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가 내리고, 고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히 움직이는 이날, 하늘이 열렸다고 한다. 개천절의 의미를 검색해 본 적은 없었는데 하늘이 열린 날이라니. 멋진 날이구나.
오랫동안 미뤘던 약속을 지키려 아침 일찍 일어났다. 매번 마음은 잘 먹으면서 실천하지 못했던 약속. 누가 시키진 않았지만 내겐 어떤 의무보다 더 무겁게 남아 있었다. 어려운 약속도 아닌데, 왜 이리 지키기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무딘 마음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좀 더 무거운 마음으로 가야 할지, 어떤 쪽이 내 친구를 위한 배려일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자기 얘기를 털어놓을 땐 힘든 티를 내지 못하는 친구였다. 가볍게 말하는 말들 속에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는 걸, 그때도 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땐 분명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하나하나 곱씹을수록 하나도 알지 못했다.
내 친구는 어떤 사람이었지. 혼자 있을 땐 뭘 했지. 날 어떻게 생각했지. 내가 슬픈 얼굴을 하고 나타나면 네가 불편해하려나. 아니면 밝은 얼굴로 가야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어떤 얼굴도 원하지 않고 그저 잊히길 바라려나. 시간이 지나도 난 내 친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은 그때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허무하게 보낸 걸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열린 날보다는 하늘에 구멍이 난 모습에 더 가까운 풍경이었다. 다행히 가는 길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출발이 반이라고, 집을 나서니 각오와는 달리 어렵지 않게 향할 수 있었다. 낯선 역에서 내려 처음 타 보는 마을버스를 탔다. 축축해진 공기를 뚫고 끝없이 언덕을 오르니 귀가 먹먹해졌다. 이렇게 높은 곳으로 갔구나. 점점 친구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설레면서도 한없이 바닥으로 쳐졌다. 버스에서 내려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진흙과 젖은 낙엽에 넘어질 것 같아 한 걸음씩 조심히 떼었다. 친구를 못 본 새에 내 체력이 많이 떨어졌단 걸 실감했다.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도 많이 지쳐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무거운 걸음 옆에 친구가 함께 걷고 있는 상상에 잠시 잠겼다. 이렇게 흐리고, 눅눅한 자연을 넌 참 좋아했었는데.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웃음이 났다.
개천절을 맞이해 사찰 기도가 한창이었다. 목탁 소리와 일정한 음의 기도문에 덩달아 잔잔해지는 걸 느꼈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간절히 소망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나름의 노력을 다하는 중이라는 생각에 경건함이 깃든다. 평화와 같은 풍경 안에 애타는 마음이 잠자코 떠돌고 있었다. 난 나와 같은 사람들을 지나, 네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수많은 이름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곧 다가오는 명절 때문인지 삼삼오오 모여 바닥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가족 단위가 보였다. 우두커니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 옅게 웃으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는 이들. 그들만의 시간이 흘러 비교적 그들을 담담하게 다듬은 모양이었다. 애끊는 슬픔보다는 잠겨있는 물결 같다. 그들과 서로서로 눈이 마주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배려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기억이 어떤 건지, 모두가 아는 눈치였다.
넌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었다. 눈높이에 있었다면 만져도 보고, 눈도 마주치고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하지만 네가 사랑했던 가수의 앨범 커버가 널 지키고 있었고, 널 사랑하는 사람들이 넣어줬을 네 애장품도 고스란히 네 옆에 있었다. 넌 분명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널 좋아하고, 그리워한다. 네가 좋아했던 것들을 모두가 알고 있었고,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두가 알고 있는 듯했다. 네 옆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웃기게도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래도 널 가만히 올려다봤다가, 다시 바닥으로 고개를 처박기를 반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무슨 말부터 전할지 고민했다. 얼굴 없이 고요하게 날 내려다보고 있는 네가 보고 싶었다. 내 옆에 편안하게 서 있을 너를 떠올렸다. 기도를 배워본 적은 없지만 내 나름의 기도를 해본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도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 네가 들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날은 올해보다 좀 더 추웠고, 좀 더 흐렸다. 꿈처럼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었고,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그때 곧 보러 갈게 했었는데, 어느새 한 해가 지났다.
잊었다기보다 잠시 묻어둔 것뿐이었어도, 네 얘기를 하는 게 점점 편해졌었다. 어쩌면 널 모르거나 잊지 못했을 내 주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애초에 편하게 얘기하는 게 쉬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낮에 네 얘기를 하면서 웃고, 돌아가는 길에 네가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며 울었던 날 들이 점차 잦아들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감사하면서도 네게 미안했다. 찾아가지 못해 미안했고, 가끔씩 네 얘기를 하게 되는 내가 싫었다. 널 보내고 나서 괜찮아지는 내가 싫었던 시간들이 꽤 길었던 것 같다.
풍경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있는 지금의 너를 보니, 너와 매치 되지 않고 내 기억 속의 너를 더 떠올리게 된다. 괜한 부채 의식과 죄책감이 무색하게도 넌 여전히 나한테 장난스러운 친구고, 어른스러운 친구로 남아 있다. 네 걸음걸이와 말투가 아직 눈과 귀에 선하다. 이제 이런 널 떠올리면서 날 오랫동안 싫어하진 않으려고 한다. 너에 대한 기억이 내겐 전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언젠가 진짜 내 하늘이 열리고 널 만날 수 있게 되면, 그땐 이 모든 게 온전히 용서될 수 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올라왔었지만, 내려올 땐 걸어서 내려갔다. 사찰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풍경도 내려다보고, 연못에 가득한 잉어도 구경하고,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이렇게 보니 쉬는 날 산책하듯 다녀도 괜찮을 곳이었다. 내렸던 비도 잦아들고, 해가 들기 시작했다. 타박타박 산길을 내려가면서 먹먹했던 귀가 조금은 뚫린 것만 같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걷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