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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Feb 23. 2022

[사르다나팔 왕의 죽음] - 폭군의 최후는

들라크루아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 [사르다나팔 왕의 죽음] (1828)


 이 작품은 1827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무질서한 구성에 난폭한 형식을 띠었다고 일약 스캔달을 불러 일으킨다. 비평가들은 "살롱에서 가장 형편없는 회화"에 "화가의 실수"로까지 보인다고 혹평을 한다. "미술의 기본 원칙"도 무시하고 선과 색을 무질서하게 뒤섞어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고 꼬집는다. 1824년 살롱에 출품하여 뤽상부르 미술관이 그 해에 엄청난 가격으로 바로 사들인 [키오스섬의 대학살 장면]과 달리 [사르다나팔 왕의 죽음]은 1921년에 가서야 국가가 매입한다.


 영국 시인 바이런의 드라마(Sardanapalus, 1821)와 몇몇 역사서에서 화가가 자유롭게 차용하여 착상한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크테시아스(Ctécias de Cnide)가 쓴 [페르시아의 역사]와 이전의 역사서를 임의로 따온 기원전 1세기 그리스 역사가인 디오도로스(Diodore de Sicile)가 기원전 30년에 발표한 [역사 도서관](죽음의 화형대라는 착상)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사르다나팔은 기원전 7세기 인물로 1300년 동안 지속된 앗시리아 제국의 30대이자 마지막 황제(실제 앗시리아 제국이 609년에 멸망하니까 마지막 왕은 아니다.)이다. 향락과 태만으로 보자면 이전의 어떤 황제보다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는 후궁들에 둘러싸여 나날을 보냈는데 베를 짜고 화장품과 향유를 발라 피부가 여자들보다 더 보드라웠으며 목소리마저도 여성스럽게 내려고 애썼다.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불명예에는 아랑곳 않고 남녀와 함께 벌이는 사랑 행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쾌락을 추구하였다. 디오도로스는 사르다나팔이 이런 자신의 작태를 자신의 손으로 쓴 묘미명을 통해 정당화시킨다고 한다. "죽을 운명임을 너무나도 잘 아는 길손이여, 죽은 자한테는 향락이 없을지니 쾌락을 향해 당신의 영혼을 열어라. 한때 니니베의 위대한 왕이었던 짐은 지금 단 한 줌 재로 남았어도 짐이 먹은 모든 것, 짐을 즐겁게 해준 모든 것이며 사랑으로 얻은 모든 쾌락은 다 가지고 있다오. 짐의 권력과 재산만이 없을 뿐이라오."


 타락한 폭군 사르다나팔 시절 아시리아에 예속된 메디아(이란)와 바빌로니아가 반란을 일으켜 아시리아의 수도 니니베(Ninive/Kuyundjik)를 함락하려고 쳐들어온다. 메디아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은 처음에 실패를 거듭하다가 주변 국가들(아랍과 박트리아 : 아프카니스탄 지역의 나라)의 원군에 힘입어 형세가 바뀌기 시작한다. 사르다나팔은 자기 식으로 향연을 베풀어 난교 파티를 즐기며 승리를 자축한다. 그는 니니베의 높고 넓은 견고한 성벽(불가사이한 전설적인 성벽이다.)과 성 안에 비축된 충분한 식량을 믿었다. "니니베를 감돌아 가는 티그리스강이 적이 되지 않은 한 니니베는 함락되지 않는다."는 예언이 있었다. 그런데 3년 간의 포위 공격 끝에 큰비가 쏟아지자 강물이 흘러 넘쳐 성벽이 무너지고 도시는 반란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사르다나팔은 끝났다고 느꼈지만 항복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재산도 사람들도 적들한테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왕의 침실에다 거대한 화형대를 만들어 그 위에 황금이며 돈, 모든 어의를 얹어 두고 후궁들과 내시들을 가두라고 명령한다. 화형대 꼭대기에 놓인 침대에 누워 노예 시종과 호위병한테 첩들이며 시동들, 자신이 아끼던 말과 개까지 찔러죽이라고 명한다. 자신한테 즐거움을 준 어떤 물건도 남기지 말라고 지시한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 왕은 무지막지한 폭군에 흥청망청 통음 난무를 즐기던 주인공으로 현재 자신의 왕궁이 적들한테 포위당해 중대한 행동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이다. 그림의 장면은 왕의 침실이고 침실 오른쪽 바깥이 불타는 왕궁의 모습이다. 오페라의 무대 배경처럼 왕의 침실과 바깥의 왕궁 풍경이 동일 선상에 놓인다. 원근법이 더 이상 필요없다.

