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RS

쉬운 연인들

by HY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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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에 간 지 몇 개월이 지났다. 며칠 전부터 뻐근했던 오른쪽 아래 잇몸이 계속 신경 쓰였다. 아무리 양치질로 대충 때워보려 해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염증이 생긴 게 분명했다. 결국 미뤄왔던 치과 진료에 예약했다. 고름이 찬 잇몸을 째자 입 안에 은은하게 피 맛이 맴돌았다. 게으름의 맛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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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가 덜 풀려 얼굴이 짝짝이가 된 상태로 카페에 들어섰다. 오랜만에 휴무날 혼자 나선 김에, 사람 구경이나 하며 뭔가를 끄적이고 싶었다.

적당히 시끄러운 카페 안에는 각자 짝이 있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혼자 카페를 찾을 때마다 항상 신경 쓰이는 풍경이다. 괜히 주변을 한 바퀴 맴돌다 구석 자리를 찾았다. 마주 보고 앉아야 하는 다인석, 심지어 또래의 젊은 남녀와 정면으로 마주 앉아야 하는 자리였다. 혹여 그들의 중요한 만남을 방해하지 않길 바라며,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히 했다. 그들 또한 날 의식하는 것 같았다. 서로를 향하던 시선을 살짝 비켜 두고, 정면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도 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대화로 향했다. 두 사람이 눈에 띄게 멋진 남녀였기 때문도 있었다.

처음엔 당연히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를 듣다 보니 어딘가 미묘했다. 딱딱하지 않은 존댓말, 서로를 탐색하기 위한 예리한 시선. 소개팅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전형적인 데이트 분위기도 아니었다. 여자는 이미 조각나버린 휴지를 다시 뜯고 뜯으며 말을 이어갔고, 남자는 몸을 조금 기울인 채 팔짱을 끼고 맞장구를 쳤다. 연갈색 웨이브 머리에 코 피어싱을 한 여자는 화려했고, 페미닌 한 슬리브리스에 여러 개의 비즈 팔찌와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기른 장발을 질끈 묶고, 면도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턱수염과 검은 리넨 셔츠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들은 아직 연인은 아니지만, 이미 연인이 되어가는 관계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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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주제는 들쭉날쭉했다. 평소에 뭘 하는지, 취미 같은 가벼운 이야기에서 가정환경 이야기로 넘어갔다. 있는 그대로 본인의 모습을 인정해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기대를 거는 부모 얘기였다. 한쪽은 막내라서, 한쪽은 맏이라서 피곤하다는 말에 묘하게 공감했다. 한국의 부모는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나중에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로 흘렀다.


“저는 임신 싫어요… 사람 안에 또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갑작스러운 말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멈췄다. 이들의 만남은 분명 소개팅도, 데이트도 아닌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게 이상했다. 남자는 공감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주억였다. 결혼과 임신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는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별 다른 말을 덧붙이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흔히 보아온 장면이었다. 출산과 양육 앞엣 여성은 말이 많아지고, 남성은 한 발 물러나 웃음으로 무마한다. 아직 가깝지 않은 상대를 위한 배려일 수도, 혹은 자신의 삼과는 무관한 주제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곧이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친구를 소개하는 일은 결국 또 자신을 소개하는 일인데, 남자는 주변에 친구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본인의 삶은 ‘심플’하다고. 주변에 친구가 많지 않은 게 심플한 걸까. 난 보통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느낄 때 더 복잡해졌던 것 같은데. 여자는 남자의 말에 꼬리질문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저는 밝은 여자 애들 보면 싫어요. 본인은 우울하고 힘들다고 하는데, 진짜 힘들어본 애들이랑 정서적인 깊이 차이가 무조건 있거든요? 지네가 좋은 환경,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서 행복하다고 단정 짓고 사는 애들 있잖아요. 그런 애들, 솔직히 좀 폭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맞아 맞아… 있어, 그런 애들.”


그들은 비슷한 혐오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에 대한, 결혼과 임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 싫어하는 대상이 겹칠수록 대화는 빨라지고 단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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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싫어하는 게 비슷하면 잘 만날 수 있다는 말. 그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연애에서는 달랐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들여다볼 때 비로소 가까워지고 있다는 감각이 생겼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사람의 얼굴은 유난히 예뻐진다. 사랑은 싫은 것보다 좋은 게 더 많아질 때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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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는 서로의 말에 공감하고 있지만, 서로를 파악하며 조금씩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선을 넘지 말아야겠다는 긴장, 이 순간 상대방의 눈엔 적어도 괜찮은 사람으로 남아야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잠시의 정적을 뒤로하고, 여자가 입을 뗐다.


