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샤 pacha Feb 22. 2022

[메두사호의 뗏목] - 난파 사건을 역사화로

실물 크기로 제작한 메두사호의 뗏목, 로슈포르의 해양 박물관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 1791-1824), [메두사호의 뗏목](1819년 살롱전 출품)


모리타니아 해안의 아르갱 모래톱

 [메두사호의 뗏목]은 세네갈로 식민기지 구축하려고 떠난 네 척의 배 가운데 1816년 7월 2일 오후 3시 오늘날 모리타니아 해안 모래톱에 걸려 좌초한 군함 메두사호 사건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사고 현장은 아프리카 해안에서 50킬로 떨어진 아르갱(Arguin) 모래톱이다. 28세의 제리코가 1818년 살롱전에 출품하여 입선하지만 앞서 그린 [근위대 장교](1812)나 [부상당한 기마병](1814)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을 사려는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종교화와 역사화가 주된 장르로 판치던 시절 신문의 사건사고난에 나올 이런 "당대 사건"을 주제로 삼은 것 자체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더우기 이런 내용을 엄청난 크기(491*716)로 그렸으니... 신화, 종교, 정치를 주제로 한 역사화가 으레 큰 판형을 띠는데 당대의 난파 사건을 아주 크게 그렸으니 문제작일 수박에. 이 점에서 제리코는 분명 "풍속화를 역사화 차원으로 끌어올린" [오르낭의 매장](1849)을 그린 쿠르베의 선구자다.

 네 척 가운데 세 척은 무사히 목적지 세네갈에 도착했다. 시설이 가장 좋고 전체 선단을 지휘하던 최신형 중형 군함(폭 12, 길이 40 미터) 메두사호만 좌초한다. 모래톱에 걸려 멈춘 뒤 사흘 동안 안간힘을 다해 배를 일으켜 세워 다시 물에 띄우려고 애썼지만 악천후를 만나 수포로 돌아간다. 마침내 비바람과 거센 파도에 배 밑바닥이 갈라져 물이 새어들어오기 시작한다. 처음 군함 메두사호에 탄 총 인원은 395명(승무원 167, 군인 160, 시민, 공무원, 과학자 68)이었다. 구명정 보트가 여섯 척인데 모든 사람이 다 탈 수 없는 노릇! 나머지는 뗏목에 태우기로 결정한다. 원래 뗏목은 짐 실기 위한 것이어서 사람이 타기에는 아주 불편하였다. 뗏목은 아래쪽 일부가 물에 잠기게 설계되어 있었다. 좌초한 메두사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남은 17명을 남겨둔 채 보트 여섯 대와 뗏목을 이용해 탈출한다. 8월 26일 메두사호에 남은 사람들 가운데 버려진지 52일 지나 세 명의 생존자가 구조된다.

메두사호의 모습

첫째 날 뗏목에 탄 사람은 정확히 152 명이다. 그래도 뗏목 위에는 포도주 다섯 드럼, 물 두 통, 비스킷(비상 식량으로 먹는 딱딱한 비스킷은 1870년 보불전쟁 때도 요긴한 먹을거리가 된다.) 한 통이 실린다. 게다가 일부 바닷물에 젖어버린 비스킷은 152명한테 그다지 먹을거리가 못된다. 그렇다면 얼마 되지 않는 물과 충분치 않은 포도주만 마시고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메두사호의 선장 쇼마레(51세)는 퇴역한 지 25년 되어 실전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왕립해군의 호의로 선장에 임명되었다. 실전 경험이 많은 이들의 말은 듣지 않고 아부꾼의 말만 믿다가 이꼴을 만났다. 중형 군함 메두사호가 좌초 전후에 취한 조치들은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수심이 앝아져 배가 모래톱에 걸릴 게 뻔한데도 뱃머리를 잽싸게 돌리지 않았다. 빨리 현명한 조처를 취했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메두사호의 조난은 나폴레옹이 물러간 뒤 들어선 복고왕정(1814-1830)의 실정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이리하여 메두사호의 사건을 두고 루이18세의 "복고왕정의 난파"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호된 여론에 밀려 쇼마레 선장은 사형은 커녕 가장 가볍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 박탈에 3년 징역형을 산다.