 왕은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팔을 괴고 자신의 명령이 집행되는 과정을 우울하게 바라보고 있다. 마약을 먹은 듯한 자객들이 칼을 뽑고 오른쪽 아랫쪽 모서리 남자 신하가 애원하는 손길과 표정을 보내지만 자신이 내린 명령을 집행하는 관객이 된 왕은 침착하고 냉정하기 이를데 없다. 마치 이 죽음의 드라마에서 소외된 이방인 같다. 초연하다고 해야 하나, 냉혹하다고 보아야 하나. 왕은 판관이자 사형집행인이며 주연배우이면서 동시에 관찰자이다.


 왕의 왼쪽에 쟁반에다 술병과 잔을 마쳐든 시녀가 있다. 왕의 무릎 오른편에 노예 자객의 칼에 죽기보다 커텐으로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 첩이 보인다. 오른쪽 아래 가슴에 칼이 꽂여 목이 뒤로 젖히고 눈자위가 돌아간 여인을 보자. 발목까지 보석을 끼고 관능적인 몸매를 자랑하는 이 여인은 칼날이 가슴에 박히자 마지막 숨을 거둔다. 이런 혼란의 소용돌이에 닻을 내린 듯 보석들과 샌들이 여인 바로 뒷쪽 바닥에 놓여 있다.


 황금 술병, 오리엔트풍 보석, 술 항아리, 과일, 비단과 빌로드 옷들이 바닥에 온통 널브러져 있다. 침대 아래쪽 모서리를 장식하는 코끼리 머리는 과연 무슨 상징일까? 부귀영화를 나타내나, 참 신비롭다. 어쨌든 상아가 반쯤 부러진 코끼리도 구슬퍼 보인다. 침대 오른쪽 끝자락에 뱀처럼 풀어헤쳐진 스카프는 무얼 나타낼까? 원죄의 이미지인가. 방금 막을 내린 통음 난무의 장소는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극장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관능적인 난교 파티의 흔적은 곳곳에 드러난다. 귀걸이에다 팔뚝이며 팔목 손가락마다 보석을 칭칭 두른 첩들은 완전 나체이거가 반 나체 상태이다. 게다가 사르다나팔은 발가락까지 가락지를 끼고 있다. 그의 애첩 미라는 침대에 팔을 벌린 채 이미 죽은 듯 엎어져 있다. 미라 뒤의 첩은 죽는 게 두려워서 칼을 뽑는 자객을 마주하고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다. 흑인 노예의 칼날에 찔린 말도 공포에 질린 듯하다. 오른쪽 모서리 끝에는 손을 뻗어 사르다나팔한테 애원의 눈길을 보내는 시동도 보인다. 폐하, 명을 거두시옵소서! 디오도로스의 이야기에는 마지막 순간에 사르다나팔이 애첩 미라를 부둥켜 안고 화형대에 오른다.


 화면 전체가 온통 꿈틀거리며 혼란의 도가니가 된다. 오렌지, 황금색, 붉은색, 살색의 소용돌이로 칠해진 색들의 혼동 속으로 우리를 집어 삼킬 것만 같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순결을 드러내는 주인공의 흰색 잠옷은 뭐라고 보아야 하나? 타락과 방탕의 상징인 사르다나팔이 불을 통해 정화될 수의인가? 마찬가지로 오른쪽 화면 위 모서리에 왕궁을 휩싸는 불길은 금세 우리를 덮칠 듯이 다가선다. 우리 눈앞에 죽음이 보이고 죽음을 느낄 수도 있고 죽음의 비명 소리도 들을 것 같다.


 대담한 대각선 구도에 죽음의 원무를 추듯 왕을 둘러싼 조연들을 침대의 왼쪽, 오른쪽, 아래쪽에 배치하고 있다. 대각선의 방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그어진다. 샤를 앙리의 « 감정의 벡터 이론 »에 따르면 이 대각선은 추락, 하강, 무기력, 우울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여자들의 나체 묘사도 아주 다양하다. 정면으로 젖가슴을 내보이거나 완전히 등돌린 뒷모습, 오른쪽과 왼쪽으로 45도 각도의 측면 묘사, 완전 측면...

 폭력과 공포가 난무하는 광경을 강렬한 빛과 색채로 잘 재현해낸다. 그럼에도 흘러나오는 피는 볼 수 없다. 피는 대각선으로 점점 넓어지면서 펼쳐지는 검붉은 침대 시트를 통해 상징된다. 마치 핏물이 어느새 우리 쪽으로 흘러내릴 것만 같다. 반면 빛은 가차 없이 침실 아랫쪽에서 위로 올라가게 비치면서 무표정한 왕의 얼굴로 향한다. 침실 바깥 타오르는 왕궁에서 비춰지는 불빛일 테다.


