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연주
고요한 집.
어디선가 들어오는 바람결에 의해 신문지 한 장이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감도는 소리와 함께 비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이 보인다. 화들짝 놀라 창문으로 향하는 메구미. 빗물로 흥건한 바닥을 바쁘게 닦아내다 말고, 닫았던 창문을 다시 열어본다.
우후죽순 내리는 풍경에 멍하니, 눈을 떼지 못한다. 그녀는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큰 창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멍하니 바라본 적이 있었다. 잎사귀를 적시고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물들을 보고 있자면, 세상에 무한한 건 없다는 것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상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빗물은 나를 외롭게도, 담담하게 만들기도 한다.
살다보면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보다 내가 내게 주는 상처가 더욱 깊고 날카롭다는 걸 느낀다. 내 선택에 의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확신은 회한으로 번지고, 곧 현재의 나에 대한 불신으로 나아간다. 관계 속에서 피어오른 불신은 상대보다 어느새 나를 향해 서 있다. 또다시 끝없는 터널을 지난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행위가 이 터널을 즐겁게 지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이다. 흘러가는 시간과 관계없이 삶에는 언제나 어김없이 터널이 등장한다. 묵묵히 걷는 시간 동안 터널의 끝을 볼 순 없어도, 잠시나마 이 곳을 잊을 순 있다. 잊게 해준 잠깐의 기억 때문에 인간은 또 다시 살아갈 수 있다. 기억을 곱씹으면서, 발판 삼아 현재의 더 나은 선택을 고민하면서.
기계처럼 화려한 연주를 마친 아이가 나가고, 켄지가 들어온다.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연주를 시작한다. 드비쉬의 <달빛>이 흘러나온다. 여전히 변함 없는 현실 속에서, 류헤이와 메구미, 카네코는 다른 시간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켄지의 작은 손가락이 그들을 이끌어낸다. 속절없이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그들은 잠시나마 모든 것들을 잊는다. 누군가는 미소 짓고, 누군가는 눈물 짓는다. 참회일까, 용기일까. 켄지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난다. 그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다. 켄지가 만들어낸 찰나의 순간이, 터널 같았던 갑절의 시간을 용서하게 만든다. 굵은 빗방울보다 아름답게 이 곳을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