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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3. 2022

젊은 비틀즈를 찾아서

5박 6일의 짧은 영국 여행에서 왜 리버풀을 가느냐고? 프러미에 리그 보러? 리버풀 보이 만나러? 

볼거리가 많은 런던에만 있어도 빠듯한데 2박 3일을 리버풀에 할애하다니...

 

우리가 도착한 날은 토요일 안필드 구장에서 리버풀과 뉴캐슬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표 예매를 하지 못해 축구 경기는 포기했다. 런던 유스톤 역에서 리버풀행 기차를 탈 때 축구 경기 보러 가는 한국의 젊은이 두 사람이 바로 내 앞에서 줄을 기다렸다. 기차 안에서도 일본 남녀가 축구 경기 보러 가는 것으로 보였고, 우리 앞쪽 자리에 앉은 덩치 좋은 거구의 남자 넷은 분명 축구계에 몸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현장에서 보지 못하는 대신 호텔 로비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대형 화면으로 경기를 보았다. 물론 난 거의 관심 없이 보는 둥 마는 둥 했고 친구는 중계에 푹 빠져들었다. 이집트 출신의 살라가 리버풀의 최고의 스타란다. 얼마나 살라의 인기가 대단하면 이쪽에서 이슬람에 대한 생각이 우호적으로 바뀌었다나... 이쪽에는 관심사가 스포츠밖에 없나? 호텔 로비에 온 손님들은 맥주잔을 들고 경기가 시작되자 일제히 화면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할 일들이 없나? 이런 호텔에 와서까지 축구 중계나 보다니...

 

인구 46만의 중간급 도시인 리버풀은 역에서 부두 쪽 호텔로 내려가는데 느낌이 썩 괜찮았다. 침침하고 답답한 런던보다 훨씬 활기가 넘쳤다. 탁 트이게 설계된 넓은 보도와 새로 개발되어 들어선 현대식 건물들(Liverpool one)이 옛 건축물과 엇박자를 내지 않으면서 잘 어울리게 들어서 있다. 그런데 도시가 대단히 남성적이라는데 놀랐다. 오라, 여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 동네는 남자들만 사나? 토요일이라 그런지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북적하다. 축구 경기가 있어서인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트럭을 개조한 거리 음식점이 대번에 눈길을 끈다. 요란한 간판에 자극적인 냄새로 발길을 사로잡는다. 일단 음식은 맛보다 냄새를 풍겨야 돼! 지나는 길에 얼핏 프랑스 식당 간판이 눈에 띄었다. 코트(Côte : 해안, 연안). 영국 식당이 마땅치 않으면 저길 한번 가보아야겠는데... 영국에 왔으니 영국식으로 먹어야지. 다들 먹을 게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는데... 정말일까? Fish & chips밖에 없다고. 그래도 뭔가 영국 특유의 음식이 있을 텐데...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소문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정보센터를 먼저 찾아가기로 했다. 축구 경기 표를 사기 위해서였다. 찾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그렇게 흔한 관광 안내소도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시내를 이리저리 지나다가 sky 대리점을 마주쳤다. 그런데 중계하는 방송채널이지 표 파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이미 지나버린 점심시간이지만 그래도 끼니는 때울 양으로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거리의 트럭 간이음식점은 쉽게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마음 놓고 들어가 편히 앉아 간단하게 요기할 만한 '식당'은 없다. 새로 조성한 신 시가지의 상가들은 삐까뻔쩍하니 잘 정돈되어 있다. 옷가게가 주를 이룬다. 그중에서도 스포츠 전문 용품점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식당은? 거리를 면한 1층에 자리 잡은 식당이라고는 내려올 때 보아두었던 쪽 빼고는 아예 없다. 이 사람들은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는 모양이다.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이나 길거리 음식 트럭에서 해결하나? 아니면 퍼브에서 맥주와 안주로 끼니를 대신하나? 알 수 없는 일이다. 거리를 면한 일 층에 자리 잡은 식당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하는 수 없이 대형 빌딩 3층에 자리 잡은 식당 광고를 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영화관이 있고 식당 몇 개가 나왔다. 피곤해서 많이 고민할 것 없이 대충 골라 들어갔다. 식당 정하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맛은 보장될 수 있을까. 패스트푸드점에 가까운 식당에 퓨전 음식점이다. 그렇다고 딱히 가격이 싼 것은 절대 아니다. 색깔 없는 퓨전 대중음악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주방 요원이며 서빙하는 사람은 거의 아시아계다. 고기는 달라도 소스는 똑같다는데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달짝지근한 맥도널드식 소스! 이게 먹는 건가 때우는 거지. 에라, 저녁이나 제대로 먹자!


점심 먹고 호텔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가장 먼저 간 곳은 리버풀의 간판 알버트 부두. 물이 하도 넓게 펼쳐져 부두 앞이 바다인 줄 알았는데 지도를 통해 본 결과 머시강 하구다! 5박 6일의 길지 않은 일정에서 온전히 2박 3일을 리버풀에 할애한 이유는 오직 비틀즈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사춘기 때부터 지금까지 멜로만적 생활을 지배하는 음악을 탄생시킨 곳, 리버풀! 머시 비트(Mersey beat)! 리버풀보다는 비틀즈가 우리를 이리로 인도하였다. 물리지 않고 줄기차게 듣고 있는 팝 가운데서도 비틀즈는 단연 압도적이다. 개인의 음악 성향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이가 열서너 살이라지 않나.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늘 함께한 음악이다. 그 용솟음치는 젊음의 에너지는 들을 때마다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킨다. 단순한 가사에 단순한 멜로디, 듣기 감미롭고 따라 흥얼거리기도 쉬운 노래들! 무엇보다 내가 감탄하는 것은 연주자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다. 이건 20대만 가능한 일!


리버풀을 찾는 관광객은 딱 두 부류다. 리버풀 축구팬과 비틀즈 올드팬! 비틀즈 투어 광고는 쉽게 눈에 띈다. 승용차 투어, 밴 투어, 버스투어...

