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AI가 만들어준 두 시간, 나는 무엇을 했나

시간은 늘었지만, 의미는 늘지 않았다

by Lila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하루 종일 바빴는데 정작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27년간 일했지만, 최근 몇 년은 특히 그랬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데이터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쓰고, 회의록을 정리하면 하루가 끝났다. 중요한 일을 하고 싶었지만, 반복 작업에 시간을 빼앗겼다.


2023년 말, ChatGPT를 본격적으로 써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이게 정말 내 업무를 도와줄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이메일 초안 작성을 맡겨봤다. 놀라웠다. 30분 걸리던 일이 10분 만에 끝났다.


그날 저녁,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뻤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20분을 절약했는데, 그 시간에 뭘 해야 하지?"

시간이 생겼지만, 의미는 없었다

AI는 시간을 만들어줬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절약된 20분을 또 다른 이메일 확인에 썼다. 일주일 후, 반복 작업이 줄었지만 나는 여전히 하루 종일 바빴다. 시간은 늘었지만 의미는 늘지 않았다.


문제는 AI가 아니라 나였다.


AI는 도구일 뿐이고, 그 도구로 무엇을 할지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재설계하기로 했다. 27년 동안 해오던 루틴을 백지에서 다시 그려보기로 했다.


Before: AI 없던 하루

2023년의 어느 화요일을 기억한다.


오전 9시, 출근하자마자 이메일함을 열었다. 밤사이 쌓인 20통의 이메일. 중요한 것, 긴급한 것, 그냥 참조만 된 것. 하나씩 읽고 회신하다 보면 10시가 넘었다.


10시부터 12시까지는 보고서 작성. 엑셀에서 데이터를 복사해서 붙여 넣고, 숫자를 다시 계산하고, 표를 만들고, 그래프를 그렸다. 2시간이 흘렀지만 초안조차 완성하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회의가 두 건 있었다. 3시가 되어서야 자리로 돌아왔다. 오전에 못 끝낸 보고서를 이어서 작성했다. 5시가 되어서야 겨우 완성.


5시부터 6시까지는 오전 회의록을 정리하고, 오후에 온 이메일을 다시 확인했다. 퇴근 시간. 하루가 끝났다.


무엇을 했나? 이메일 50통을 처리하고, 보고서 1개를 완성하고, 회의 2건을 참석했다. 바빴지만, 그게 다였다. "오늘 가장 중요한 일은 뭐였지?"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질문을 바꾸다


"시간을 어떻게 절약할 것인가"가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로 질문을 바꿨다.


그러자 보였다. 내 하루는 반복 작업(5시간), 실행 업무(2시간), 잡무(1시간)로 채워져 있었다. 정작 중요한 '전략적 사고'는 겨우 1시간도 안 됐다. 회의 중 잠깐 생각하는 시간이 전부였다.


27년 일했지만, 나는 하루 종일 '실행'만 하고 있었다. '사고'는 하지 않고 있었다.

AI가 반복 작업을 대신해 준다면, 나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더 많은 이메일? 더 많은 보고서? 아니다.

나는 생각해야 한다.


오전 9시 30분


2024년 1월, 나는 달력에 새로운 일정을 추가했다.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제목은 "전략적 사고 시간". 이 시간에는 이메일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고, 회의도 잡지 않기로 했다.


처음 일주일은 불안했다.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메일이 쌓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손이 자꾸 핸드폰으로 갔다.


하지만 일주일을 버티니, 달라졌다.


이 시간에 나는 물었다. "이번 주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ChatGPT에게도 물었다. "우리 팀 프로젝트의 리스크는 무엇일까?" AI의 답변을 보며 내가 놓친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회의에서 그 리스크를 미리 언급했다. 팀원들이 놀랐다. "어떻게 그걸 미리 생각하셨어요?"


생각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AI는 시간을 만들어줬고, 나는 의미를 채웠다


2024년의 어느 화요일.


오전 9시, 출근하자마자 ChatGPT를 열었다. "다음 3개 이메일의 답장 초안을 작성해 줘"라고 입력했다. 10분 후, 초안을 검토하고 수정해서 발송했다. 30분 만에 이메일 20통 처리 완료.


