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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2. 2022

매독으로 요절한 유명 인사들

매독은 주로 매독균을 보유한 사람과의 성적인 접촉을 통해 전염되어 성병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과 관련되어 "수치스러운 병"으로 여겨진다. 이 전염병이 넓게 퍼지면서 환자와 의사 사이에 비밀 유지가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매독이라는 전염병에 대한 자료를 읽으면서 왜 뛰어난 인재들이 요절하게 된 비밀이 한 꺼풀 풀렸다.


다른 전염병에 비해 아주 특이하게 진행되는 매독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


매독균에 감염되고 3주가량 잠복기가 지나면 성기 부위나 항문 주위에 피부 궤양이 생긴다. 이 궤양은 단단하고 둥글며 작고 통증이 없다. 이런 1기 매독은 특별한 치료 없이 며칠 만에 저절로 사라진다. 2기 매독은 궤양이 나타난 지 3-10주 뒤에 시작되며 피부 발진과 피부 점막의 병적인 증상으로 나타난다. 발진은 몸 전체로 퍼지며 손바닥과 발바닥에 특징적으로 발생한다. 이와 함께 발열이나 인후통, 두통, 근육통 등으로도 나타난다. 1기와 2기 매독 증상이 사라진 후에 치료를 하지 않는 경우 체내에 매독균이 남아 잠복상태로 여러 해 지속될 수 있다. 

3기 매독 증상은 보통 1기 매독 증상이 발생하고 3-15년 뒤에 치료를 하지 않은 10%의 환자한테 나타난다. 매독균이 혈관계에 침투하여 각종 내부 장기의 손상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어 중추신경계, 눈, 심장, 대혈관, 뼈, 관절 등에 이르기까지 매독균이 침범하여 발생한다. 그 결과 눈이 멀고 귀가 먹고 호색증이 발생하기도 한다. 또 판단 능력이 떨어지며 정신착란이나 심장 합병증이 일어난다. 치명적으로 변하기 전에 매독균은 뼛속까지 침범하여 관절통을 유발한다. 중추신경계를 침범하는 신경 매독의 경우 증상이 없거나 뇌막 자극 증상, 뇌혈관 증상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최근에 와서 매독 증상을 3기로 나누지 않고 피부 궤양 발생 1년을 기준으로 조기와 후기 둘로 구분한다.


1493년 바르셀로나에서 콜럼버스의 항해 선장(Martin Alonzo Pinzon)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매독으로 죽는다. 그런 까닭으로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1495년 2월 22일 나폴리 입성 때 에스파냐 용병은 쓰지 않았다. 분쟁이 끝나고 전 유럽에서 참가한 용병들이 제각기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면서 매독은 유럽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1498년부터 전염병이 전 유럽으로 급속도로 번지면서 "아메리카 병", "나폴리 병", "프랑스 병", "에스파냐 병", "독일병", "폴란드 병" 등 전파자를 늘 외국인한테 돌린다. 아랍인들은 매독을 "프랑크 여드름"이라고 부른다. 아시아에 매독이 번지자 "유럽 혹"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런데 아직도 매독의 진원지를 두고 아메리카다 유럽이다 아프리카다 하고 논의가 활발하다.

 

또 16세기부터 매독의 보균자는 늘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어떻게 해서 여자들이 감염되었는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 불결한 여자에서 유태인 병 사이에는 한 발짝거리밖에 없다. 대규모 전염병에는 늘 애꿎은 희생양이 필요하다. 이성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할 때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음모론이다. 주로 명확하게 사건이 드러나지 않을 때 음모론이 판친다. 또 앞뒤 관계가 선명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잘 되지 않을 때 음모론이 잘 먹혀들어간다.


중세 때부터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퍼지면 속죄양이 필요했다. 거지와 외지인 특히 유태인이 거기에 반드시 포함되던 속죄양 가운데 하나가 마녀였다. 가난해서 먹고살기 힘들어 농부에서 마녀가 된 여자들이 이유 없이 원흉으로 지목되어 화형 되는 일이 아주 오랫동안(1480-1680, 절정기는 1570-1630 사이고 종교 재판이 아니라 비종교적인 재판이었다.) 일어난다. 전염병을 퍼뜨리는 원흉은 늘 남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바이러스는 언제나 이방인이고 타자요 다른 곳에서 오는 사람이다."