코레아르가 작성한 뗏목 모형


 1912년에 일어난 타이타닉호 사건에서 아이들과 여자들을 우선적으로 살린 한편, 메두사호의 난파에서는 주로 식민 통치자들을 태운 배여서 계급순으로 보트를 차지한다. 세네갈 식민총독과 장교들이 탄 보트에는 자리 여유가 있는데도 정원을 덜 채워 태운다. [메두사호의 조난]을 쓴 두 생존자(측량기사 코레아르와 의사 사비니)의 계산으로 보면 보트에 정원대로 탔다면 뗏목에 오를 사람은 152명이 아닌 128명인 셈이었다. 처음에는 보트와 뗏목을 밧줄로 연결해서 사이좋게 같이 출발한다. 악천후에 거센 파도가 몰아치자 자신들이 탄 보트가 위험에 빠질까 두려워 얼마 가지 않아 누군가가 밧줄을 슬그머니 풀어버린다. 아마도 세네갈 총독이 반란을 두려워한 나머지 명령을 내린 거라고 한다. 구명정들은 망망대해에 뗏목을 버리고 가버린다. 이제 돛도 없고 노도 없는 폭 7미터 길이 20미터의 뗏목(고문 기구라고 불렀다) 위에 잔인하고 야만적인 죽음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사건 전개를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메두사호의 조난]을 참조하라. 물론 이 책에 기술된 내용도 생존자의 증언과는 엇갈리는 점들이 있다.


 둘째 날 물이 무릎 위까지 차서 앉지도 못한 상태로 거센 파도에 떨구어져 죽기도 하고 배고픔과 갈증을 참다 못해 스스로 바다로 뛰어들어 이미 스무 명 정도가 희생된다. 그렇지만 가장 최악의 상황은 도형수 출신 하급직 군인들의 반란이다. 칼과 몽둥이로 무장하여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을 죽이려는 야만성이 드러난 것! 배고픔과 갈증, 공포에 시달려 지쳐빠진 상태에서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 예순 명 이상이 죽는다. 생존자(Griffon du Belley) 후손의 증언에 따르면 장교들이 뗏목의 무게를 줄이려고 의도적으로 하급직 군인들을 죽였다고 한다. 이제 뗏목 위에는 예순 여명의 사람이 남는다. 표류 사흘째 난동 사건 뒤 뗏목 위에 널브러진 시체를 뜯어 먹기 시작한다. 아마도 외과 의사 사비니의 제안으로 그렇게 했을 거라고 한다. 처음에 장교들과 양식 있는 민간인들은 인육을 먹지 않는다. 나흘째 다시 외국 출신들이 난동을 부려 열 명 정도가 시체로 남는다. 포도주만 마시고 살아남을 수는 없는 노릇! 물고기를 잡아 날로 먹다가 불을 피워 구워먹지만 배를 채우기에는 턱도 없다. 그러니 최고의 양식은 인육일 수밖에. 그때부터 모두가 계속 인육을 먹는다. 굶주림과 갈증, 두려움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 하나 둘씩 늘어간다.


 표류 4일째 생존자는 53 명이다. 표류 5일째 딱 서른 명만 남는다. 포도주 통에 구멍을 내 빨아 먹다 정한 규칙에 따라 군인 둘은 바다에 던져지고, 열두 살난 어린 수습생은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죽어간다. 이리하여 생선 12마리에 포도주 나흘 치만 남은 표류 7일째 뗏목에는 정확히 27명이 남는다. 물 대신 바닷물에 옷을 적셔 빨아먹기도 하고 오줌을 받아먹기 시작한다. 이틀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보이는 12명을 그래도 좀더 오래 살아남을 이들을 위해 바다에 던지기로 결정한다. 공평하게 나눠마시다가는 다 죽게 생겼기에 남은 포도주를 아끼기 위해서다. 그리고 장검 하나를 남기고 무기들을 모두 바다에 던져 버린다. 메두사호의 조난에 대해 책(Les Naufragés de la Méduse, Belin, 2016.)을 쓴 역사학자 자크올리비에 부동(Jacques-Olliver Boudon)에 따르면 표류 5일째 생존자가 30명이었지만 운신을 못하는 사람들을 바다에 집어 던진 결과 실질적으로 생존자는 15명이었다. 


