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흔드는 파동, 그 너머의 침묵
이틀 연속 외부인들과 식탁을 마주했다. 나만 느끼는 무게는 아닌 듯하다. 옆자리의 과장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습관처럼 진통제를 찾는다. 사회적 예의와 센스라는 얇은 가면을 쓰고, 상대는 눈치채지 못할 배려를 끊임없이 내어놓아야 하는 자리. 우리는 음식이 아니라 긴장을 삼키고 있었다.
새로운 직책을 맡은 지 반년이 된 그녀는 꽤 단단해 보였다. 짧고 건조한 말투 탓에 무심한 사람이라 여겼는데, 오늘 보니 깊은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연스러운 미소로 근황을 전하는 그녀의 얼굴 뒤로, 나는 또 습관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어낸다. 세월이 빚어낸 자신감, 자긍심, 혹은 그 속에 숨겨진 온화함 같은 것들. 말하지 않아도 읽히는 정보들이 공기 중에 부유한다.
자리는 부드럽게 끝났으나, 오후 내내 몸 어딘가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 긴장을 풀지 못한 근육처럼 내 안의 감지 센서가 여전히 작동 중이다. 사회적 톤을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비싼 에너지를 요구한다. 겉모습은 매끄러웠으나, 안쪽은 조용히 마모되고 있었다.
퇴근 후 현관을 넘어서자 저마다 다른 온도의 생명들이 나를 맞이한다. 고양이들의 조용한 발걸음 뒤로, 하이톤의 에너지를 가진 딸들이 기다렸다는 듯 하루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평소라면 반가웠을 그 밝음이, 오늘은 물리적인 타격으로 다가온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뇌를 흔든다. 귀로 들어온 소리가 머릿속에서 파동이 되어 출렁거리는 느낌, 어질어질한 현기증이 인다. 심지어 대답을 하는 내 목소리의 울림조차 통증으로 번진다. 평소엔 문제없던 데시벨이 오늘은 견디기 힘든 소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들은 엄마가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에 서운한 기색을 비친다. 미안함이 스치지만, 지금은 공기의 무게조차 버겁다. 소리가 시끄러워서가 아니다. 낮 동안 쏟아낸 에너지의 총량이 내 안의 수용력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표정을 읽고, 말의 온도를 맞추느라 소진된 여백에는 더 이상 사소한 대화조차 들어찰 틈이 없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다. 이제는 침묵이 필요한 시간이다.
사람의 뇌에는 자극을 견디는 역치가 존재한다. 내 목소리마저 나를 흔든다는 건, 허용된 에너지가 바닥났다는 명확한 신호다. 나는 오늘을 잘했다거나 힘들었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확인한다. 오늘 나는 충실히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고, 그 대가로 내면의 고요를 지불했음을.
이제 남은 일은 텅 빈 여백을 다시 채우는 것이다. 침묵은 회피가 아니다. 파동이 멈춘 고요 속에서, 소진된 감각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유일한 회복의 의식이다.
이 기록은 혼자가 아니다.
같은 톤의 글이 매거진 《마음의 각도를 풀다》에 이어진다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