9시 30분, 나는 노트를 펼쳤다. 오늘은 화요일. 이번 주 목표를 다시 점검하는 날. "월요일에 세운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나?" ChatGPT에게 물었다. "어제 업무에서 놓친 부분이 있을까?" 20분 동안 AI와 대화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10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는 Claude에게 데이터 분석을 맡겼다. "이 엑셀 파일에서 월별 상위 10개 항목을 뽑고, 전월 대비 증감률을 계산해 줘." 5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 나머지 시간은 그 데이터를 보며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를 생각했다.


11시 30분, 보고서 초안을 AI에게 요청했다. 30분 만에 검토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오전에 중요한 일을 다 끝냈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는 여전히 회의. 하지만 오전에 생각을 정리해 뒀기 때문에, 회의 중 내 발언이 달랐다. 질문이 더 날카로웠고, 제안이 더 구체적이었다.


3시, 회의록은 ChatGPT에게 맡겼다. 내가 메모한 내용을 붙여 넣고 "회의록 형식으로 정리해 줘"라고 입력. 20분 만에 검토 완료.


3시 30분부터 5시까지는 심층 분석 시간. 오전에 Claude가 정리한 데이터를 보며, 다음 분기 전략을 고민했다. AI는 데이터를 정리해 줬고, 나는 전략을 짰다.


5시부터 6시까지는 팀원들과 1:1 미팅. 각자 10분씩. "이번 주 어려운 점은 없어?" "다음 주 어떤 걸 도와줄까?" 예전에는 이런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매일 한 명씩 만난다.


퇴근 시간. 하루를 돌아봤다. 오늘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나? 다음 분기 전략의 윤곽을 잡은 것. 팀원 한 명의 고민을 들어준 것. 이제는 답할 수 있다.


시간의 재배치


AI가 5시간을 2시간 30분으로 줄여줬다. 나는 그 2시간 30분을 전략적 사고(+1시간 30분)와 팀 관리(+1시간)에 재배치했다.

숫자로 보면 이렇다.


Before

반복 작업: 5시간 (62.5%)

전략적 사고: 1시간 (12.5%)

실행: 2시간 (25%)


After

반복 작업: 2.5시간 (31%)

전략적 사고: 2.5시간 (31%)

소통·협업: 2.5시간 (31%)

검증: 0.5시간 (7%)


하지만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다.

AI 도입 전에는 하루 종일 바빴지만 공허했다. AI 도입 후에는 하루가 덜 바빠졌지만 충만하다. 전략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고, 팀원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고, 일의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이 있다.


27년 차가 AI 앞에서 배운 것


나는 27년간 일했다. 그동안 나는 '시간 관리'를 배웠다.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법. 하지만 AI를 만나고 나서, 나는 다른 것을 배웠다.


시간의 의미.


AI는 시간을 만들어주지만, 의미는 만들어주지 않는다. 20분을 절약했다고 해서 그게 자동으로 의미 있는 20분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그 시간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그 20분은 의미가 되기도 하고 공허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바쁜가'가 아니라 '무엇에 시간을 쓰는가'다.


AI 도입 전, 나는 매일 밤 퇴근하며 생각했다. "오늘도 참 바빴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AI 도입 후, 나는 매일 밤 퇴근하며 생각한다. "오늘 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팀원의 고민을 들어줬다. 다음 분기 전략의 방향을 잡았다."


바쁜 하루에서 의미 있는 하루로. AI는 그 전환의 도구가 되어줬다.


당신의 두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마 AI를 쓰고 있을 것이다. ChatGPT든, Claude든, Gemini든. 그리고 아마 시간을 절약했을 것이다. 30분이든,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더 많은 이메일을 처리하는가? 더 많은 보고서를 쓰는가? 아니면, 생각하는가? 의미를 만드는가?


AI가 만들어준 시간은, 당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묻고 있다.


나는 27년 만에 그 질문에 답했다.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이 글은 'AI와 일하는 법'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매주 월·수·금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