 9일째 구조의 전조처럼 흰 나비 한 마리가 나타난다. 다음 날에는 갈매기가 날아가는 게 보인다. 물고기를 잡아 올리고 돛에 앉은 갈매기까지 노리지만 실패한다. 배고픔, 고통, 목마름, 공포에 이성을 잃고 착란 상태에 빠져들어간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데 절대 필요한 것은 젊음과 건강이 아니라 강인한 정신력이다. 15일 수평선 멀리 배 한 척이 나타난다. 희망을 품었지만 그 배는 뗏목을 보지 못했던지 그냥 지나쳐버린다. 표류한지 13일째인 7월17일 로슈포르(Rochefort)에서 같이 떠났던 범선 아르귀스호(L’Argus)가 정말 "우연히" 뗏목을 발견한다. 사실 아르귀스호는 뗏목의 생존자를 찾으러 떠난 게 아니라 메두사호에 남은 돈 부대와 상품을 되찾으려 파견된 것이었다. 구조선을 만났을 때 15명 가운데 5명이 죽는다. 결국 최후 생존자는 10명인 셈이다.


 제리코는 사건의 어떤 장면을 소재로 삼을까 고민고민하다가 열사흘 표류한 끝에 식인 풍습으로 살아남는 사건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준다. 인체 묘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기 직전의 사람들치고는 너무 건장한 육상선수의 모습이다. 신고전주의 대표 화가 다비드의 제자인 제리코는 스승으로부터 인체 묘사 방식은 그냥 물려 받는다. 분위기는 비극적으로 만들고 인물들은 모델들을 써서 건장한 신체로 그려낸다. 맨 왼쪽에 널브러진 흑인 시체에서 죽은 아들을 안고 명상에 잠긴 아버지를 거쳐 서서히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맨 오른쪽의 두 사람은 그래도 힘이 남아 수평선에 구조선을 발견하고는 살려달라고 옷자락을 펄럭인다. 움직임이 없는 시체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까지 동작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피라미드적인 상승 구도를 취하고 있다. 시체들은 방향을 잃고 살아남을 사람들은 오른쪽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기운을 뻗힌다. 돛줄을 중심으로 작품 전체의 구도를 잡으면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뗏목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그림의 인물 가운데 흑인들이 등장하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리코보다 일곱 살 어린 들라크루아가 제리코의 아틀리에에 들렀다가 모델로 등장한다. 아이 앉은 아버지 오른쪽에 등을 보이며 머리를 쳐박고 왼팔을 앞으로 뻗은 시체 모델이 들라크루아이다.


 이런 대작을 완성하려면 작가는 얼마나 많은 습작을 하는가? 루브르의 3층 프랑스 회화관에 가면 작은 판형 두 개를 볼 수 있다. 루앙 미술관, 릴 미술관, 앙제 미술관, 디종 미술관, 미국의 하버드 대학 미술관에도 각기 한두 점의 습작이 보관되어 있다. 대작이 하루 아침에 쓱 그려지는 법은 없다.


 제리코는 일 년 반 동안 준비 작업을 하고 다양한 모색을 한다. 난파 사건에 얽힌 정보와 생존자의 증언을 수집하는가 하면, 특히 시체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도 동시에 한다. 다양한 얼굴 묘사를 위해 정신병 환자나 편집증적인 인물의 표정도 따로 연구한다. 또 사실감을 부여하려고 뗏목 모형을 제작하고 밀랍인형으로 인물을 배치하기도 한다. 게다가 병원에서 팔 다리 시체 부분을 빌어다 아틀리에에 갖다두고 썩어가는 것을 관찰하면서 이 작품을 완성한다.


