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가네

비오는 날의 회상

by 이남해

나에게 있어서 비는 그리움이다.


봄비는 떠나버린 계절과 다 이루지 못한 겨울의 꿈을.


여름비는 끈적한 밭 내음과 뜨거운 뙤약볕 아래 지글지글 끓던 갯벌, 그리고 해남밑의 아카시아나무의 지친 그림자를.


가을비는 늦여름 고달픈 석양과, 지나버린 태풍, 그리고 익어버린 나락의 노랑과 논 내음을.


겨울비는 끝없이 요구해 오는 겨울 바다와 비릿한 굴(石化) 내음과 그걸 지켜보는 갈매기를 소환한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몸살을 앓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비를 기다리며 창밖으로 코를 킁킁거린다.

어제부터 다리가 욱신거리더니, 새벽부턴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여름비...


어제의 지친 나뭇잎들은 오늘의 비로 처진 잎들이 솟아오르고, 먼지로 둘러쳐진 시멘트 빌딩과 아스팔트의 길들이 때를 벗겨 나간다.

나는 어두운 사무실 형광등 밑에서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비를 바라다보고 있다.

코를 킁킁거려보지만 매캐한 먼지 냄새만이 날 뿐 땅 냄새랑 비에 젖은 풀내음은 나지 않는다.


나의 고향에 내리는 여름비는 언제나 바람이 일고 난 다음에 내리곤 한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바람이 일면, 들판에서 일손을 멈추고는 길가에 내어다 놓은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려 바삐 굳은 허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뒤로 땅내음과 습한 풀내음을 가진 바람이 불어닥치고, 연이어 비가 쏟아졌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햇빛에 말려가던 농작물들은 비에 몸을 사뿐히 적시고 있고, 일찍 귀가한 이웃집 아저씨와 어린아이들이 모두 나와서 내 집 것, 네 집 것 할 것 없이 널려 있는 곡식들을 주워 담기가 바쁘다.

순식간에 곡식들을 주워 담아서 집안으로 들어서면 빗줄기는 강해지고, 우리는 맺힌 땀을 닦으면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다본다. 매캐하면서도 이상시리 정겨운 썩어가는 대청마루의 곰팡내음과 삐거덕거리는 고리 빠진 정지문의 덜컹거림이 한층 더 나를 비에 젖게 만든다.


그런 날의 여름이면 집집 대들보에 매달아 놓은 마늘 냄새가 온 동네를 휘감았다.

쿰쿰하고 알싸한 공기가 축축한 바닥을 유영할 땐, 나는 어김없이 부침개를 부쳤다.

부침개 냄새는 비를 뚫고 금방 동네 어귀에까지 퍼져 나가고, 냄새를 찾아오는 동네 어르신들과 집 식구들에 의해 부침개는 금방 없어지곤 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노곤해진 몸으로 창호지를 통해 건너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그 밤 나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꿨다.


다음날 맑게 개인 하늘 저쪽 바닷가에 썰물이 빠져나가면 우리는 모두 옷을 차려입고, 갯벌로 꼬막을 잡으러 뙤약볕 속으로 한없이 걸어간다. 다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쯤이 지나서 밀물이 밀려와야 다시 육지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은 햇볕에 익은 얼굴과 진흙투성이의 손발, 꼬막으로 가득한 다라이를 이고 집으로 향하는데, 축 쳐진 발걸음 뒤로는 또한 지친 태양이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그 사이로 해남밑의 아카시아 나무가 여름에 지친 듯 잠을 청하고 있었다.

20190713_190012.jpg < 내 고향의 흔한 저녁 노을 >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내 고향의 열일곱의 여름과 겨울과 또 그와 함께한 비를.

지친 머리를 안고 형광등 불빛 아래에 앉아서 마구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오늘은 또 몸살을 앓을 것이고, 내일은 개인 하늘 아래에 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창 밖의 초록잎은 더욱 짙어질 것이고, 도시의 콘크리트 벽은 색깔을 달리할 것이다.


나는 내일의 그리움이 될 오늘의 비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