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순연(順延)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잠시 닫아건 수문에 대하여

by Lila

이십 년의 시차를 두고 다시 새벽을 맞았다. 서류 더미의 높이가 숨을 조여오던 2005년의 그날처럼, 밤을 잠의 영역으로 돌려보내지 못한 채 창가에 앉아 있다.


밤새 보이지 않는 지능과 씨름했다. 기대는 짙었으나 화면은 침묵했고, 쏟아부은 시간은 형체 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소진된 에너지의 자리에 남은 것은 설명하기 힘든 허무였다. 이토록 많은 열량을 태워야 할 만큼 그것이 절실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사이 아침이 왔다.


햇살이 키보드 위로 얇은 그림자를 드리울 무렵, 전화가 울렸다. 며칠 전부터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예감이 현실의 언어로 당도했다. 나를 아끼던 지인이 사선을 넘어 돌아왔다는, 안도와 충격이 뒤섞인 소식이었다. 직감은 틀리지 않았고,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와 이미 지나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면은 고요했다. 깊은 곳에서 요동쳐야 할 파문이 일지 않고, 마음의 수면은 거울처럼 평평했다.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반응은 아니다. 감정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 질서 정연하게 다른 공간으로 옮겨진 듯했다. 이성이 먼저 나서서 상황의 지도를 펼치면, 감정은 그 뒤편에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다.


내 안에는 위기의 순간에만 작동하는 오래된 회로가 있다. 긴박함이 목 끝까지 차오르면, 몸은 스스로 감정의 수위를 낮추고 논리의 수로를 개방한다. 휩쓸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생존 본능이 설계해 둔 유일한 건축술이다.


그러니 지금의 건조함은 냉정이 아니라 상태다. 내 안의 물기가 증발한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범람을 막기 위해 스스로 수문(水門)을 닫은 것이다. 밤새 소진된 열량의 잔해와 타인의 위기, 그 무거운 하중을 동시에 버티기 위해 그릇은 잠시 단단해져야 했다.


나는 감정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한다. 당장 손에 쥐지 않아도 될 짐을 내려놓고, 숨 쉴 최소한의 여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붕괴를 막기 위한 나의 최선임을 부인할 수도 없다.


창밖은 이미 환하다. 밤샘의 무게는 눈꺼풀에 내려앉고, 허무는 가슴 어딘가에 은은한 그림자로 남았다. 오늘의 나를 평가하는 일은 미뤄둔다. 다만 명확한 사실 하나를 기록할 뿐이다. 감정보다 이성을 선두에 세운 덕분에, 나는 이 잔해 속에서도 부서지지 않고 아침을 맞이했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문밖에 서서, 제 차례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 기록은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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