비틀즈 투어 사무실 직원은 잉글랜드 여인이 아닌 차이나 여인이다. 점심때 들어간 퓨전식당도 중국계가 운영해서인지 서빙이 중국계였는데... 리버풀에 차이나타운이 오래전부터 생겼다고 가이드북에서 읽기는 했다. 어쨌거나 비틀즈와 중국 여인을 쉽게 연결 지을 수 없다. 중국 관광객을 겨냥한 것인가? 글쎄… 리버풀까지 중국 관광객이 몰려올까? 여러 투어 중에서 친구가 알아온 "Magical Mystery Tour"를 예약했다. 덤으로 캐븐 클럽을 들어갈 수 있는 초대권을 미리 주었다. 다음 코스는 The Beatles Story. 일종의 비틀즈 박물관이다. 공짜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입장료가 비틀즈 투어에 맞먹는다. 내일 비틀즈 투어를 하는데 굳이 들어가 볼 필요가 있나? 둘 다 이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아예 친구는 입장료를 내어야 한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서는 한 발을 뒤로 뺀 상태였다. 밖으로 나와 바로 옆에 붙은 Fab 4 store를 들어갔다. 그야말로 기념품 가게다. 보아하니 박물관의 종점. 박물관에는 들어가지 않아도 가게는 따로 들어갈 수 있다. 냉장고에 붙일 좌석이나 티셔츠를 하나 살 작정이었다. 종류는 많았지만 딱히 맘에 드는 것은 없다.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다가 모자 코너를 발견하고 몇 개를 써보았다. 비틀즈 문구가 들어가지 않고 Yellow Submarine 로고만 들어간 까만색 모자! 친구의 조언도 듣고 거울도 보아 가면서 노란색 모자가 아닌 검정색 모자를 택했다. 내일 투어 마치면 또 기념품 가게가 나올 텐데 조바심 낼 이유야 없지.


런던 호텔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객실에서 잠시 쉬다 로비로 내려왔다. 일단 맥주를 한잔 주문했다. 아니다. 친구가 카운터에 가서 사 가지고 왔다. 셀프서비스라도 값은 고급 호텔이라고 꽤 비싸다. 그래 자리 값이라고 치자. 이게 잉글랜드식인가? 대신 해피아워 때 식당에서 음료가 공짜로 제공되는 행운은 얻었다. 얼마 뒤면 축구 중계가 시작될 참이었다. 친구는 리버풀의 성적이며 선수 이름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안쪽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가 중계가 시작되면서 대형 화면 쪽 그러니까 출입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쪽에도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각종 음료며 와인 그리고 간단한 안주 거리를 차려놓았다. 적포도주를 골라 마셨다. 맛은 별로였다. 이걸 포도주라고 내놓나! 공짜니까 마시긴 하는데 맛은 영 아니올시다. 


저녁에 상가를 구경하며 산책을 한 다음 이미 역에서 내려올 때 물색해둔 코트로 들어갔다. 이래서 익숙한 게 좋은가? 뭔지 모르게 편하다. 그렇다고 가격이 아주 센 것도 아니다. 분위기며 음식 무엇보다 프랑스산 와인을 마실 수 있어 만족했다. 게다가 서빙하는 사람이 오며 가며 뭐 부족한 거나 원하는 거 없냐고 친절하게 물어온다. 바로 이거다.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하는 것! 이게 프랑스식인데 영국식은 그저 아구아구 쑤셔 넣고 배를 채우는 끼니 때우는 것이다. 부르타뉴 출신이 주인인 모양으로 부르타뉴식 음식이 선보였다. 부르고뉴 산 백포도주 두 잔을 마셨더니 바로 얼큰해졌다. 디저트도 괜찮았다. 이미 런던에서는 호텔 식당에서 저녁 두 끼를 해결하지 않았나. 바깥에 나가 보아야 별 거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만국 음식을 다 선보이는 호텔 식당에서 마신 피렌체 와인 키안티도 가격에 비해서는 맛이 좋았다. 물론 그 이후에는 호텔 근처 슈퍼체인 세인스버리스(Sainsbury's)에서 맥주를 사다 객실에서 마셨다.

 

이튿날 아침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 사무실에 일찍 들러 예약권을 찾아 버스가 서 있는 데로 되돌아왔다.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이미 일본 여인 둘이 버스 옆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보다 대여섯은 위로 보였다. 이미 64년에 비틀즈가 다녀간 나라답게 팬들의 경의도 끊임없다. 이미 일본 비틀즈팬을 마주칠 거라는 예상은 한 바였다. 우리가 두 번째로 도착한 셈. 먼저 노랑과 파랑 바탕에 무지갯빛으로 도색한 버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엘로 서머린이 새겨진 모자를 쓰고 찍었다. 팬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그럼. 세계 방방곡곡에서 성지순례를 온 팬들이 하나둘씩 속속 몰려들기 시작한다. 어라, 늙수구레한 팬들만 올 줄 알았는데 웬걸 우리보다 젊은 사람들도 더러 보이네! 해체된 지 50년이 다 되어가고 멤버 둘은 이미 불귀의 객이 되었어도 이렇게 새로운 팬들이 생겨난다!! 참 미스테리야 미스테리. 

일찍 도착해서 맨 앞 오른쪽 자리를 차지했다. 이 자리는 내가 가이드할 때 자주 앉던 자리라 기분이 묘했다. 이날 버스는 만석이었다. 어제 가서 예약하기를 잘했다. 버스 안은 낡고 흐름 하지만 바깥은 색을 요란하게 잘 칠 해두었다. 그래서 겉과 속은 다르다고 하나 보다.

 

비틀즈 멤버와 거의 동년배인 듯한 가이드가 우선 운전사를 소개하며 멘트를 시작했다. DJ처럼 투어를 진행했다. 가끔 노래도 들려주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며 바깥 풍경, 특히 네 멤버와 연관된 성지를 돌게 된다. 네 번 멈춰 내렸다 탄다고 했다. 이 정도는 나도 다 알아들었다. 리버풀 억양은 표준 런던어와 차이가 있는지 알아듣는 내용이 투어가 진행될수록 줄어든다. 친구가 듣기에 익숙하려고 켜 둔 BBC 뉴스는 쉽게 알아들었는데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 가이드의 멘트는 통 알아듣기 힘들다. 이게 내 현주소! 반절을 놓치면 정말 난해한 외국어지. 어쨌거나 투어가 미스테리 투어잖아. 쉽게 풀리면 미스테리가 아니지... 미스테리에 매지컬까지 붙어 있으면 당연한 거 아냐?


알버트 독을 출발해서 얼마를 달려 링고 스타의 집이 있던 동네를 지나고, 그가 첫 솔로 앨범(Sentimental journey)을 제작한 건물을 소개하였다. 아담한 3층짜리 건물이다. 1층 카페 건물 벽에 그런 내용을 알리는 현수막이 쳐져 있었다. 3층 창문에 왼쪽은 링고 스타 오른쪽은 폴 매카트니의 초상을 그려두었다. 이 카페를 지나서 근처에 링고 스타가 다녔다는 아주 오래된 그렇지만 별로 변한 게 없는 초등학교 건물과 운동장을 알려 주었다. 이 투어를 하기 전에는 링고 스타는 다른 도시 출신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교정을 했다. 아마 에딘버러 출신의 슈트클리프(Stuart Sutcliff)와 착각을 한 모양이다.


