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친절한 가게를 갔었다. 그저 떡볶이가 먹고 싶었던 것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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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설 때부터 실외와 구분이 안가도록 습하고 더운 공간. 에어컨을 최저 온도로 맞추지 않으면 실내에 들어가지도 않는 이 냉정한 세상에, 심지어 음식점인데 이토록 불편하게 운영하다니. 벌써 인상이 써졌다.
떡볶이 가게는 배달로 평정한 브랜드답게 막 조리된 음식이 담긴 배달 봉투들이 널려 있었고, 검은 헬멧을 쓴 기사님들이 오가며 바쁘게 봉투를 채갔다.
홀에 직원 한 명, 주방엔 지쳐보이는 직원이 한 명 더 있었다. 홀 직원은 나와 언니가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겠다고 불러도 쳐다보지 않은 채 말한다. “잠시만요.” 포스에 밀려들어오는 주문을 처리하며 몇 초, 몇 분이 지나도 우리 테이블로 오지 않는다. 직원의 사정을 이해하고 싶었다. 한창 저녁 때였으니 많이 바쁘겠지... 바쁘겠지... 그래도 그녀는 도통 주문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때부터 두고보자는 심리가 발동했다. 나도 모르게 모멸감이 들었다. 끓어오르는 옅은 분노를 참은 채 가만히 쳐다보는 내게 곧, 자기 쪽(포스가 있는 쪽)으로 와서 주문을 받겠다고 한다. 난 다가가서 말했다.
“혹시 에어컨 온도 좀 조절해주실 수 있나요?”
마스크를 쓴 직원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이게 최대에요.”
그 말을 들은 즉시, 홱 등을 돌려 “딴 데 가자.” 하며 가방을 챙겼다. 의아해하는 언니가 되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차고 나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신과 못지 않은 내 충동과 퉁명스러운 태도를 똑똑히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신의 서비스에 최대로 실망했다는 리뷰를 행동으로 보이고 싶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화가 났다기 보다, 상처 받은 느낌이었다. 음식이 맛 없어도, 의자가 불편해도 큰 불만을 품지 않는 난데, 손님을 무시하는 태도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더운 날씨에 여기까지 굳이 굳이 걸어왔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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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서 내내 씩씩거리는 내게 언니가 말했다.
”그렇게 화 나?“
서운함과 배신감이 가득한 채 대답했다.
“저런 사람들은 장사 왜 하는 거야? 저건 손님 나가라는 거지.”
언니는 내 말에 공감했고, 이내 덤덤히 말했다.
“그래도 너도 나갈 땐 너무 무례했어. 다음에 올게요 하고 가면 되지. 뭘 그래.”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난 존중 받지 못했는데, 내가 왜? 얼토당토 않는 얘기였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들 하지만, 내가 겪었던 현실은 그렇지 않은 적이 많았다. 가는 말이 고와도 곱지 않게 받아치는 사람들이 있었고, 말을 걸지 않아도 되려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다. 그 떡볶이집 직원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는 생각에 몸서리치도록 짜증이 났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화보다 억울함이 더 컸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날 이런 식으로 대하지? 왜 본인의 분주함의 화살이 내가 되는 거지? 내가 왜 이 사람 때문에 하루의 기분을 망쳐야 하지?
억울함은 분노처럼 터지지 못한 채 꼬리를 물고 물어 나를 더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나의 성격과 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번져갔고, 내 자존감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내가 너무 초라해보였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렇게까지 곤두박질치는 내가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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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테일 매장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 커진 건 사실이다. 친절한 사람도 만났지만, 세상엔 그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더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겐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바빠 웃지 못하는 상황에선 누구라도 찰나의 불친절을 내비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난 그 상황에서도 친절을 잃지 않던 동료를 본 적 있었다. 설령 응대가 끝난 뒤에 불평하더라도, 끝내 고객 앞에선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고 노력하는 직원으로 마무리 지어냈다. 이 사람은 이런 체력이 어디서 나는 걸까. 뭘 얻기 위해 이렇게 노력할 수 있을까. 아무 이유 없이 무례한 고객에게도 친절을 포기하지 않는, 개인적인 존중보다 응대의 책임감을 최우선순위로 두던 그 태도가 경탄스러웠다.
동료가 이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가 받는 시급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객이 특별히 감사를 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 동료와 같은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기꺼이 책임진다. 친절을 내던지지 않는다.
어쩌면 동료의 태도엔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가 없이 친절할 수 있고, 자신이 맡은 일이 어떤 일인지 명확히 알며, 타인의 불친절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불친절을 불친절로 맞받아칠 시간에 더 호의적으로 다가가는 편이 결국 본인의 존재를 지키는 길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야말로 타의가 아닌 자의로, 어딜가나 자신의 쓸모를 단단히 만들어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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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 집을 나와 들어간 닭볶음탕 집에서, 내 불평 불만을 애써 들어주던 언니에게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쌩 나가는 내 뒷모습을 보던 직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잘 나갔다." 하는 안도감이었을까. 혹은 "내가 뭐 잘못했나?"하는 반성이었을까.
사실 그 직원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 사람이 내 불쾌했던 표정을 보고 뒤늦게나마 참회하여 개과천선하길 바라는 마음도 아니다. 그녀는 여느 일상처럼 똑같이 살아갈 것이고, 나를 응대했던 날도 그 중 하루였을 것이며, 운이 좋다면 태도를 바꾸기도 할 것이다.
그보단 그저 내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게 중요했다. 말투도 생각도 늘 시니컬하던 나는, 그 시니컬한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누구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타인에게 상처 받는 게 무서워 방어기제처럼 체화해왔는 지도 모른다. 기대하고 싶지 않고,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또 다시 뿌리채 흔들릴 게 무서워서. 그런데 어느새 그 태도에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잡아먹히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난 사람을 좋아하고, 원치 않아도 자주 기대했으며, 또다시 상처 받을지언정 나만의 방식으로 빠르게 회복해왔던 것 같다. 잘해주고 싶은 마음과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가지면서 그래도 늘 '함께'를 좋아했는데, 나는 왜 준 만큼 꼭 받기 위해 애썼을까.
억울한 상황은 끊임없이 생겨나겠지만, 그 끝이 꼭 구렁텅이만은 아닐 수 있다. 누가 등을 떠밀지라도 난 다시 빠져나갈 힘이 있다. 왜냐하면 내 쓸모는 무례를 무례로 맞받아치기 위해 있는 존재가 아니고, 스스로 기꺼이 친절을 ‘선택’할 수 있는 체력이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나도 내가 동경하고 사랑하는 동료들처럼 되고 싶기에. 그래야 하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기에. 그리고 내 곁에 ‘너도 무례했어.’ 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기에, 난 친절한 인간으로 살 수 있다. 친절하기 위해 대가없이 노력할 수 있다.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