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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필구 Nov 18. 2022

바운스 by 조용feel

그것이 내게 가져다 준 것

조용필의 '바운스'라는 노래가 발표되었을 때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기억이 있다. 조용필이라는 네임벨류의 효과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그의 새로운 도전에 더 많은 동기가 있어 보이는 듯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를 리 없는 '조용필'이라는 이름은 나도 역시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노래 중 한 곡 전체를 다 줄줄 외울 정도로 알고 있는 노래는 없었다. 워낙에 명곡들이 많은 가수라 그가 발표한 노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왔고, 그래서 아주 유명한 부분(예를 들어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라든가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 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적이 있는가' 등)만 어느 정도 몇 개 알고 있는 정도였다. 내가 대중가요에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와 그가 주로 활동하던 때와는 시간적 차이가 컸기 때문에 세대가 다른 가수 또는 부모님이 특히 어머니가 좋아했던 가수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나이를 먹어가면 의례 그렇듯 이제는 지난날의 추억과 영광으로 살아가는 원로가수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바운스라는 노래가 발표된 후 나에게 있어서 그의 이미지는 180도 바뀌었다. 이제 나에게 있어서 그는 여전히 현재 진형이었으며, 과거의 그가 이뤄놓은 엄청난 영광 그리고 동시대 사람들과 공유했던 추억은 지금을 위해 과감히 내려놓을 줄 아는 진정한 문화인이었다. 그는 기존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노래를 발표했다. 그는 기존에 만들어두었던 큰 배로 시대라는 강의 흐름을 유유자적하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배를 만들어 직접 노를 젓고 물살을 가르며 강에서 튀어오는 모든 물살을 받아가며 그 모든 것을 즐기며 살아가는 현시대의 주류의 삶을 택하기로 했다. 자칫 호기롭게 시작한 새로운 시도에 의도치 않은 약간의 기름이 섞여 지금의 흐름에 섞이지 못하고 어설픈 실패로 끝나 그동안 그가 쌓아놓은 커리어에 먹칠을 할 수 있는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었다. 새롭게 발표한 그의 노래는 많은 가수들이 따라 불렀으며,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성대모사가 예능인들 사이에서는 유행처럼 번져갔다.

 그는 당당히 후배 가수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며 심지어 음악방송에서 순위의 경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행보를 보면서 뭔가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있었던 것은 나만은 아녔을 거라고 확신한다.

난 한 명의 가수로 인해 내 마음속에서 딱히 목적이 없는 추진력이 생기는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았다.

뚜렷한 목적이 없음에도 미지의 어떤 것을 향한 추진력이 생기기란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유튜브나 매체를 통해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동안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중단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갑작스럽게 스스로에 대한 어떤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의구심이라는 것은 '내가 남의 불행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이상한 취향이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남의 불행에 내가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들의 전체의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희열을 느낀 부분은 그들의 삶이 힘들었을 때가 아니라 그 그들이 그 힘듦을 극복해낸 시점이라는 것에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누군가의 인생에 전환점이나 반전이 생기는 공통적인 시점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단단한 마음을 먹게 하는 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내던 환경의 변화 또는 믿고 있던 사람에게 충격적일 정도의 상처를 받았던 일 등으로 까맣게 타버린 마음이 주연료가 되어 마음속의 작은 불씨를 더 크게 만들어 끓는점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한 가지는 마음속의 불씨를 자극하는 특별한 외부적인 요인 없이 촛불처럼 작게 타오르던 불길을 스스로 풀무질해서 크게 만들어 내는 것이 두 번째이다.

그러니까 딱히 내가 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어떤 외부적 자극이 없었음에도 스스로를 컨트롤해서 마음속의 '마음변화장치'를 가동했다는 것이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부모님 세대 또는 그 윗세대의 사람들은 주로 내가 아닌 주변의 어떠한 영향으로 그 계기가 마련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사업의 실패, 그 과정에서의 사람들의 배신, 어린 시절의 가난 등 그런 외부적 자극은 사람을 강하게게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다수의 사람들을 심적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그런 거친 과정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꽤나 드라마적이다. 그래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많다. 하지만 우리의 세대 또는 그보다 더 젊은 사람들의 세대에서는 특별한 외부적 자극은 없지만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어떤 것을 시도해보려고 하니 이미 거의 모든 분야가 너무나도 전문화되어있고, 또 새로운 것을 개척해보려 해도 거의 모든 분야가 레드오션인 세상인 탓에 그들은 사회에 뛰어들면서 아니 이미 그전에 어떤 계기를 자발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극적인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사람의 기질이 변하는 것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고 그 기세가 강하다. 하지만 스스로가 만들어낸 계기로 일어나는 변화는 조용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그 기세가 눈에 보일 정도로 극적인 경우는 드물다. 무한경쟁의 세상에서는 단거리 전도 준비해야 하지만 장거리 전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고닦은 발톱을 숨길 줄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조용히 혼자서 발톱을 갈고닦아낸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잘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그들의 과정에서는 생살을 잘라내기도 하고, 갈지 말아야 할 부분을 갈아내서 다시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발톱을 온전히 갈아내기 전에 스스로의 발톱을 드러내야 한다. 세상은 그들이 그들의 무기를 다듬을 시간 따위를 기다려줄 틈이 없다. 끊임없는 결과를 요구한다. 그리고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선 아직 제대로 다듬기 전인 자신의 무기를 울며 겨자 먹기로 드러내고 계속해서 마모를 시켜야 한다. 자신만의 무기를 만드려고 준비했던 모든 준비와 과정이 마치 최고의 명검을 만들려고 준비해놓은 일 등급 철이 대충 벗겨낸 나무자루에 꽂힌 뭉툭한 괭이가 된 모습을 보면 결국 그들은 열정을 멈추고 현실과 타협한다. 그리고 이미 멈춰버린 그들의 노력 스토리는 흥미를 유발할 수 없다. 꿈을 위해 노력했지만 현실과 타협한 주변에 널리고 널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내가 되고 싶어 했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진 모습이 되었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했다.

하지만 꿈을 포기했다고 해서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현실과 타협할 시점에 내가 꺼낸 나의 발톱은 생각보다 짧고 투박하고 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노력이었다.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그 투박한  것이라도 꺼내야 했다.  만족스럽진 못했지만 세상이 원하는 결과(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버는 것)를 어느정도 내기에 쓸만은 했다. 이제는 그 노력의 흔적도 사라지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느 날 스스로를 돌아보니 그나마 내가 갈아놓았던 발톱은 없어져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발톱 대신 생살로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집 터를 파고 있는 나를 보았다. 파도 파도 만족할 만한 크기의 구덩이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된 발톱이 없이 파려니 조금 파면 그전에 파놓았던 흙이 다시 흘러들어와 구덩이를 메운다. 그럼에도 아무런 진전이 없는 그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래야만 지금의 상태를 유지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용필이 바운스를 불렀던 날 나는 조용히 다시 내 손톱을 길러보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리고 세상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길고 강하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을 갈아볼 생각이다. 과거의 나의 이야기는 이제 재미없다. 그래서 난 현재의 나를 살아볼 생각이다. 누구보다 더 잘나고 뛰어나기보단 지금의 나를 흥미롭게 만들어 줄 생각이다. 그래서 과거도 지금도 미래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봐야겠다. 지금 이 세상을 사는 동안만큼은 나의 이야기가 재미없지 않았으면 좋겠다. 목적을 바꾸면 결과도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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