“저 말고 또 인스타로 사람 만나본 적 있어요?”


이들의 대화를 훔쳐 듣던 내 오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친근하게 대하면서도 묘하게 거리를 유지하던 이유, 초면이지만 구면 같은 분위기. 남자는 시선을 피하며 머뭇댔다.


“… 없는 것 같은데요?”


없으면 없는 거지, 없는 것 ‘같은데’는 뭘까. 속이 훤히 보이는 남자의 대답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예상한 대로 여자는 곧바로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애써 깊게 캐묻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요. 진짜 제가 처음이에요?”


“처음이에요. 처음인 것 같아요. 근데 제가 먼저 팔로우했었나요? 제 인스타는 어떻게 안 거예요?”


“몰라요. 음… 어쩌다 보니까 찾게 됐어요. 사실 인스타는 소개팅 앱도 아니고, 요즘엔 아무나 다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솔직히 아무 생각 없이 만나고… 다들 그러지 않나.”


아무나 다 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만난다… 그러니까 인스타그램으로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 무뎌졌다는 뜻이다. 사실 내 주위에도 많았다. 인스타그램 메시지로 만나고, 실제로 연인이 되는 경우 말이다. 요즘은 SNS에 자신의 취향을 전시하며 공유하는 게 당연하기도 하거니와 그게 다수에게 좋은 영향으로 발전하곤 한다. 그런데 사랑은 조금 다르지 않나. 아니, 이들이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닌 건가. 화면 속에 전시된 취향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그 판단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만나보는 일. 더 알고 싶다는 욕심과 빨리 결론짓고 싶다는 조급함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저는 몸에 안 좋은 건 안 해요. 술도 잘 안 마셔요.”


“아 술을 안 마셔요?”


남자는 왠지 화들짝 놀란다. 여자는 내내 뜯고 있는 휴지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몸에 안 좋은 건 하지 않는다며, 제로콜라도 마시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에 반해 남자는 본인은 하루에 한 번 제로콜라를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고 말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남자가 몇 번 맞장구를 치자, 점점 재미가 들린 것 같았다. 그녀는 호구조사를 이어갔다. 평소 생활 습관은 어떤지, 흡연은 하는지, 최근에 개봉한 <서브스턴스>를 봤는지 등의 질문이었다. 남자는 쏟아지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3초씩 생각에 잠기고 겨우 대답한다. 어디까지 말하면 괜찮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지 적정선을 찾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점점 심오해지고 있었다. 건강에 대한 얘기가 끝나가니,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얘기가 따라왔다.


“저는 죽는다는 거에 큰 무서움은 없는 것 같아요. 평소에 하도 그런 생각 많이 하다 보니까. 갑자기 사고 나서 즉사한다고 하더라도, 별 생각 안 들어요.”


“저도 그래요. 뭐 죽게 되면 죽어야지… 뭐 어떡하겠어.”


두 사람이 죽음에 대한 무감각을 공유하며 함께 실소한다. 우연찮게 짧은 삶을 원하는 이들끼리 만났다. ‘그렇게 되면 그래야지.’라는 간단하고 명료한 결말 앞에서 이들의 대화는 끊겼다. 정적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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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을 한 끗 차이라고 했나. 시작했으면 끝이 있고, 끝이 나면 또 다른 시작이 보인다. 그런데 두 쪽 다 과정의 마지막을 미리 예측하고 저지르진 않는다. 어쩌다 보니 시작하고, 시작했으니 노력해 보다가, 결국 나름대로의 결말을 맞는다. 중요한 건, 노력이 따랐던 과정의 결말은 그 끝이 성공이건 실패이건 상관없이 결코 허무하진 않다.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는 건 그만큼 노력에 무감각하고,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건 연인이라는 관계 속 변해가는 열정 앞에서 결코 밝히고 싶지 않을 진실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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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는 각자 허공을 바라본다. 곧 남자가 기지개를 켜더니 덮어놨던 핸드폰을 두드린다. 뜬금없이 합정에서 안암까지 몇 분이 걸린다고 말해둔다. 여자와의 만남 이후에 또 다른 약속이 있는 것 같았다. 여자도 별생각 없이 곧 일어나자고 말한다. 두 사람은 꽤나 닮아 보였지만, 닮은 서로의 모습에 지루함을 느낀다. 짧은 시간 안에 쏟아냈던 서로의 정보들에 피로해한다. 마치 침대에 늘어져 텅 빈 눈으로 몇 시간씩 쇼츠와 릴스를 반복하며 돌아다니는 모습 같달까. 도파민은 분출해서 멈출 수 없는데, 점점 무미건조해지는 느낌. 그들이 오늘 나눴던 서로의 정보 중에 인상 깊었던 건 뭘까.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됐을까.

