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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2. 2022

아를(Arles)을 찾아서

 실로 얼마 만에 왔는지 아득하다. 그 사이 변하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와서일까? 도무지 어리벙벙. 서울 갓 올라온 촌뜨기잖아. 칠월 첫째 주말. 바야흐로 본격적인 휴가철 막이 올랐다. 예상한 터지만 휴가 떠나는 사람들로 역구내는 벌집 쑤셔놓은 것 같다. 얼굴에 느긋함이 묻어나지만 플랫폼 표시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다 한 가지다. 다들 트렁크를 끼거나 끌고 있어 자리를 마음대로 옮기기조차 힘들다. 나 역시 작은 트렁크와 손가방과 함께다. 당신도 저들처럼 바캉스를 떠나는가?


 여유 있게 도착했지만 묘하게 긴장이 된다. 길 떠날 때면 어김없다. 저도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옥죄어온다. 이게 지나치면 생리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제 집 드나들 듯 오가던 데가 이렇게 낯설 수 있나! 단체를 맞기도 하고 보내기도 하던 리옹역. 몇 년 만에 다시 발디딘 이곳은 이방인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홀 표시를 확인하고 홀 2에서 플랫폼 표시가 나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표시가 나오기 바로 전 홀이 바뀌었다. 방송도 뒤따라 나온다. 마르세유행 기차 출발 홀이 1로 바뀌었으니 그쪽으로 이동해서 기다리세요.


 보슬이가 저녁에 외출해서 새벽 세 시에 들어오는 통에 잠을 설쳐 머리가 흐리멍덩하고 피곤해서 자꾸 허방다리를 짚을 것만 같다. 일차로 집에서 볼일을 보고 나왔건만 이차 시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레알 역에서부터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 기다리다 조바심이 나서야 기차가 왔다. 리옹역에 내리자마자 화장실부터 가야 했다. 화장실을 찾는다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화장실은 내가 있다고 생각한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번듯이 자리 잡고 있다. 내 인생에 화장실은 정말 중요한 존재다. 찬 맥주를 마시거나 라면을 먹으면 약속한 듯 찾아드는 설사가 아니더라도 큰 볼일은 한 번에 처리되지 않고 꼭 두세 번은 거쳐야 하니까. 출근길에 급한 일이 생기면 갈 화장실 확보는 더없이 중요하다.


 화장실을 나와 폴 빵집에 들러 초콜릿 빵 한 개와 에비앙 한 병을 준비했다. 속을 비웠으니 좀 이따 제대로 먹지 않은 아침을 보충해야지.


 끝 간 데 없이 펼쳐지는 들판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남쪽으로 가는 기차를 제대로 탔구나! 베어진 밀밭은 누렇고 가지런히 자란 옥수수밭은 초록이라 사뭇 대조적인 한 폭의 그림이다. 멀리 군데군데 방풍림이 둘러치고 있다. 이런 평원 지형의 맹점은 큰 강이 없다는 것. 대신 드문드문 크고 작은 호수가 있다. 큰 전신주가 길게 팔을 늘어뜨리고 동네로 들어가는 키 작은 전봇대도 보인다. 철길가 둔덕의 풀들은 노랗게 변해 바싹 바른 밀 줄기와 흡사하다. 불을 댕기지 않아도 내리쬐는 여름 햇살에 금세 확 타들어갈 것만 같다. 처음 까마귀 나는 밀밭의 현장에 갔을 때도 그랬지.


 아비뇽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데 별 문제없겠지. 초행길은 언제나 불안하다. 버스 타는 데를 쉽게 찾을 수 있을까? 잘못해서 놓치면 어쩌지? 그래서 설레는 거지. 목적지에 닿았을 때보다 여행 떠나기 전이 더 설레지 않나. 욕심부리지 말자. 분명 거의 읽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책 한 권을 챙겨 넣었다.


 잠에 곯아떨어졌다 깨어보니 구릉지대에 포도밭이 휙휙 지나간다. 부르고뉴 지방이다. 자로 잰 듯 가지런히 열 지어 자란 포도나무들! 기하학적인 풍경은 프랑스 어디를 가도 금방 알아본다. 경지 정리며 도시설계, 조림... 열병식 하는 군대 대열처럼 키까지 딱 맞춰 열 지은 포도나무들이며 동그라미를 그리는 로터리며 네모다란 밭, 장방형으로 규칙적으로 심은 나무들... 추수 끝난 밀밭에 남은 원통형의 밀짚단은 모네 그림에서 굴러 나온 듯하다. 바케스 밑동을 고정하던 동테로 굴렁쇠를 굴리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여기저기 놓인 원통형 밀짚단을 보면 자꾸만 굴리고 싶어 진다. 풀밭에서 풀 뜯는 얼룩빼기 소들마저 기하학적으로 느껴진다. 십 일 자로 나란히 달리는 철길은 말할 것도 없고 전신주가 매단 전깃줄도 더할 나위 없이 단순한 형태다. 너른 들판에 원호를 그리며 물 뿜는 스프링클러 물줄기는 칸딘스키나 클레의 그림에 나올 풍경을 연출한다. 비슷한 시기에 지은 붉은 기와 지붕의 집들도 엇비슷하다. 가끔 나타나는 시골 마을의 성당 종탑 또한 기하학적이지 않은가! 지붕의 사다리꼴이며 삼각형 박공 직사각형의 창문을 보니 세잔의 그림이 절로 떠오른다. 세잔은 저 싱그러운 초록색을 어찌 그리 잘 내었을까. 에스타크 부두 풍경, 맹시 다리 또 생빅투아르산과 목욕하는 사람 연작들에서 초록은 눈이 시리도록 청신하다.