 이 그림에는 시선이 빠져나갈 자유로운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왕의 침실에 갇힌 모든 인물들의 탈출구도 역시 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드라마 절정에 이른 이 장면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폭력과 죽음, 공포와 절망 뿐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빠져나갈 데 없이 궁지에 내몰린 숨박히는 분위기가 닫힌 공간과 난폭한 색으로 잘 구현되고 있다.


 이 그림에 나타난 사르다나팔 왕의 초상이나 이것을 뒷받침하는 역사서의 이 왕의 이야기는 오늘날 밝혀진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그의 통치 기간이나 추락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르다나팔(루스)라는 이름마저 아시리아의 마지막 위대한 왕(사르곤 2세의 손자 아사르하돈의 아들) 아수르바니팔(Assurbanipal : 669-627 : 아시리아 왕 가운데 최장 통치. 이집트와 엘람을 정복, 형의 국가인 바빌로니아의 사마쉬슘우킨(Shamash-shum-ukîn)의 반란을 잠재우고 왕궁을 불사른다. 바로 이 내전의 역사를 변형시킨 것이다.)을 그리스식으로 바꾼 것이다. 실제의 아수르바니팔은 뛰어난 무사에 학식이 깊은 왕으로 기원전 627년에 죽은 인물이다. 아수르바니팔 황제의 도서관 역시 전설적이다. 아시리아의 수도 니니베의 도서관에서 3만여 개의 점토판이 발굴되어 현재 브리티쉬 뮤지엄에 보관중이다.


 크테시아스는 [페르시아의 역사]를 쓸 때 확실한 문헌을 따르지 않고 아시리아의 여러 왕들의 특징을 뽑고 여러 시기의 서로 다른 사건들을 뒤섞어서 사르다나팔의 초상을 만들어 낸다. 크테시아스는 고대 그리스의 도덕의 잣대로 오리엔트풍의 과도한 생활 양식을 야만적이라 규정하고 지나친 사치와 반도덕적인 행위는 왕이나 제국을 파멸로 이끈다는 귀감을 보여주려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지어낸다. 고대부터 이미 크테시아스의 역사서의 신빙성이 문제시되었다. 2세기에 활약한 그리스 풍자 작가인 루키우스(루시우스: Lucien de Samostate)의 [진실한 이야기]에 따르면, "살아 생전에 거짓말을 지껄이고 위선적인 이야기를 쓴 사람들한테 가장 끔찍한 벌을 따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크테시아스, 헤로도토스와 또 몇몇 다른 사람들한테 말이다."


 고전주의 작품처럼 선이 작품을 조직하여 통일감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장식적이다. 더욱이 곡선들은 서로 엇박자를 이룬다. 오히려 대각선을 따라 펼쳐지는 붉은색과 황금색을 통해 통일감이 부여된다. 기하학적인 구도를 취하기 보다는 소재(천, 보석, 술병, 칼, 불길...)를 되풀이하여 일관성이 생긴다. 또한 기준점을 잡기 힘든 혼란스러운 공간이 선보인다. 죽음의 원무를 추는 인물들과 널브러진 장신구로 꽉 채워져 바닥과 벽의 구분을 알 수 없다. 연기와 불길에 휩싸여 침실과 바깥의 경계도 온통 허물어진다. 삐져나온 장작더미 끝자락을 보고 겨우 화형대를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들라크루아가 보여주는 장면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기록화가 아니다. 작가 나름의 관점으로 재구성하여 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관능과 폭력, 공포가 난무하는 과도함을 혼란스러운 구성과 강렬한 색채를 통해 야릇하고 그로테스크한 작품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참고 자료
Gérard Denizeau, Les grands mystères de la peinture, Larousse, 2019, p. 152-155.

Christos Markogiannakis, "ch. 21, Plutôt mourir que se rendre", Scène de Crime au Louvre, LePassage, 2017, p. 143-153.

Carolina Brook, « La Mort de Sardanapale », Le musée du Louvre, Eyrolles, 2009, p. 218-222.

François Cheng, Pèlerinage au Louvre, Musée du Louvre, 2008, p. 114-115.

Cécile Dumoulin, Néoclassicisme et Romantisme, coll. « L’art et la manière », Musée du Louvre, 2000, p.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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