 

1497년 유명 인사로는 처음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아들 체자레 보르자가 나폴리에 갔다가 22세에 매독에 걸린다. 그는 매독이 남긴 얼굴의 상처 자국을 숨기려고 검은 벨벳 마스크를 끼곤 하였다. 몇몇 추기경과 대주교 그리고 교황 알렉산드로 6세까지 매독으로 죽자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성수가 매독을 옮긴다고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독은 페스트에 가까운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하늘이 인간을 벌주기 위해 내린 재앙이라고 해석하기에 이른다. 독일 어느 지역에서는 온 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버리고 도망갔다. 파리에서는 매독 환자가 수도를 떠나지 않으면 사형에 처했는데 말을 듣지 않은 환자들을 센강에 던졌다.


이탈리아 원정을 하고 돌아와 프랑스 르네상스 문화를 일구어낸 프랑수아 1세는 매독에 걸려 9년 동안 끔찍한 고통 끝에 1547년  53세에  죽는다. 에스파냐가 중남미를 정복한 시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던 카를로스 5세도 매독에 걸린다. 국제무대에서 프랑수아 1세의 경쟁자로 로마 카톨릭에서 분파하여 영국 성공회를 만든 영국 왕 헨리 8세와 러시아 최초의 차르 폭군 이반도 이 병을 피해 갈 수 없다. 역사학자들은 16세기 유럽 인구의 20% 정도가 감염된 것으로 추산한다.


16-17세기에 걸쳐 흰 달리아 꽃송이 같은 두툼한 에스파냐풍 칼라와 나뭇잎이나 꽃잎 같은 넓은 레이스 칼라가 유행했다. 이 당시 귀족들의 초상을 보면 남녀 할 것 없이 지나치게 거대한 목도리 같은 칼라 장식을 하고 있다. 목을 완전히 감추는 에스파냐풍 칼라는 우리의 옛날 형구인 칼을 차서 목이 졸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갑갑해 보인다. 꽃잎 모양의 칼라는 목을 어느 정도 드러내기는 했어도 여전히 목덜미 쪽은 가린다.


루브르의 3층 북구 회화 전시실에 걸려있는 포르부스(Frans II Porbus)의 [마리 드 메디치](1609-1610)의 초상을 보자. 왕비 책봉식 전야에 왕비의 예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마리 드 메디치의 초상이다. 진주를 비롯 각종 보석이 주렁주렁 달리고 금색 백합꽃 문양이 아로새겨진 드레스도 화려하지만 그녀의 목을 두른 흰색 칼라가 바로 눈에 띈다. 메디치풍 깃이라고 부르는데 목덜미를 완전히 감싸고 턱 부분에 와서는 펼쳐 치는 거대한 레이스 칼라이다. 프랑스 왕가와 메디치가의 문장인 백합 꽃잎 모양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니콜라 푸생이 높게 평가한 궁정화가 포르부스가 1610년에 그린 마리 드 메디치의 남편 앙리 4세의 초상(루브르 소장)을 보면 화환 모양의 칼라를 두르고 있다.


루벤스가 1621년에 주문받고 2년여 만에 그린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 24점 가운데 « 마리 디 메디치의 왕비 책봉식 »(루브르, 메디치 갤러리)에서도 앙리 4세는 화환형의 스페인풍 칼라를 두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루벤스의 «마르세유항에 도착하는 마리 드 메디치» (루브르, 메디치 갤러리)에서 포르부스의 그림처럼 메디치풍 깃을 한 마리 드 메디치를 수행한 왼쪽 토스카나 대공부인(숙모)와 오른쪽 만토바 공작부인(언니) 둘 다 화환형 주름 장식 깃을 두르고 있다. 화면 가운데 현실 세계의 세 여인과 짝을 이루게 배치한 하단의 전설적인 세 처녀 뱃사공(미의 삼여신의 알레고리)이 한층 돋보인다. 루벤스가 정착한 북구의 미녀답게 글래머 여신들이다. 이 처녀 뱃사공들은 안간힘을 다해 배를 정박시킨다고 물속에서도 엉덩이에 땀방울이 맺힌다. 진주처럼 맺힌 저 땀방울은 이백 년 지나 지옥의 강의 뱃사공들이 물려받는다 (들라크루아, [지옥에 가는 단테와 베르질리우스], 1822, 루브르 소장). 이것을 두고 베꼈다고 하면 안 된다. 선배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라고 보아야겠다. 모델을 잘 응용하면 대가요 아무 생각 없이 복사하면 아류가 되는 법!