첫 번째 멈춘 곳은 페니 레인. 리버풀 변두리 페니 레인에 있는 이발소가 주무대로 펼쳐지는 단편 소설의 한 장면 같은 가사이다. 


페니 레인에는 온갖 머리 사진을 진열해둔 이발사가 보이고 모든 사람이 오가고 멈추고 인사를 나눈다. 길모퉁이에 자동차 가진 은행원이 있는데, 그를 보자 조무래기들이 등 뒤에서 깔깔대고 웃는다. 은행원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비옷을 절대 입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모래시계가 있고 호주머니에 여왕의 초상을 넣어 다니는 소방수는 소방차 세차하기를 좋아한다. 로터리 버스 정류장에서 양귀비꽃 파는 미모의 보모는 어쨌거나 자신이 연극배우인 양 생각한다. 먼저 온 손님한테 이발사가 면도할 동안 은행원은 자리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데 그때 억수 같은 비를 피해 소방수가 갑자기 들어온다. 참 이상하다. 변두리 푸른 하늘 아래 페니 레인은 내 귀에 내 눈에 들어와 있다. 


존 레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뮤직 비디오를 보아서 일부 구간은 이미 본 듯한 길이지만 현장에 발을 내딛고 걸어보는 것은 감동 그 자체다. 네 청년이 모이던 아지트가 저 편에 있다는 로터리를 지나고 그 유명한 이발소가 있는 데를 지나 한적한 곳에 멈추었다. 맞은편은 대학 캠퍼스가 있고 버스가 정차한 반대쪽은 넓은 잔디밭이다. 삼거리다. 다들 내려 페니 레인 글자가 박힌 도로 표지판을 끼고 안고 기념 사진을 찍는다. 페니 레인은 죽 이어지는 길이 아니고 모퉁이에 가서는 직각으로 돌기도 한다. 가장 기대를 모았던 부분은 죽 오다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 이발소와 구멍가게가 나오는 쪽이었다. 약간 번화가라서 그런지 그냥 지나쳐서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그래도 친구는 창밖을 열심히 찍어댔다.


두 번째 정차한 곳은 조지 해리슨이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였다. 허름한 노동자 공동주택 지역의 1층 집. 공장 창고 같은 2층 건물인데 1층 창문은 집 바깥 보도를 오가는 사람의 허리춤 높이다. 맞은편 건물과 불과 10미터도 채 안 되는 공터를 두고 다닥다닥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골목길과 건물 사이의 공터는 비록 말끔했지만 빈티를 감출 수는 없어 보인다. 바로 옆집에 집 판다는 광고가 붙어 있었다. 여태 동승한 성지순례자들을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는데 조지 해리슨 집 앞에서 일행들을 제대로 훑어보니 꼭 나이 지긋한 늙은이만 아니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렇다고 젊은 팬이라는 것은 또 아니다.


조용한 리버풀에 모처럼 차가 막히는 동네가 나왔다. 시간의 더께와 물때가 입혀진 볼품없는 묘석들이 나오고 붉은 벽돌의 투박한 성당 건물이 왼쪽으로 나타났다. 일요일 성당에서 결혼식 마치고 쌀 뿌리며 나오는 하객들과 성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로 언덕배기가 붐볐다. 아쉽게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처음 만난 마을 회관이며 엘레노 릭비(작사가 폴 매카트니에 따르면 허구적인 인물이지만 실제 이 성당 무덤의 묘석에서 같은 이름이 발견되어 노래 가사에 나오는 인물과 연결시킨다. 이 곡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로 반주할 뿐 비틀즈 멤버의 악기 연주는 들어가지 않는다.) 무덤이 있는 묘지며 세인트 피터스 성당은 차 안에서 구경하였다. 언덕길을 엉금엉금 올라가는 무지개색 관광버스를 보고 보도를 걸어가던 네댓 살짜리 꼬맹이가 한참 동안 손을 흔들어주었다. 귀여운 꼬마의 환대에 답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유로운 주택지대에 주차 자리가 없어 이 근처는 정체 현상이 일어났다. 내리지 않는 대신 늦게 버스가 달려 가이드가 설명할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었다.


리버풀의 한적한 외곽지대는 단독주택과 녹지대가 여유롭게 어우러진다.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앱스타인 가족의 번듯한 집이 좋은 동네 대로변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다음 멈추고 내린 곳은 스트로베리 필드. 역시 뮤직 비디오로 익숙한 장소다. 물론 뮤직 비디오에 나온 풍경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빨간 페인트로 칠한 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굳게 닫힌 철문 사이로 언뜻 안쪽 공원 언저리 풍경만 볼 수 있었다. 뭇 팬들의 염원이 흰 페인트로 덕지덕지 덮여 있다. 나보다 영어를 더 잘아듣는 내 친구 말로는 재개발되어 얼마 있으면 사라질 공간이라 우리가 운이 좋다고 가이드가 말했다고 하는데… 난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정말이지 리버풀 토박이 70대 가이드 말은 이제 30퍼센트만 귀에 들어왔다. 투어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놓치는 멘트가 늘어나는 느낌이 들면서 아 이거 완전히 외국어인데 하는 생각이 퍼뜩 든다. 그런데 결국 내 친구도 잘못 알아들은 게 드러났다. 최근 뉴스를 보니 스트로베리 필드가 일반인들한테 공개되었다고 한다. 존 레논의 어린 시절 비밀의 정원이며 고아원을 끼고 있던 이 공원을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단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다음에 잠시 멈춘 곳은 어린 시절 존 레논이 살았던 이모 미미 집 앞. 원양 상선 승무원 아버지는 어쩌다 리버풀에 돌아올 때나 이따금 아들 얼굴을 본다. 춤바람 난 어머니는 딴 남자 만나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내리지는 않고 정차한 상태로 구경시켜주었다. 말끔히 잘 보존된 2층 단독주택이다. 음악가며 작사가 존 레논이 1945-1963까지 살았다는 푸른 표지판이 부착되어 있다. 가이드는 왼쪽 모퉁이 2층 방이 존의 방이라고 소개한다. 제법 근사한데! 존 레논 이모집은 좀 사는 집이었네. 친구 말로는 최근 리버풀 공항이 존 레논 공항으로 개칭되었다고 했다. 일찍 죽어야 돼! 그래야 전설이 되지. 폴이 존은 젊어 죽어 전설이 되었는데 자신은 보통 늙은이로 죽을 거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폴은 살아있는 전설이잖아!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 버스는 리버풀 외곽만 줄곧 돈다. 허름한 외곽지대일 줄 알았는데 정반대다. 잘 정돈된 단독 주택지대에 넓은 녹지대가 잘 어울린 평화로운 변두리다. 프랑스 도시와는 영 딴판이네!  버스는 돌고 돌아 폴 매카트니 생가 가까이 멈춘다. 큰길에서 골목길로 한참 접어들어서야 생가 건물이 나타났다. 서민주택 지대에 자리 잡은 나지막한 2층 연립주택이다. 조지 해리슨 집보다는 그래도 낫다! 집 앞 정원 울타리에 붙은 표지판에 "자랑스러운 매카트니 가문"이라고 적혀 있다. 어떤 투어는 내부 관람도 한다는데 우리는 바깥에서 건물만 물끄러미 보다가 버스로 되돌아왔다. 하긴 들어가 보아야 뭐 대단한 게 있을라고. 으레 그렇고 그런 물건들 몇 개만 갖다 놓았을 텐데. 주인공이 더 이상 살지 않는 생가란 박제된 동물들을 전시해둔 자연사 박물관이나 다를 게 없지.

