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쪽은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드물다. 살얼음판이 된 물 웅덩이를 보거나 서리 내린 풍경도 구경하기 힘들다. 눈 쌓인 풍경은 아예 희귀하다. 유독 이번 가을 겨울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20여년 전까지 파리가 원래 그런 날씨였다. 가을 겨울이 우기였는데 10여년 전부터는 비가 덜 내리며 오히려 사계절이 뚜렸해졌다.
그런데 오늘 밤부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 내일은 낮 최고가 영하 1도에 머문다. 북극에서 몰려오는 한파가 일 주일쯤 갈 모양이다. 일년 중 가장 추울 때가 크리스마스 전부터 새해 초까지인데 올 겨울은 추위가 한 발 늦게 찾아왔다. 방 안에서도 책상 앞에 앉으면 발이 시린 것이 바깥 한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아직 영하로 떨어지기 전인데도 창문을 열면 찬 공기가 바로 볼에 와 닿는다.
올해 첫 일요일인 1월 7일 오늘이 카톨릭 축일이다. 예수가 태어나서 12일 걸려 베델레헴에 도착한 동방박사 오신 날! 종교 축일이라기보다는 민속 축제다. 크리스마스 이브로부터 2월의 사육제(carnival : 마지막 날인 mardi gras(비육한 화요일)가 절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살찌우는 철이다.
프랑스에서는 주현절에 조그만 사기 인형(fève)이 숨겨진 아몬드 크림이 듬뿍 들어간 갈레트(galette)를 먹는다.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식탁 밑에 숨어 같은 크기로 자른 케익 조각을 무작위로 나누어준다.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서 갈레트는 반드시 안쪽부터 베어물어야 한다. 보통 페브는 가장자리 쪽에 들어 있다. 너무 일찍 페브가 발견되면 싱겁기 때문이다. 인형을 발견하는 사람이 한 해의 왕으로 선출된다. 그러면 왕관을 씌우준다.
과자 속에 넣는 페브는 원래 강낭콩이었다가 속임수를 못쓰게 하려고 19세기 말에 와서 사기 인형으로 바뀐다. 봄에 일찍 싹을 틔우는 강낭콩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강낭콩을 통해 왕을 선출하는 풍습은 동지 때 시작되는 고대 고마의 사투르누스 축제 때 주인과 노예의 주객전도 풍습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주인과 노예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데 과자 속에 숨겨둔 강낭콩을 먹는 노예가 그날의 왕으로 선출된다. 이렇게 선출된 노예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었다. 그런데 4세기에 들어오면서 카톨릭에서 예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그로부터 12일 뒤를 동방박사 오신 날로 정하면서 카톨릭 축제와 민속 축제가 하나가 된다. 중세 수도원에서 수도원장이 한 해의 일을 주관한 사람을 뽑을 때 공정성을 지키려고 이 방법을 썼다고도 한다. 14세기 한 식탁에서 술을 마실 때 강낭콩에 당첨된 사람이 모든 회식자의 술값을 지불하는 풍습에서도 유래한다.
가족이 셋인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통해 갈레트 조각을 먼저 고를 사람을 정한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페브를 아이한테 돌아가게 하려고 일부러 아이 몫에 끼워넣곤 했다. 어쨌거나 어제 저녁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내가 꼴찌였다. 세 번째 조각을 집어들었는데 거기서 페브가 나올 줄이야!! 스스로 왕관을 쓰고 페브를 오른손에 쥐고 셀카를 몇 장씩 찍었다. 우리집에는 지금까지 셋 가운데 내가 가장 많이 페브에 당첨! 물론 한 동안은 가위바위보에서 내가 거의 1등하다시피 했다. 최근 들어 신기가 떨어졌는지 몇 년 연속 계속 꼴치다. 우리집은 1월초에 시작 2월달까지 몇 차례 갈레트를 먹는다.
2월 초 한번으로 넘어가기 섭섭하다고 2차전을 벌였다. 이번에는 가위바위보도 없고 일방적으로 골라먹게 되었다. 첫번째 세 조각에서 페브가 나오지 않아 이튿날로 서스펜스가 이어졌다. 이번에도 순서없이 갈레트를 먹었다. 이런 걸 운이라고 해야 하나? 먼저 두 사람이 골라먹고 마지막으로 남겨둔 내 몫에서 또 페브가 들어 있었다. 첫번째 페브는 메리노 양이었는데 두번째는 펭귄이 나왔다. 사진첩을 뒤져보면 거의 해마다 내가 왕관을 쓴 사진이 있다.
추위가 몰려온다는 일기 예보에 어제 지하 창고에 내려가 몇 년 전 사용하고 보관해둔 제라늄을 보호하는 천을 갖다두었다. 오늘밤에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다니 오늘낮에 덮어씌울 수밖에 없었다.
창문 턱 아래 길쭉하니 세 개가 설치된 화분을 흰 천으로 두르고 테이프로 붙이고나니 정말 월동 준비를 했다는 뿌듯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