 

1634년 렘브란트가 27세에 그린 네덜란드 부르주아 상인 부부의 초상을 보자. 부인은 오른손에 검은 부채를 남편은 왼손에 장갑을 쥐고 있다. 두 사람의 복장은 모두 당시 최고급이던 검은색 천으로 된 복장이다. 검은색 물감이 가장 비싼 시절이었다. 두 초상에서도 검은 복장에서 어깨까지 덮는 흰색 칼라가 얼굴을 비추는 각광처럼 보인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에 보관 중이던 이 둘의 초상은 2016년 매각될 때 남편 초상은 루브르가 부인 초상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리익스 뮤지엄이 따로 구입한다. 대신 부부를 따로 떨어지게 할 수 없다는데 동의하고 두 박물관이 합의하여 파리와 암스테르담을 번갈아가며 둘을 나란히 전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무리 부부라도 초상마저 붙어 지내란 법이 있나?


매독은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한테는 1기 매독 증세인 피부 궤양이 나타나지 않고 2기 매독이 되면 목을 돌아가며 멜라닌 색소가 나타난다. 이것을 비꼬아서 "비너스 목걸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세르(Michel Serres)가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한 콘퍼런스(Le corps : esthétique et cosmétique)에서 르네상스 말기에 유행한 몇 겹 레이스 주름 장식의 거대한 칼라가 여자들한테 나타나는 매독 2기 증세를 감추려 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듣고 나는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렇다면 페스트에 버금가는 재앙으로 여겨진 매독에 대한 처방은 과연 어떤 것이었나? 고대부터 피부병 치료에 이용되던 수은 소금이 1540년대부터 치료제로 쓰이기 시작했다. 수은 처방은 돌팔이 의사들과 이발사들을 통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17세기 중반까지 "돌 자르는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은 외과의사는 이발사 길드 소속이었다. 18세기 말에 발표된 디드로의 [숙명론자 자크]를 보면 자크가 입은 그다지 심하지 않은 무릎 총상을 두고 이발사 외과의사는 바로 다리 절단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그런 까닭으로 과학이 제자리를 잡기 전까지 의사 하면 으레 돌팔이나 사기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1908년에 에리히(Paul Ehrich)가 개발하여 1910년 살바르산(Salvarsan)이라는 이름으로 시판된 의약이 나오기 전까지 다양한 매독 치료책은 그 어느 것도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다. 특히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3세기 동안 수은 향기로 훈증을 하고 수은을 바탕으로 제조한 용제로 궤양에 문지르거나 씻기도 하고 목욕도 하고 정제나 시럽으로 먹기도 했다. 중독성이 강한 수은 요법은 치료는커녕 환자한테 질식, 현기증, 정신착란을 불러일으키며 고통을 곱절로 안겨주었다. 최악은 20-30일간 수은 증기를 들이마시는 훈증 요법이었다. 그 결과 혀에 설염이 생기고 이가 빠졌다. 치료율이 1% 될까 말까 한데도 의사들은 계속해서 이 처방을 내렸다. 16세기 말에 나온 어떤 책에서는 이런 구절을 읽을 수 있다. "매독을 없애는데 특효약은 수은이다! 수은이 매독을 없애지 않을 때는 환자를 제거한다. " 이미 16세기에 페르넬(Jean Fernel) 같은 의사는 수은 요법은 유독성이 있고 치료 효과가 없다고 규탄하였다. 1760년 성병 전문의 아스트뤽(Jean Astruc)은 37명의 매독 환자를 상대로 수은 훈증요법 실험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중 4명은 빨리 죽었고 22명은 치료되지 않았으며 나머지 11명이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증세가 호전되었다. 

매독은 1550년대부터 치명성이 줄자 공포심이 덜해지고 16세기 말이면 가벼운 병으로 여겨 경계심이 늦추어진다. 그  결과 매독은 규칙적으로 다시 나타나 기승을 부린다. 특히 루이 14세 시절 매독은 환심을 사려는 병쯤으로 간주된다. 매독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가발을 쓰고 분을 바르고 얼굴에 생긴 고름 헌데나 종기를 가리려고 애교점을 붙였다. 당시의 화장술이 매독과 관련이 있었다니…!


19세기 중반까지 의사들은 환자들한테 매독 치료를 권유하기 쉽지 않았다. 그만큼 매독의 초기 증상은 심하지 않고 통증이 없기 때문이었다. 19세기에 매독이 크게 번지면서 특히 유명 예술가들이 줄줄이 매독으로 죽거나 고통을 당한다. 유독 독일 낭만주의 예술가들 중에 매독 희생자가 많다. 또 유명 문학가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남자 예술가한테 매독도 악마의 유혹처럼 뿌리칠 수 없는 뮤즈인가?

 

매독에 걸려 고생했거나 죽은 유명인사들의 분야별 목록은 다음과 같다. 태어난 순서대로 배치하였다. 


