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함이 휩쓸고 간 자리에 다시 선을 긋는 일
누군가 신발을 신은 채 내 방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는 문지방을 넘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악의가 없다는 해맑은 표정은 때로 가장 날카로운 흉기가 된다. 상대는 무감각하게 영역을 넓히고, 그 무심한 발걸음에 정작 마음이 베이는 건 나의 몫이다.
예민한 탓일까.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남들은 웃어넘길 농담에 정색하고, 문장 뒤에 숨은 가시를 기어이 찾아내는 내가 유난스러운 것은 아닌지. 부정의 언어로는 예민함이라 부르겠으나, 긍정의 언어로는 감각이 깨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섬세한 레이더가 있었기에 나는 무수한 침범 속에서도 나를 지켜낼 수 있었으므로.
불편함은 늘 방어하는 자의 몫이다. 침입자는 경계가 있는 줄도 모르고 휘적휘적 팔을 젓는데, 나는 혹여나 그를 밀어내는 내 손짓이 거칠까 봐 숨을 죽인다. 나의 영역을 지키려는 정당한 행위가 공격으로 오해받을까 두려운 것이다.
사고하는 인간으로 살아온 지 삼십 년이 넘었다.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어도 관계의 마찰음은 여전히 낯설고 거북하다. 다만 직감적으로 알 뿐이다. 이 불편함을 견디고서라도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을. 흐릿해진 경계선 위에서는 누구도 온전한 자신으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완벽한 것은 없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흔들리고, 부서지고, 다시 아문다. 인간이 완벽했다면 고통도 없었겠으나, 성취의 기쁨이나 안도의 한숨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침범을 생의 필연으로 받아들인다.
감정이라는 렌즈에 습기가 차면 세상은 왜곡된다. 나는 안경을 닦듯 마음을 정돈한다. 모든 공격에 맞서 싸울 수는 없다. 무시할 것은 흘려보내고, 지켜야 할 것은 단단히 움켜쥐는 것.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무너진 흙을 다시 쌓아 올려 오늘 하루 분량의 울타리를 완성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례함이 지나간 자리에, 나는 다시 고요하게 선을 긋는다.
이 기록은 혼자가 아니다.
같은 톤의 글이 매거진 〈마음의 각도를 풀다〉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