어느덧 두어 시간이 흘렀고, 그들의 대화는 멈췄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휴지를 다시 조각내어 찢고, 남자는 다 마신 커피잔을 연신 들이켠다. 이제야말로 자리에서 일어날 타이밍이지만, 여자는 다시 한번 질문을 하기로 한다.


“남자로서 볼 때 저는 어떤 여자 같아요?”


남자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여자는 긴장 반, 의심 반의 눈동자로 남자를 지켜본다. 여자는 불과 한 시간 전에, 자신은 타인의 말에 쉽게 흔들린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남자는 불쑥 말한다.


“음… 기가 센 편인 것 같아요.”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남자를 바라본다.


“여자 많이 만나보셨어요?”


남자는 튀어나온 말에 장황한 해명을 시작한다. 여자 또한 질문과 해명을 오간다. 쉬운 사랑을 원하지만, 쉽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순적인 마음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약 서너 시간 동안 나눈 이들의 대화가 결말 없는 질문과 무방비한 방어전으로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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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어둑어둑할 때 즈음 카페를 나섰다. 저 둘은 연인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닮은 점이 있었으니, 가능성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연인이라는 형태가 저런 모습이라면, 선뜻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일련의 전개가 생략된 채 시작부터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관계처럼 보였으니까. 마치 러닝타임이 3시간 정도 되는 영화를 요약본으로 20분 안에 본 느낌. 분명 영화를 본 것 같긴 한데, 정작 본 건 아무것도 없는 상태. 가속화와 간소화 속에서 관계 역시 재빠르게 소비됐다. 느긋하게 누군가를 알아가는 시간도 사치가 되어버리고, 서로의 마음을 확신하고 책임지기 이전에 판단이 서둘러진다. 끌리면 일단 시작하고, 아닌 것 같으면 빠르게 종료한다. 안 그래도 정신없이 변해가는 세상에서 사랑마저 효율과 가성비의 문제로 환원되어가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으로 사람을 사귀는 게 가능해?”

“요즘 주변에 많아. 다들 그러던데.”


친구들과 수십 번 주고받았던 대화다. 행복한 순간만 담겨 있는 SNS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는 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요즘 다들 그렇다 하니 그런가 보다 살았다. 하긴, 상대방에 대해 모든 걸 다 알아도 헤어질 수 있는 게 연애이니, 별 상관없을 수도 있겠다. 이젠 만남은 쉬워도, 만남을 지속하는 게 더 어려운 세상이 됐다. 아무래도 얻는 것에 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고 여길 테니 말이다.

사랑의 형태를 정의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보다 ‘열심히’ 사랑할 순 있다. 낭만엔 낭비가 필수적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물리적인 행동을 통해 노력과 책임을 쏟아내는 것이 그저 자연스러운 관계. 그런 관계를 연인이라고들 한다. 연인은 판단하지 않는다. 누가 더 앞서 가는지, 멈추는지 따지지 않는다. 함께 걸어보기 위해 노력하고, 멈출 것 같으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기도 한다. 사랑에 지름길 같은 최적의 경로는 없다. 건강한 몸을 위해 꾸준히 운동해야 하는 것처럼, 본능적인 식욕을 굳이 통제하는 것처럼, 긴 시간 동안 고통과 노력이 따른다. 건강한 삶과 사랑은 계속 함께 간다. 사랑을 대하는 태도가 내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우린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 어떤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걸 하고 있는 걸까.


How is it so simple to unlove?

자이언티- 'UNLOVE (prod. HONNE)' 가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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