여성편력의 대명사 카사노바(1725-1798)가 매독의 희생양이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음악가 : 모차르트(1756-1791), 베토벤(1770-1827), 파가니니(1782-1840), 슈베르트(1797-1828), 도니제티(1797-1848), 슈만(1810-1856),  스메타나(1824-1884), 샤브리에(1841-1894)… 

문학가 : 호프만(1776-1822), 하이네(1797-1856), 보들레르(1821-1867), 플로베르(1821-1880), 도스토옙스키(1821-1881), 톨스토이(1828-1910), 쥘 드 공쿠르(1830-1870), 도데(1840-1897), 베를렌느(1844-1896), 모파상(1850-1893), 와일드(1854-1900), 랭보(1854-1891), 조이스(1882-1941), 카프카(1883-1924)…  

철학자 : 쇼펜하우어(1788-1860), 니체(1844-1900)… 

화가 : 마네(1832-1883), 고갱(1848-1903), 반 고흐( 1853-1890), 툴루즈 로트렉(1864-1901)… 

정치인 : 프랑수아 1세(1494-1547), 카를로스 5세(1500-1558), 나폴레옹 1세(1769-1821), 레닌(1870-1924), 스탈린(1878-1953), 무솔리니(1883-1945)...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매독으로 고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된 것이 납중독에서 온 거라고 하는데 매독 하고도 관련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슈만은 마흔여섯에 매독 증세로 광기에 빠져 죽는다. 호프만, 하이네, 보들레르, 마네, 모파상 등은 전신에 마비가 오면서 죽는다. 호프만은 신경 매독에 걸려 전신 마비가 온다. 그렇지만 죽기 전까지 정신은 멀쩡하였다. 슈만과 보들레르처럼 호프만도 마흔여섯에 죽는다. 슈베르트와 툴루즈 로트렉은 25세에 매독에 걸린다. 슈베르트는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엾은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사랑과 우정의 행복도 고통만 준다."라고 절망하며 새파랗게 젊은 나이 서른 하나에 죽는다. 툴루즈 로트렉은 반 고흐와 라파엘로처럼 서른일곱에 생을 마감한다. 말년에 하이네는 매독의 고통을 잊기 위해 모르핀에만 의지한다. 죽기 직전 보들레르는 실어증이 왔으며 마네는 죽기 전 다리까지 절단하였다. 마흔이 넘어 매독에 걸린 니체한테는 차라투스트라의 출현이 매독 3기와 우연히 일치한다.  


매독으로 가장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죽은 유명인사로는 모파상이 단연 유명하다. 다음은 피부과 전문의 알리우와(Bruno Halioua)의 « 모파상과 매독, 비극적인 삶 »이라는 글을 요약하고 발췌 번역하였다. 프랑스 단편소설의 대가인 그는 호색한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모파상은 하룻밤에 스무 번까지 가는 기록을 세웠다고 떠벌리면서 경비원한테 자신의 성과를 확인시키기까지 하였다. 그의 병력은 자신의 서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다. 모파상한테 나타나는 매독 증상의 변화는 그야말로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을 연상케 한다. 

스물일곱 살 때 모파상은 뱃놀이 파트너 가운데 한 여인과의 관계에서 매독에 걸렸다. 1877년 3월 2일 자 팽숑(Pinchon)이란 친구한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힌다. "의사가 방금 나한테 어떤 신기한 발견물을 알려주었는지 자네는 짐작도 못할 거야… 매독이야… 드디어 매독에 걸렸어, 하찮은 임질이 아니고 진짜 매독… 프랑수아 1세가 걸려 죽은 그 병 말이야. 참 자랑스럽네…  제기랄, 매독에 걸렸네. 그러니 매독에 걸릴까 봐 겁낼 필요가 없어."하고 유머러스하게 밝힌다. 매독 진단이 내려진 다음 바로 그해 3월에 몇 가지 약물 처방과 유황 온천욕 등의 치료를 받는다. 같은 해 모파상은 투르게네프한테 머리가 몇 움큼씩 빠진다고 투덜댄다. 이때부터 그는 머리를 짓 빻는 듯한 심한 편두통으로 한 시간 이상 책을 읽을 수 없다고 걸핏하면 불평을 늘어놓는다.

1880년 모파상은 시각장애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그는 플로베르한테 이렇게 말한다. "오른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오른 눈을 감아야지 겨우 글을 쓸 수 있을까 말까에요." 같은 해 3월 더 자세하게 말한다. "오른 눈의 조절작용에 마비가 왔어요. 아바디 의사 말로는 이 증상은 거의 고칠 수 없다네요."

시각장애로 모파상의 삶은 그야말로 가혹한 시련으로 바뀐다. 1890년에 이렇게 토로한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고난의 순교자가 된 듯해요… 지독하게 고통스러워요… 볼 수 없으니 글을 쓸 수가 없어요. 내 인생은 파탄이 났어요."