 

다시 버스가 출발했다. 이제 마지막 코스인 캐븐 클럽으로 가는 길이다. 점점 시내 중심으로 들어간다. 외곽과 마찬가지로 중심도 짜임새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종교 건물들. 카톨릭 성당, 영국 성공회 성당, 러시아 정교회, 시나고그... 그야말로 한 집 건너 한 집이 종교 건물. 그런데 쇠락해서 버려진 성당들이 바로 눈에 띄었다. 존 레논의 할아버지처럼 한때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이주하면서 들어선 성당들이 이제 신자를 다 잃고 제 집 관리할 여력이 없어 파산한 모양. 지붕이 여기저기 뚫리고 창문이 깨져 거미줄이 쳐진 성당은 귀신들만 들락날락하는 흉가로 변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크고 폴 매카트니가 다녔다는 성공회 성당은 굳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가이드북을 통해 사진을 본 터라 쉽게 알아보았다. 리버풀 심포니 건물이 오른편으로 보였다. 얼마 더 나아가 잠시 버스가 멈추었다. 왼편 골목으로 리버풀에서 유명한 미술학교며 사립 중고등학교가 나왔다. 존 레논이 다닌 미술학교 건물은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이 다닌 명문 중고등학교 건물과 붙어 있다. 그러고 보면 비틀즈 멤버들은 순전히 딴따라로 출발한 인물들이 아니다. 가방끈은 좀 매어보았다! 존 레논은 스튜어트 슈트클리프를 미술학교에서 만난다. 에딘버러 출신의 슈트클리프는 짧지만 한때 베이스를 맡은 비틀즈 멤버다. 다른 멤버들이 떠나고도 함부르크에 남아 미술대학에 재학 중 21세로 요절한다. 그는 추상미술 화가로 제법 재능을 인정받는다. 우리네 인생에서 누구를 만나느냐는 정말 중요하다. 그의 대타 베이스 주자가 바로 왼손잡이 폴 매카트니였다. 더욱이 존과 스튜어트가 다닌 리버풀 미술학교(Liverpool Art college)와 폴과 조지가 나온 리버풀 인스티튜트(Institute :고등학교)는 옆구리를 맞대고 붙어 있다. 이걸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필연이라고 해도 될까?


캐븐 클럽에서 투어가 끝났다. 잘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디제이 가이드의 멘트는 썩 훌륭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가 비틀즈 멤버와 거의 동년배에 리버풀 출신이라 비틀즈를 소개하는데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원기가 많이 빠진 70대 중반의 가이드한테서 젊은 시절의 비틀즈 향기를 맡기는 힘들었다. 그래 우리의 마지막 성지순례지 캐븐 클럽에서 어딘가 남아 있을 젊은 비틀즈의 향취를 느껴보자. 과거는 현재에 되살릴 수 있어야 추억이 된다. 그게 장소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현재와 연결되어야 의미가 생긴다. 그저 과거의 사실로만 남는다면 박물관에 전시된 생기 잃은 유물에 지나지 않지. 캐븐 클럽에는 분명 비틀즈의 흔적이 살아 숨 쉴 거야! 말 그대로 전설이 눈앞에 펼쳐질 거야. 


캐븐 클럽은 매튜 스트리트(Mathew street)에 있다. 약간 경사진 좁은 골목길. 캐븐 클럽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아볼 필요는 전혀 없다. 이미 골목에 팬들이 쫘악 깔려 있으니까. 성지순례의 마지막 코스답다.


그 볼거리가 많은 런던에 상대적으로 체류 기간을 줄이고 굳이 리버풀을 완전 이틀 이상을 할애한 이유는 뭘까? 어떤 사람은 차라리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가지 그랬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5박 6일의 짧은 여행에 2박을 리버풀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무슨 볼거리가 많다고 굳이 리버풀에 왔을까? 붉은 악마라는 별명이 붙은 리버풀의 축구 경기도 하나의 관심거리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우리의 관심은 딱 하나. 비틀즈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 해체된 지 오십 년 된 그룹을 뒤좇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비틀즈 팬들한테는 늘 해체되기 전 상태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젊은 비틀즈가 전부다. 단원이 솔로 활동을 하고 나이가 들고 누구는 저 세상으로 갔어도 비틀즈는 늘 젊다. 팬들 역시 마찬가지다. 비틀즈를 떠올리면 한창 좋아하던 시절로 되돌아간다. 허리가 둥둥해지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어도 비틀즈를 생각하면 늘 가슴 뛰는 젊은 시절이 곧바로 되살아난다. 이게 음악이 만드는 마술이다. 과거를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재생시키는 마술 거울! Love me do, I want to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From me to you, Ticket to ride, Paperback writer, Eight days a week...

 

매튜 스트리트에 들어서자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존이었다. 비좁은 골목길 한편 건물 앞쪽 벽에 기대고 우리를 맞았다. 가죽잠바에 진을 걸친 장발의 존은 다리를 꼰 채 두 손을 호주머니에 꽂고 우리를 넌지시 바라보고 서 있었다. 겉멋 잔뜩 든 건달 리버풀 보이! 에라 모르겠다. 오케이. 일단은 존과 한 컷 찍자고. 어쨌거나 캐븐 클럽은 이 골목에 있으니까.

