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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Jan 10. 2024

파리에 눈이 내리면

거짓말 같이 파리에 눈이 내렸다. 비만 자주 내린다고 투덜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낮 최고가 영하 1도로 내려가면서 성긴 눈이 내렸다. 쌓일 정도도 아니고 눈이 내린다고 하기에는 민망한 눈이었다. 그저 눈 송이가 바람에 흩날리며 소매에 몇 개 들러붙는 정도였다.


어젯밤 몇 시간 동안 눈 예보가 빗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창을 열어보니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초록빛 풀이 눈 덮인 위쪽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출근하는데 그제처럼 눈발이 가끔 흩날렸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오솔길에 접어들자 눈 뒤집어 쓴 지붕이 동화 속에 나올 법한 풍경으로 변해있었다. 얼른 휴대 전화기를 꺼내들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2018년 2월 말 3월 초에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오랫동안 녹지 않고 쌓여 있었다. 어렸을 때 총기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숱하게 받았건만 이제 기억력이 한심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사진첩을 뒤져보니 2019년 1월과 2021년 1월에도 눈 내린 풍경을 찍은 사진을 발견하였다. 그 이후 눈이 내려 쌓인 것을 본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파리 쪽에 눈이 내려 쌓이는 일은 그야말로 기록할 만한 사건이다. 그 귀한 눈님이 내려 녹지 않고 쌓여 있네!

아파트 단지의 오솔길


처음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으로 가는데 프랑스 북쪽 지방을 지나는 내내 눈이 내렸다. 처음 내딛는 영국 땅에도 눈이 내려 있었다. 호텔에 나보다 늦게 도착한 친구는 카디프에서 런던오는 버스표를 끊었다가 눈사태로 운행되지 않아 기차편으로 왔다고 했다. 런던에서 리버풀 갈 때도 온통 설국이었다. 기차가 지나는 평원은 눈이 아니었다면 지루하게 느껴질 엇비슷한 풍경이었다. 한참을 가야 주택이 나타나고 개울이 들판 사이로 더러 보이고 산 없이 둔덕만 스쳐지나갔다. 가도가도 눈 천지! 3월 초에 이런 풍경을 보다니... 먼저 한 편의 산문시 같은 [삼포가는 길]이 절로 떠올랐다. 황량한 프랑스 중부 지방의 눈 내린 겨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대장 몬느 Le Grand Meaulnes]도 생각났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또 [눈내리는 포구]가 조건 반사처럼 뒤따랐다. 개가식이던 자유 열람실 흡연실에 들어가면 [산유화] 몇 소절도 눈에 띄지만 또 한켠에다 누군가


"그대 어깨 너머로 눈 내리는

세상을 본다

석회의 흰빛

그려지는 생의 답답함

 (...)


포구로 가는 길이

이제 보이지 않는구나"


하고 적어두었다. 가끔 내리는 눈은 일상의 풍경을 지우고 황홀한 장면을 연출한다. 끝간데 없는 눈 풍경을 이렇게 길게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꼭 한 편의 시가 쓰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버풀에서 런던으로 되돌아오던 날 기차 운행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예상보다 한 시간 반 이상 늦게 유스톤역에 도착했다. 물론 눈 때문은 아니었다. 오후 일정이 내셔널 갤러리였다. 언더그라운드 밖으로 나왔을 때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별 볼품 없는 트라팔가르 광장이며 내셔널 갤러리 건물이 눈발에 가려 한결 멋있어 보였다.


파리쪽에 눈이 많이 오는 때는 2월 말에서 3월 초다. 2018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어느 해 학생 단체 가이드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2018년보다 훨씬 많이 쌓였었다. 2주 가량 눈이 녹지 않고 길바닥이 얼어붙었다. 이날도 도로에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 바퀴가 많이 지나간 끝쪽은 빙판이 되었다. 이런 빙판길을 뚫고 어떻게 버스로 이동하나 무척 긴장하였다. 그래도 노련한 기사님 덕분에 용케 일정을 잘 소화내었다. 혹시 눈구덩이에 버스가 미끄러져 사고가 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었다. 행선지로 이동할 때면 인솔자로 나온 원장 선생님께서 역사 강의를 해서 나는 속으로 긴장하면서도 창밖 풍경만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에서 짠하고 나타난 짠다르크!” 아마도 루아르 고성 지대로 가려다 행선지를 바꿔 보르비콩트성을 방문한 것 같은데 아득한 옛일이다.


대학 시절 눈 내린 신림동도 지울 수 없는 풍경이다. 한번 내려 얼어 붙으면 한 달 가까이 갔다. 도서관에서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밤길 미끄러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눈 쌓인 언덕을 내려왔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날씨였다. 엄마가 금호 장터에서 사다 준 빨간 스웨터를 받쳐 입고, 작은형이 대학 입학 선물로 사준 겨자색 얇은 잠바떼기를 걸치고 목도리도 하지 않은 복장이었다. 그나마 하얀 바탕에 파란 솔잎 사이로 비치는 붉은 가로등 불빛이 추위를 조금 누그러뜨려 주었다. 이럴 때는 발작국이 적은 눈을 밟고 내려오는 게 안전하다. 도림천을 따라 걸을 때도 사람들이 덜 디딘 눈 쌓인 쪽을 골라 걸었다. 길가를 따라 죽 늘어서 있던 포장마차에서 호떡이며 떢볶이, 오뎅, 쥐포를 팔던 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곱은 손을 호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 하숙집이 있는 마을 어귀로 접어들면 담벼락에 고드름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직도 겨울이면 그 언덕배기 담벼락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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