 사건의 장면 설정이나 작품의 구성은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최종판에 이른다. 병사들의 난동 장면이나 식인 풍습을 그린 스케치도 있다. 판을 거듭할수록 구성은 더욱 간결하고 뚜렷해지며 짜임새가 더해진다. 최종판에 가면 내려다보는 시점을 취하고 오른쪽이 돋워지면서 방향이 그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것은 대서양의 긴장된 표현으로도 드러난다. 왼쪽으로는 집채만한 파도가 넘실대고 오른쪽 수평선쪽에는 보일락말락한 구조선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뗏목의 구성 또한 상반된 축을 형성한다. 돛줄을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와 인간 피라미드가 긴장된 구도를 만든다. 돛은 왼쪽으로 펄럭이고 사람들은 오른쪽을 향해 옷자락을 흔들어댄다. 이렇게 하여 극적인 장면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겨가면 움직임이 없는 시체에서 출발하여 차츰 살아 일어서는 사람들까지 단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침내 수평선 저 멀리 희미하게 나타난 구조선까지 미친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축이 만들어진다. 그림이 완성되어 살롱전에 출품한 상태에서 뗏목이 왼쪽으로 무게 중심이 너무 쏠리는 느낌이 들자 살롱전 열리기 이틀 전 제리코는 수정 허락을 받고 오른쪽 앞쪽에 아랫도리만 뗏목에 걸린 채 윗도리는 바다에 늘어지고 머리는 파도에 덥썩 물려들어간 인물을 부랴부랴 그려넣는다. 이렇게 해서 바람을 받아 팽팽해진 돛과 시체가 대조적으로 균형을 이룬다.


 제리코는 동시대의 난파 사건을 작품화하여 여론에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 그때까지 그림의 주류는 고대 영웅이나 유명한 전투를 주제로 다루는 역사화였다. 정치적 선전 목적에서 당대 사건을 다룬 역사화(그로가 그린 [페스트 병에 걸린 병사들을 방문하는 나폴레옹])를 빼면 동시대 사건을 주제로 다룬 그림이 없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에스파냐 애국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고발하는 고야의 [5월 3일]이나 나폴레옹이나 나폴레옹 군대에 바쳐진 찬양조의 관제화가 예외를 이룬다. 한편 제리코는 비극적인 면을 강조하려고 사회면 기사의 내용을 보여주는 그림에 역사화의 요소들을 집어 넣는다. 그런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역사를 빛낸 영웅도 왕도 장군도 아니다. 망망대해에서 조난당해 한계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인류로 보통 인간의 모습이다. 제리코는 이런 인간 조건에 처한 사람들을 주인공과 부차적인 인물의 구분없이 대형 화면을 써서 표정과 감정을 점점 고조시키는 인물들을 극적으로 배치한다. 작열하는 햇빛 아래 배고픔과 갈증, 공포로 고통받는 인물들의 다양한 얼굴 모습에 갖가지 자세를 보여준다. 축 늘어진 아들을 안고 관객을 향해 반성적인 표정을 짓는 아버지에서 구조선을 발견하고 희망에 들뜬 인물들까지 각 구성 인물들은 자신의 역할을 잘 연기한다. 요컨대 [메두사호의 뗏목]은 당대에 일어난 난파 사건을 주제로 빠르고 거친 터치로 두텁게 칠하면서 그야말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역사화에 혁명적인 새바람을 불어넣은 대작이다.


참고 자료

Gérard Denizeau, Les grands mystères de la peinture, Larousse, 2019, p. 148-151.

Braco Dimitrijevic, « Le Louvre est mon atelier, la rue est mon musée », Nos Chefs-d’oeuvre du Louvre,    Artpress2, février/mars/avril 2010, p. 104-113.

Carolina Brook, « Le Radeau de la Méduse », Le Musée du Louvre, Eyrolles, 2009, p. 204-210.

Cécile Dumoulin, « 3. Le Radeau de la Méduse », Néoclassicisme et Romantisme, coll. « L’art et la    manière », Musée du Louvre, 2000, p. 25-27.

Henry Houssaye, Théodore Géricault, Dieux, hommes, chevaux, Les Editions de l’Amateur, 2010.

H. 사비니, A. 코레라르, [메두사호의 조난], 리에종, 2016.

장-루이 페리에,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시선의 모험], 한길 아트, 2005, p. 193-202.

Virginie Girod, Le Radeau de la Méduse - la vraie histoire derrière le tableau, Au coeur de l'Histoire, Europe1, 6 septembre 2023.

La véritable histoire du radeau de la méduse, Point de vue, 5 novembre 2021.

Le Radeau de la méduse, CIRHMS - Histoire de la Médecine, 6 avril 2021.

Le Radeau de la Méduse - Visites privées, France2, 6 mars 2017.

Franck Ferrand, Le naufrage de la Méduse, Au coeur de l'Histoire, Europe1, 30 juin 2016.

작가의 이전글 매독으로 요절한 유명 인사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