 

존이 서 있는 담벼락 맞은편으로 몇 발짝을 더 내려가서야 진짜 캐븐 클럽이 나타났다. 그 맞은편에 있는 캐븐 퍼브는 우리가 가려는 캐븐 클럽이 절대 아니다. 캐븐 클럽 입구 전설의 현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설레는 가슴을 누르면서 일단 기념사진을 몇 장 찍었다.


저 문을 들어서면 지옥으로의 하강이다! 매지컬 미스테리 투어에서 나눠준 초대권을 내밀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바빠진다. 내려가는데도 숨이 가빠온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즐거운 지옥으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 고대 이집트의 사제 입문식에서 아무리 오르려고 해도 자꾸만 물밑으로 빠져드는 수레바퀴 같은 계단이 아니라 내려가는데도 자꾸 위로 붕붕 떠오르는 듯한 계단이다. 둘의 공통점은 내려갈 때나 오르려고 할 때 야릇한 현기증이 난다는 사실. 미켈란젤로와 마키아벨리, 갈릴레이의 무덤이 있고 볼테라노의 프레스코가 그려진 산타 크로체 성당을 나와 격한 감정에 가슴이 벅찬 나머지 정신을 잃을 뻔한 황홀경에 빠진 스탕달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토스카나 출신의 위인들과 가까이 있다는 감정과 바로 눈앞에 만져질 듯 펼쳐진 숭고하게 아름다운 예술품에서 매료되어 경이로운 감동에 취한다 (스탕달 콤플렉스라고 한다. 다음을 참조하라. Stendhal, Rome, Naples et Florence, « Florence, 22 janvier 1817, Gallimard, 1987, p. 270-273). 아무튼 이런 감동은 열광적인 팬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경지다. 이 야릇한 현기증은 어쩌면 일종의 광기 같은 것이다. 앙리 4세 적 성의 너른 잔디밭에서 원무 추는 아이들에 둘러싸인 화자가 실비의 금발 머리카락이 볼에 스칠 때 이런 경험을 한다(네르발의 [실비Sylvie] 2장 « 아드리엔느 Adrienne »에 나오는 장면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호프만 콩트의 인물들처럼 일상적인 현실에서 환상적인 사건을 체험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자질구레하고 고리타분한 현실에서 가끔 신기한 마법의 세계나 신비한 꿈의 세계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게 여행이다.


지하 3층인가. 한참 내려가서야 전설의 현장이 나왔다. 계단 끝에 포도주 저장창고를 개조한 홀이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은 지하 창고를 개조한 공연장이며 뒤쪽에 바가 있다. 비틀즈며 퀸, 더 후, 롤링 스톤스, 척 베리, 로드 스튜어트가 공연한다는 포스터가 전설을 되새기게 해 주었다.

그저 투박하고 불그스름한 벽돌로 둘러친 아치, 아치 사이의 벽도 벽돌로 되어 있다. 비디오에서 홀을 잔뜩 메운 팬들로 보아 아주 으리으리한 지하 클럽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 넓지도 그리 높지도 않다. 아 이게 진짜 캐븐이란 말인가! 여기저기 맥주잔을 들고 대화 나누는 사람들과 홀을 오가며 구경하는 사람들로 잔뜩 들뜬 분위기이다. 지하 창고에 모인 이들이 어찌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밝히지 않아도 서로 다 아는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니까.

벽마다 비틀즈의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새겨져 있다. 그들이 쓰던 기타, 청동 기념물, 공연 포스터, 갖가지 기념품... 캐븐 클럽을 거쳐간 다른 대중 예술가의 흔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비틀즈가 단연 압도적이다. 왜 캐븐 클럽을 찾겠는가.

 

전설의 무대에서 20대 초반의 청년 무명 가수가 혼자 통기타를 퉁기며 비틀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창력은 둘째 치더라도 젊고 싱싱한 목소리가 들을 만하다. 풋풋하고 때 묻지 않은 젊은 목소리가 역시 듣기 좋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고음을 낼 수 없는 살아 있는 전설 폴보다 낫다. 무대쪽을 향해 오른쪽 복도 가까이 다가갔다. 젊은 여성팬이 벽에 붙어 가수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여자 친구인가 팬인가. 그래 저 무명 가수도 한 명쯤은 강력한 팬을 거느려야지. 무명 시절 비틀즈는 캐븐에서 브라이언 앱스타인이라는 매니저를 만나면서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누가 알아, 저 모창 가수도 어느 날 갑자기 유명 가수가 될지…


우리는 달뜬 가슴으로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며 공연도 보고 벽에 덕지덕지 붙은 전설을 읽어 내려갔다. 비틀즈 밴드의 악기, 청동 부조, 포스터, 다녀간 뮤지션들의 기타 등등. 벽 장식을 둘러보며 사진도 찍었다. 머리가 달아오른다. 가슴이 벅차다. 기념품 한 두 개는 사야지. 여기서만 파는 자석을 하나쯤 사야지 않겠나. 친구 말을 들으면 다른 기념품 가게에는 팔지 않는다는데... 젊은 무명 가수의 공연을 동영상으로 일부 찍었다. 반대편 공연장에서도 밴드가 공연 중이었다. 여기저기 자리에 앉고 서서 맥주를 마시거나 구경거리 둘러보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한다. 저녁이면 분위기가 더욱 고조될 테지. 바깥으로 나가 다른 기념품 가게를 들렀다가 캐븐으로 다시 들어왔다. 캐븐은 무슨 자석처럼 우리를 물고 늘어지는 느낌이다. 자석 기념품을 한 개 구입했다. 캐븐의 공연 포스터로 장식된 기념품. 이미 한참 오래 전의 공연 포스터지만 여전히 팬들한테는 현재 진행형. 비틀즈, 더 후, 롤링 스톤즈, 퀸, 척 베리... 이래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이라고 자신만만하게 광고한다! 포도주 저장 창고를 개조한 클럽이라 소음 걱정이 없어 좋다. 게다가 캐븐에 들어서면 술에 취한다. 다음엔 음악에 빠져 정신을 잃는다.