1889년 가을부터 전신마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2년 동안 매독 증상이 악화되면서 모파상의 문학 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는 앞으로 영원히 도피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면서 끊임없이 주거지를 바꾼다. 파리에서 칸으로, 피레네 지방에서 알제리로, 이 온천장 저 온천장으로 떠돌아다닌다.

이 시기 모파상의 글쓰기에 장애가 생긴다. 전신마비 증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근육통으로 글자가 구불거리고 문장에서 어떤 음절이나 낱말이 빠지기도 한다. 특히 문체가 반복적이고 유치하게 변한다.

그는 하루 종일 두통과 안구통에 시력은 떨어지고 환각과 환청 현상이 자주 생긴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와 더불어 신체도 변모된다. 노인 같은 얼굴이 여전히 기운차고 건장한 체구와 대조를 이룬다. 일 년 뒤 1890년 11월 23일 루앙에서 있은 플로베르 기념물 제막식 때 모파상을 마주친 공쿠르는 다음 같이 일기를 남긴다. "모파상의 나쁜 안색이며 야윈 얼굴에 불그스름한 혈색… 게다가 병적인 고정된 시선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1891년 여름 모파상은 오래된 화가 친구 푸르니에(Fournier)한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해. 사실이야… 점점 더 편두통이 지독해져. 안티피린을 먹어야지만 조금 가라앉아... 그렇지만 이 독약 때문에 내 기억력에 엄청난 결함이 생겼다고 봐. 가장 간단한 말들조차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늘이나 집이란 말이 필요할 때면 이 말들이 금방 내 머리에서 사라져 버린다니까."


전신마비의 두 번째 시기는 정신쇠약으로 드러나는데 1892년 1월 2일 밤에 시작된다. 그날 밤 프랑수아와 레몽은 모파상의 방에서 큰 소리가 나서 잠에서 깨게 되었다. 두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안간힘을 다해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하는 작가를 발견한다. 모파상은 입안에 권총을 쏘려고 했지만 엽렵한 하인이 총알을 빼놓은 상태여서 수포로 돌아가자 절망한 나머지 자신의 목을 벤 것이었다. 둘이 가까스로 그를 제압하여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그는 혼란스럽고 낙담해 있었다. 저녁에 그는 이렇게 울부짖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프랑수아 준비됐어? 떠나자고. 전쟁이 선포되었어."

이 소식을 들은 모파상의 어머니는 바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 에밀 블랑쉬(Emile Blanche)한테 상담을 한다. 에밀 블랑쉬는 작가를 파리로 데리고 와서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고 판단한다. 블랑쉬 의사는 건장한 간호사를 칸으로 내려보내 구속복을 입혀 모파상을 파리로 데려오게 한다. 결국 1892년 1월 7일 모파상은 40년 전 네르발이 이미 거쳐간 파시의 유명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죽기 전 몇 주 동안 그는 무기력한 상태로 누워 있거나 간질 발작으로 몸을 떨었다. 1893년 7월 6일 혼수상태에 빠져 지켜보는 가족도 친구도 없이 홀로 숨을 거둔다. 그의 부모는 단 한번 정신병원으로 문안 왔을 뿐이고 장례식에 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모파상은 매독에 감염된 지 16년 지난 43세 젊은 나이에 자신의 예언처럼 생을 마감하였다. "혜성처럼 문단에 나타났다가 벼락 치듯 문단을 떠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모파상의 작품 세계에 환청이나 환각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또한 모파상이 장편보다 주로 단편을 많이 쓴 것도 이 병 하고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작품을 인과관계로 해석해서는 되지 않지만 때로 작가의 삶이 작품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1900년 통계를 보면 파리 시민의 16%가 매독에 감염된 것으로 추산한다. 당시 파리에는 10000-15000 개의 매춘업소가 있었고 매춘부는 대략 30만을 헤아렸다. 한편 런던 시민의 10%가 매독에 감염되었으며, 모병한 미군의 20%가 매독으로 고통당한 것으로 본다.  에리히가 개발한 매독 치료제는 1928년 페니실린이 발명되고 1940년대에 항생제가 상용화될 때까지 대거 사용되었다. 항생제를 통해 매독이 완전히 퇴치된 듯 하지만 1999년 이후 유럽과 미국에 재발하였고 아프리카에서는 계속해서 큰 피해가 나고 있다. 현재 매해 전 세계에서 천이백만 명이 매독에 감염된다. 에이즈와 마찬가지로 가장 확실한 예방은 역시 콘돔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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