 파리에서 교황청 있는 아비뇽까지는 두 시간 사십 분 간다. 휴가철에 맞춰 지금 아비뇽은 연극제가 아를은 사진전이 한창이다. 이런 문화 축제가 관객을 자석처럼 확 잡아당긴다. 참 부럽다고 해야 하나. 이런 수준 높은 문화제를 보려고 관광객은 제 발로 오지 않나.


 야트막한 야산이 보이기 시작하면 프로방스에 왔다. 개가 배 넙죽 깔고 엎드린 이런 산 풍경은 한국의 야산과 꼭 빼닮아서 왠지 모르게 푸근하다. 저 산자락 어딘가에 꼭 고향 마을이 있을 것만 같다.

모네가 일렁이는 가지를 잘 묘사한 포플러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뭄에 목마르고 햇살에 타들어가서인지 우듬지에 가서는 줄기가 말라비틀어져 북쪽의 포풀러에 비하면 왜소하니 볼품이 없다. 올리브 나무와 함께 토스카나 지방의 풍경을 구축하는 실편백도 보이기 시작한다. 총대처럼 뾰족하게 하늘을 찌른 실편백과 죽음 하고는 무슨 관계나 있나? 왜 반 고흐는 죽음의 나무를 소용돌이치게 그렸을까? 정신 착란 상태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회오리치게 보일까?


 경부선을 달릴 때면 그렇게 자주 지나는 터널을 딱 두 개 통과했다. 물론 잠든 사이 몇 개는 더 통과했을 테다.

 세잔이 그린 다복 솔나무도 등장한다. 지평선까지 펼쳐지는 키 작은 해바라기 밭도 보인다. 론강이 나타났다. 아비뇽 다리에서 손에 손잡고 원무를 추자.


 아비뇽 역에 내린 다음 긴장하고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중간에서 얼마간 서행하더니 기차는 십 분가량 연착했다. 명색이 TGV인데! 기차가 12:17에 도착했고 버스 출발은 12:40이라 급하게 됐다. 어떻게 기차가 연착한 걸 알았는지 버스도 묘하게 발맞춰 늦게 도착했다.


 파리 쪽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갈대 숲이 보인다. 강은 없어도 실개천이나 늪 지대가 많은 모양. 파스칼한테 영감을 준 갈대가 무더기로 일렁인다. 매미 소리 쟁쟁한 퐁 뒤 가르 쪽에서 무수히 자라던 올리브 나무도 등장했다. 부서지는 햇살 아래 매미 소리가 귀청 찢어지게 들린다. 지치지 않고 쉴 새 없이 울어대는 매미 소리는 바로 프로방스의 광고음이다. 열대성 붉은 꽃을 피운 협죽도는 이국적이다. 멜론 밭도 보인다. 다시 땅개 같이 꽃핀 해바라기 밭! 내가 영창 중학교 담벼락에 심어진 가지를 꺾어 우리 집 화단에 심은 위석류도 깃털 같은 꽃잎이 바람에 날아갈 듯한 엷은 분홍 꽃을 피우고 있다. 이 지방에서도 예전에 누에를 쳤는지 잎사귀 둘레가 유독 뾰족한 뽕나무 몇 그루도 지나간다.


 시외 버스는 타라스콩에 두 번 멈추었다 다시 출발한다. 타라스콩 역 앞 광장은 협죽도가 붉고 희게 피고 영양분이 부족해 덜 자란 듯 보이는 플라타너스가 인상적이다. 타라스콩, 분명 귀에 익은 지명인데. 뭘로 유명하지? 분명 영화나 책에서 본 듯도 한데…


 오랜만에 시외 버스를 타자 동부 정류장에서 타서 금호에서 내리던 직행 버스가 생각났다. 아마 지금은 노선이 거의 사라지고 없을 테지만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그리고 직장 생활하던 몇 년 동안 줄기차게 탔던 직행 버스의 추억이 뚜렷이 떠오른다. 동부 정류장을 출발 벚나무 가로수 심어둔 큰 길을 따라 얼마 달리면 청기와 주유소가 나온다. 좀 더 달려 언덕배기 길이 나오면 동촌 유원지다. 금호강변 낭떠러지에 세워진 영남루를 지나면 동촌, 반야월, 청천, 물띠미, 하양, 금호다. 영덕, 안강, 포항, 경주… 종착지는 각기 다르지만 직행 버스는 하양에서만 멈추고 다음은 금호에 멈춘다. 금호 버스 정류소에서 대창행 버스를 기다린다. 때로는 오후에 때로는 저녁에 대창행 시외 버스를 탄다. 봄날 저녁 하얀 능금꽃이 흐드러지면 눈 내린 풍경 같다. 그 뒤 사과나무가 베어지고 복숭아나무로 바뀌었다. 연분홍 복사꽃 향기가 바람에 날려오면 이미 고향 마을에 와 있다. 그때 직행버스나 시외버스를 타던 이들은 이젠 거의 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오래되었다. 우리 할매 엄마 아부지는 무덤으로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


 아를에서는 시내 버스처럼 자주 멈추는 모양이다. 내리거나 타는 사람이 없어 지나치는 정류장이 대분분이다. 직행 버스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드디어 18번 시외 버스는 아를 역 앞에 도착했다. 라벤더 향이 미스트랄을 타고 솔솔 날아올 줄 알았는데 뜨겁게 내리 꽂히는 햇살이 먼저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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