 

저녁에 다시 오기로 했다. 캐븐에 한 번 발을 담근 이상 쉽게 떠날 수 없지. 비틀즈 투어의 종착역은 쉽사리 우리 발길을 놓을 성싶지 않다.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뭔가를 먹어야 하는데... 입버릇처럼 영국식으로 먹어야지 했지만 친구 왈 영국식은 피시 앤 칩스라잖아! 매튜 스트리트를 빠져나와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운 데서 해결하기로 했다. 우리가 대충 들어간 곳은 맥주잔을 걸치며 대형 화면으로 축구 중계를 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퍼브식 식당. 시킨 음식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영국식이다. 별맛 없는 패스트푸드라는 뜻. 그래도 끼니니까 먹어야지. 퍼브니 당연히 맥주도 한잔씩 걸쳤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존이 첫 번째 부인이 된 여자 친구 신시아(Synthia Powell)와 자주 들렀다는 퍼브를 지나쳤다. 호텔로 돌아와 잠깐 쉬다가 알버트 부두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비교적 볼거리가 많다고 하지만 딱히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닌 도시가 리버풀이다. 특히 미술관을 즐겨 찾는 나로서는 리버풀에서 이렇다 할 미술관이 없는 게 아쉬웠다. 어쨌든 알버트 항구 쪽에 리버풀 역사박물관이 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여기라도 가 보자. 우선 있다고만 들은 비틀즈 동상을 찾아보기로 했다. 카페리 부두가 나왔다. 물 건너편은 아득해 보인다. 바다인가 강인가? 분명 크기로 보아서는 바다 같은데...


카페리 대합실 쪽에 동상이 서 있다. 설치된 지 오래지 않았는지 검은색으로 번질거린다. 네 명은 실물보다 좀 더 크게 조각되어 있다. 그래서 더 위대해 보이나? 크다고 위대한 것은 절대 아니다. 우선 사진을 찍었다. 이게 이들에 답하는 예의인 줄은 모르지만 어쨌든 숭배자로서는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리버풀 부두(Albert dock)를 향해 설치된 동상으로 2015년 캐븐 클럽의 후원으로 제작했다고 새겨져 있다. 그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하학적인 현대식 건물에 들어선 리버풀의 역사박물관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선 세찬 빗줄기를 피하는 게 급선무이다. 엘로 서므린 모자로는 비를 온전히 막을 수 없다. 비옷을 절대 입지 않는 은행원이 아니고 억수 같은 비를 피해 이발소로 들어오는 소방수가 되었다. 박물관치고는 썰렁하다. 역사박물관이라 주로 학생들의 학습장으로 활용하는 모양이다. 큰 기대를 품은 건 아니지만 역시나 기대에 부응할 것 같지 않다. 이것은 관람객만 보아도 척이다. 맥주를 마시며 축구나 보는 리버풀 사람들한테 무슨 문화가 있으랴! 저 먼 신대륙으로 향하는 전진기지이던 리버풀. 뱃사람과 철도교통에 얽힌 볼거리가 전시된 일층 전시실을  얼핏 둘러보고 나니 2층은 아예 올라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디 가나 기념품 가게에 빠질 수 없는 품목은 비틀즈 수브니르다. 이 기념품 가게에서 친구는 비틀즈 로고가 들어간 머그잔을 하나 골랐다. 식사에는 그다지 투자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친구가 기념품에는 꽤 열심이다.

 

다시 호텔로 되돌아갔다. 이제 저녁을 해결해야 한다. 이번엔 정말 영국식으로 먹어야지. 암, 영국에서 영국 음식을 맛보아야 하고 말고. 에이, 영국식은 없다니까! 친구의 마찬가지 대꾸. 프낙 서점에서 여행 준비한다고 오래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안내 책자를 뒤져 괜찮은 식당을 찍었다. 별로 헤매지 않고 식당이 있다는 길을 찾아갔다. 그런데 내가 가려는 식당은 나오지 않았다. 식당 몇 개를 지나쳤다. 저기가 아닌가 싶었는데 정작 가보면 아니다. 가이드북이 거짓말 하나 그 식당이 없어졌나?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괜히 다리품만 팔았다. 이것도 어쩌면 운명인가. 그래 대충 먹자. 영국식으로!


그래도 실내장식이 요란한 나름 신경을 쓴 걸로 보이는 웨스턴 분위기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 식당은 천장에 찌그러진 자동차를 한 대 매달아 두었다. 다모클레스의 자동차? 어쨌거나 요란한 실내장식의 전형적인 패스트푸드식 식당이다. 이게 영국식이라면 영국식인가? 음식은 만국 퓨전 음식. 이미 런던 호텔 식당에서 퓨전의 진수를 맛보지 않았나! 생질 호텔, 아니 세인트 자일스 호텔! 영국에서는 영어식으로 발음해주어야지. 같은 말이라도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악센트가 붙는 대신 음절이 길어진다. 그건 이탈리아어도 마찬가지다. 런던 호텔 식당은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게다가 키안티를 비롯 와인맛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리버풀의 이 식당이 완전히 영국식인가. 달짝지근한 소스에 국적불명의 요리. 대신 양은 엄청나다. 요리 못하는 식당의 특징이 양으로 승부 거는 건데. 그렇다고 가격이 싼 것은 절대 아니다. 이걸 음식이라고 먹나. 반이상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 달짝지근한 소스에 고기는 달라도 맛은 똑같았다.

 

그래도 캐븐이 기다리고 있다. 리버풀에서의 마지막 밤! 며칠 머문다고 마지막 밤 운운이냐. 낮에 이미 가 보았건만 그래도 캐븐 가는 길은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뛴다. 또 어떤 짝퉁 밴드가 등장할까? 캐븐의 밤은 어떨까? 분명 낮보다 훨씬 뜨거운 분위기가 되겠지.


이번 여행의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친한 친구와 같이 하는 참 소중한 여행인데… 우리의 젊음을 수놓은 추억 가운데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비틀즈 음악이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우리는 여전히 비틀즈 마니아! 어쩌면 비틀즈는 오래도록 우리의 우정을 이어온 연결고리와 같은 것. 대학 일 학년 어느 가을날 벤치에 앉아 문학 이야기를 나누다가 단박에 친해진 우리는 비틀즈가 또 다른 공통분모이다. 런던 일정에도 애비로드 스튜디오는 이미 계획하고 온 터다.

 

어느덧 우리의 젊음은 덧없이 가버렸다. 속절없이 가버린 젊음을 확인하러 리버풀을 찾아왔을까? 젊은 시절 원대한 꿈을 하나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을 곱씹으려 왔나? 자고 일어나 보니 어느 날 아침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된 비틀즈의 흔적을 뒤좇는 심사는 과연 무슨 연유에서 일까?


