삶을 살다가 1898년 37세에 베르사유에서 사망한다. 한편 세 자매의 어머니는 1908년 70세에 파리 오페라 안에서 사망한 기록이 나온다. 막내 루이즈는 죽을 때까지 화가 페르낭 퀴뇽의 존중받던 정부였다. 그런데 소녀 무용수의 모델인 마리는? 1882년 이후 마리는 드가의 수첩 명단에서도 사라지고 다른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죽음에 관한 흔적은 더더욱 찾을 수 없다. 현재로선 무덤도 없으며 흔적없이 사라진 마리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남아 있다.


2003년 파리 오페라단에서 [드가의 소녀 무용수]라는 창작 발레가 선보였다. 파트리스 바르(Patrice Bart)가 마르틴 카안과 함께 쓴 대본을 바탕으로 안무를 맡았다.


시인 발레리(Valéry)는 드가의 무용수들 묘사를 두고 "무용의 노예"인 "무용수들을 (...) 포획해서 명확하게 표현한다."고 평한다. 드가는 극빈층 출신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소녀 무용수를 통해 당대 사회의 "추함과 수치심"을 숨김없이 실감하게 묘사해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게"까지 한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 생활”의 단면을 잘 드러낸다.


[열네 살짜리 소녀 무용수]는 1881년 발표 당시 깜짝 놀랄 사실감으로 스캔달을 불러일으켰듯이 지금도 여전히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아 발길을 멈추게 한다. 야유와 경멸, 멸시만 떠안던 출품 때와 달리 이제 모든 이들이 호기심과 경탄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흔적없이 사라진 마리는 이렇게 살아남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참고 자료

Camille Laurens, 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Gallimard, 2017.

Gabriella Asaro, "Degas sculteur et la réalisme audacieux de la Petite danseuse de 14 ans", l'Histoire par l'image, novembre 2009.

https://www.musee-orsay>Accueil>Les collections : Edgar Degas -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https://fr.wikipedia.org/wiki/La_Petite_Danseuse_de_quatorze_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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