일상에 파묻혀 아무 생각 없이 오늘도 어제처럼 살아가는 삶에 때로 신선함을 불어넣는 게 여행이다. 잠시 정상궤도를 이탈하면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직업활동을 하면서부터 얼마나 일상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나? 늘 확인하는 명제는 목구멍이 포도청! 이런 질곡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피할 수 없는 의무가 도사린다. 그놈의 돈이 뭔지! 남이 보면 무모하고 나로서는 의연하게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유학길에 올랐다. 독신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일을 벗어던졌다고 자유가 찾아온 것은 결코 아니다. 곧바로 또 다른 속박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번에는 돈이 목을 조이기 시작한 것. 결국 우리 인간은 이런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처지를 벗어날 수 없어 비관한 나머지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신해서는 안된다. 돈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영혼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시간에서도...

 

저녁에 다시 들어간 캐븐은 낮보다 훨씬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성지순례객이 좀 더 늘어났고 맥주잔이 더 빨리 오갔다. 무대 앞쪽 중앙홀엔 흥겨운 춤판이 벌어져 있었다. 꽉 들어찬 춤꾼들 가운데 태를 부려가며 멋지게 잘 추는 두 여인이 금방 눈에 띄었다. 우리도 맥주를 마시지 않을 수야 없지. 공짜 쿠폰이라고 생각한 초대권은 할인 쿠폰이었다. 친구가 사 온 맥주잔을 들고 자리를 잡으려고 기웃거렸지만 좋은 자리는 이미 없다. 무대하고 가시권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비어 있는 왼쪽 벽 쪽 자리에 앉았다. 무대 하고 거리는 가깝지만 사각이라 연주자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중앙홀과 측면 홀 사이에 세워진 벽면 중간중간이 아치로 트여 있지만 우리가 앉은 측면 벽 쪽에서는 무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가 남아 있었군! 대신 중앙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은 잘 보였다. 연주도 연주지만 춤판 구경하는 것도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밴드의 연주 실력이나 가창력은 짝퉁이라 그리 기대할 바는 아니지만 팬들은 그냥 비틀즈 노래만 흘러나와도 감동 그 자체. 게다가 무대가 어디냐 ? 캐븐 클럽!!!!


통로를 두고 우리 바로 오른쪽 벽 자리에 우연히 젊은 한국 남녀 둘이 와서 앉았다. 이십 대 말로 보이는 이들은 맥주를 마시며 얼굴을 맞대고 공연보다는 대화에 더 열중하는 듯했다. 그 앞쪽 그러니까 바로 무대 옆쪽 자리에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부 세 쌍이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맥주를 마시며 주로 사진을 찍고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젊은 여인네 둘은 흥에 겨워 연신 춤을 추었다. 기력 없는 남편을 끌어다 같이 추자고 해도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세 남자와 한 여자는 맥주잔을 탁자 위에 둔 채 아치 벽에 바싹 기대어 무대만 뚫어져라 보았다. 하는 수 없다. 여자 둘만 엉겨 붙어 둥둥해진 허리를 굴리고 퉁퉁한 팔을 휘젓는다! 한때 팔팔하게 소리 지르고 광적으로 춤도 추었을 네 사람은 공연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이들은 캐븐에서 비틀즈를 직접 보았을지도 모른다. 맨 앞줄에서 폼나고 신나게 춤추던 중년 여인 둘이 어느새 퇴장하고 보이지 않았다. 춤판을 휘어잡던 요란하고 열정적인 두 사람이 사라지자 춤판은 거품 사그라든 맥주잔 같았다.

 

멤버 넷 모두 60대로 보이는 이 밴드는 그냥 들어줄 만은 한데 에너지도 세련됨도 깊이도 없다. 그저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짝퉁 밴드로서 충실하다! 그래도 오랜 세월 몸담은지라 익숙함은 묻어난다. 폭발적인 에너지로 청중을 잡아끌던 젊은 비틀즈가 그립다. 낮에 솔로로 기타 치며 부르던 젊은이가 더 낫지 싶다. 아, 결국 나이가 중요하단 말인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자 우리도 무대가 보이는 쪽으로 다가섰다. 사진도 찍고 동영상으로 촬영도 했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사진으로는 소리를 담을 수가 없으니... 이제 맥주잔은 바닥을 보이려는 참이다. 다시 한 잔 마시기는 그렇고 그냥 이걸로 버티자는 눈길을 교환했다. 30 분 공연이 끝나고 다음 밴드가 등장했다. 지난번 밴드보다 연령대는 10년은 젊어진 것 같은데 연주 실력은 오히려 떨어졌다. 특히 가수의 가창력이 턱없이 떨어진다. 좀 더 있다 나가자. Help를 듣고 나서 뒤돌아섰다. 아홉 시 반쯤 캐븐을 나서는데 들어오려는 사람들 줄이 길게 뻗어 있었다. 그래 이쯤 해서 캐븐을 떠나자.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하지 않았나. 글쎄,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는 게 좋다. 맞아, 이쯤 해서 캐븐하고도 작별인사를 나누자. 매튜 스트리트는 여기저기에서 내뿜는 라이브 공연으로 사람들을 호리고 있었다.


여행에는 늘 뜻하지 않은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 이게 또한 여행 이야기의 묘미이다. 그냥 예정대로 밋밋하게 흘러간다면 무슨 재미가 있으랴. 그래서 여행기를 쓰는 작가들은 현지에서 들은 전설적인 이야기나 책을 통해 본 일화를 양념으로 끼워 넣는다. 

라마르틴(그의 [동방여행](1835)의 4부는 « 파탈라 사에기르가 사막을 떠도는 아랍인들한테 체류한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미치광이 모험가 라스카리스를 7년 동안 동반한 시리아 알레포의 파탈라가 아랍 사막의 유목민족을 방문한 이야기를 아랍어로 남긴 것을 라마르틴의 통역자 마졸리에가 번역한 것을 라마르틴이 다시 손을 보아 끼워 넣은 이야기이다.)처럼 딴 사람이 쓴 여행기를 번역해서 끼워넣기도 하고, 위고(그의 여행기 [라인강](1841)에서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21번째 편지 « 미남 페코팽과 미녀 볼두르의 전설 »은 작가가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어낸 콩트이다.)나 네르발(그의 [동방여행](1851)의 4부 [라마잔의 밤]은 라마단 기간을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내는 여정인데 현실에서 체험하지 못한 전설적인 이야기 « 아침의 여왕과 정령의 군주 솔리만의 이야기 »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실제 여정에서 뚜렷한 모험적인 사건이 없어서 예멘의 여왕 발키스와 이스라엘의 왕 솔리만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통해 천일야화의 분위기를 돋군다.)처럼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상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밋밋한 일정에 극적인 효과를 불어넣기도 한다.


리버풀을 떠나는 날 아침 혼자 알버트 독으로 나가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기차 시간이 정오에 가까운 늦은 오전이라 여유가 있었다. 머시강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흐린 날이라 뭔지 모르게 음산한 터너풍 풍경화가 고스란히 연출되었다. 아, 터너의 풍경화가 그냥 나온 게 아니구나! 물이 빠져 넓은 벌이 된 강어귀와 잿빛 구름이 낮게 깔리고 멀리 지평선 위만 푸른 하늘 자락이 언뜻 보이는 풍경은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고풍스러운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라임 스트리트 역 주변도 구경할 겸해서 여유 있게 호텔을 나섰다. 역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1965년 12월 5일 리버풀에서 비틀즈가 마지막 공연을 한 엠파이어 극장을 마주쳤다. 역으로 올라가면서 아쉬운 마음에 우리가 누비고 다닌 신시가지 쪽을 굽어보고는 마지막으로 라디오 방송국 송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11:47분발 런던 유스톤행 기차가 취소되었으니 내리십시오."라는 자막 서비스와 함께 안내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도대체 이게 뭐야! 예고도 없이. 기차에 올라 자리까지 잡고 있는데 무슨 날벼락! 가지 않는다니 내릴 수밖에. 취소된 자세한 정황을 알려주거나 그다음에 어떻게 하라는 안내는 없었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서비스 빵점! 철도가 민영화되면 서비스가 나아져야 하는데 정반대다. 철도회사 이름이 Virginwestcoast이다. 일대 난리법석이 일어났다. 모든 승객들이 제각기 뭐라고 뭐라고 웅성거리며 부산스레 내리기 시작하였다. 덩달아 내린 우리는 어떻게 하나 걱정에 휩싸여 플랫폼 앞쪽에서 트렁크를 끌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관찰했다. 한참 지나서야 역무원 몇이 나타나 오른편 끝쪽의 딴 플랫폼으로 가라고 했다. 런던 가는 사람들은 중간역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갈아타게 되는 기차가 런던행 마지막 기차라고 일러주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런던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 갑자기 부아가 치밀고 신경이 곤두섰다. 직행이 아니고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에다 실수하면 생판 모르는 낯선 곳에 발이 묶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더해 피로가 한꺼번에 확 몰려왔다.


바꿔 탄 열차는 간선이 아니고 지선을 달리는 인근 지방과 지방을 연결하는 노선 열차였다. 타고 내리는 사람은 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나 리버풀에서 볼일 보고 돌아가는 시골 사람들이었다. 한적한 시골을 통과하는 기차여서 지나는 역이란 역은 모조리 멈추는 일종의 완행열차였다. 영국 와서 예정에 없던 완행열차까지 다 타보네! 완행열차답게 런던과 리버풀을 연결하는 기차에 비해 속도가 한참 느렸다. 대신 바깥 풍경 구경하기는 훨씬 나았다.

올 때는 눈 내린 풍성한 풍경만 보고 왔는데 갈 때는 눈이 거의 녹은 풍경이라 어쩐지 황량해 보였다. 프랑스 지형과 비슷하게 구릉성 평원이 죽 펼쳐지는 풍경은 한참 만에 나타나는 인가나 마을, 도시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졸음이 몰려왔지만 혹 갈아탈 역을 놓칠세라 정신을 바짝 차렸다. 어느 지방 작은 도시 철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역에서 갈아타게 되었다. 한낮이라도 작은 역이라 런던 가는 기차가 자주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광판을 보고 바꿔 탈 플랫폼을 몇 번씩 확인하고는 런던행 기차가 도착할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갈아탄 열차는 고속으로 달렸다. 결국 이 사고로 목적지에 한 시간 반쯤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다. 어휴, 이만하면 다행이지. 철길이 달라져서 덤으로 지나치지 않았을 존 레논 공항도 보고 리버풀 주변의 시골 풍경도 구경했으니까.


런던 체류 마지막 날 아침 서둘러 애비로드 스튜디오를 찾았다.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온 팬 두 명이 벌써 애비로드 스튜디오 앞을 얼쩡거렸다. 차림이나 얼굴로 보아 남미 쪽에서 온 것 같았다. 그 유명한 애비로드 스튜디오는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그리 웅장하지 않은 아담한 건물이다. 그 바로 오른쪽 기념품 가게가 들어선 건물이 훨씬 규모가 크다. 스튜디오는 방문이 되지 않고 여기만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기념품 가게가 문 열기 전이었다. 우리 다음으로 하나둘씩 전 세계 성지순례자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스튜디오 건물 앞 흰색 페인트 칠해진 야트막한 담장을 따라 붉은색 하트가 총총 박혀 있고 그 위 검은색 철제 울타리에도 흰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누구누구 언제 다녀감 뭐 이런 내용이다. 방명록에 흔적을 남기듯 주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두었다. 스트로베리 필드 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것으로 방명록 사인을 대신하였다.


비틀즈 마지막 앨범 애비로드의 재킷 사진으로 유명해진 전설적인 횡단보도를 눈앞에 두고도 그 위치를 잘못 알고 한참 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해프닝도 벌였다. 그만큼 특별할 게 없다. 비틀즈 네 멤버가 길 건너는 사진을 여기서 찍은 사실만 빼면 그냥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흔해 빠진 횡단보도이다. 전 세계 비틀즈 팬들이 속속 등장하는데 어김없이 일본 아줌마 둘도 나타났다. 우리한테 사진을 부탁해서 친구가 찍어주었다. 물론 우리 둘도 각자 횡단보도 건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수많은 횡단보도 가운데 하나일 뿐인 이 횡단보도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나... 우리는 기념품 가게가 열리자마자 바로 들어갔다. 가게 안쪽에 비틀즈 시절의 악기며 음향기기가 놓여 있는 연습실도 볼 수 있었다. 볼거리가 많아 한참 머물렀지만 나올 때는 냉장고 장식할 자석 두 개만 늘어났다.


친구의 기차 시간이 임박해서 점심을 같이 먹고 헤어질 수 없었다. 우리는 언더그라운드 역에서 헤어졌다. 그는 카디프를 향해 떠나고 나는 유로스타 시간이 저녁 6시 이후라 왈라스 컬렉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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